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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승주 Apr 04. 2023

가끔씩은 세상이 왈칵 뒤집어졌으면

성북동엔 '수연산방'이라고 하는 공간이 있다. 소설가 이태준의 생가라고 한다. 운치 있는 그의 문장 때문인지, 괜히 운치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좋은 곳이다

나는 자본주의가 좋다. 그저 돈이 좋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자유로운 경쟁을 통한 결과를 존중한다는 점이 좋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 받는 사회는 더 좋은 능력으로 더 많은 일을 한 사람에게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적절한 사회보장제도만 갖추어진다면 역사적으로 가장 성공한 사회 모델은 자본주의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자본주의도 가끔은 아주 바뀌어버렸으면 하는 날도 있다.


중환자실에 한 할머니가 입원했다. 흔한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경우에 해당했다. 고령에 병은 이미 깊었고, 기도가 확보되지 않아 기관절개를 진행했고 그로 인해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자녀들은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다 면회 시간이면 환자의 손을 붙잡고 "얼른 또 건강해져서 여행도 다니고 하셔야죠"와 같은 말을 건네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의사 선생님은 "쉽지 않다"라는 말만 에둘러 건네고 있었다. 보호자와 환자, 그리고 의료진이 모두 조금 더 솔직하게 이야기를 건네고 상황을 바라보았다면 더 의미있는 시간들을 보낼 수 있었지만, 늘 그렇듯 그런 일은 쉽지 않았다. 이제 이렇게 시간이 흐르다 환자는 어느날 삶을 마감할 게 분명했다.


그날도 비슷한 풍경이었다. 면회 시간이 되어 자녀들이 찾아왔고, 자녀들은 환자의 손을 잡고 희망 섞인 응원을 건네고 있었다. 그런데 할머니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목에 뚫어놓은 구멍으로 인해 바람이 자꾸 새서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던 할머니는 문득 자녀의 손을 잡고 손바닥 위에 글을 썼다.

   '돈'

자기가 자꾸 중환자실에서 시간을 보내서 돈이 걱정된다는 것이었다. 자녀는 할머니를 다그쳤다.

   "어머니, 저 돈 많아요. 돈 걱정하지 마시고 얼른 힘내서 건강 회복하세요."

병원에서 의료비 지원을 검토하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돈이 많다는 그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자녀는 그렇게 거짓으로 할머니를 안심시키며 병원을 떠났다. 물론 할머니는 며칠 지나지 않아 허탈히 생을 마감하셨다. 대부분의 마지막이 늘 그러하듯.


나는 비교적 냉정한 편이다. 감성적이기보단 이성적이라 차갑다는 이야기도 종종 듣곤 했다. 과정이 정의로우면 결과는 얼마든 정의로울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내게 자유시장경제는 늘 정의롭고 공정한 세상 같았다. 하지만 생명이 꺼져가는 마지막 순간에 인간이라는 존재가 힘을 짜내어 건네야 하는 단 한 마디가 고작 '돈'이라니.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노라면 가끔씩은 내가 옳다고 믿고 있던 세상이 왈칵 뒤집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생명의 탄생을 축복하고, 저마다 삶의 다양한 모습들을 사랑하고, 고결하게 죽는 것이 보편적인 가치가 되는 세상. 순진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런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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