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6살 이후로 친구를 때린 적이 없다. 때릴만한 상황도 참고 넘어가는 걸 보면 나는 나 스스로에게 너는 절대로 누군가를 때려선 안된다 라고 주문이라도 걸어둔 것일까, 그냥 경찰서에 가기 싫은 걸까.
참 심심한 어른이 되었다.
이 쪼그만 나쁜 년은 우리 집 윗집에 살았다. 그애 삼촌이 우리를 포함한 다섯 가구가 전세로 살던, 그 다세대 주택의 주인이었으나 실질적인 집주인 행세는 그 애 아빠가 주로 했다. 바지사장 같은 개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일단 그것부터 좀 재수없는 계집애 냄새가 나는데 어려서 그걸 모르고 녀석과 어울렸다.
우리 삼촌 집은 진짜 크다.
우리 삼촌 집에는 굉장히 고급스러운 푸들이 두 마리나 있다.
우리 삼촌 집은 백 평도 넘는다.
그 애가 주로 한 말이다.
그 계집애도 어지간히 그 집에서 살고 싶었을 것이다. 삼촌네 댁으로 심부름을 가야 한다기에 그 쪼끄만 계집애를 따라나선 적이 있다. 근처의 평범한 아파트였다. 그 삼촌이라는 작자는 생질녀가 더운 여름 땡볕에 심부름을 왔는데도 얼굴만 빼꼼히 내밀어 물건을 챙겨 받더니 쾅 소리가 나게 문을 닫았다. 문전박대라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그 조잘거리던 주둥아리는 오는 내내 시무룩히 닫혔다. 지금의 나라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 두 마디 했을 법도 하지만 어린 나는 잔인한 구석이라곤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우린 싸우다 화해하다를 반복하는 친한 사이였는데 중심에 염소라는 친구가 하나 껴 있었다. 나만큼 아니 나보다 훨씬 더 아니 지지리도 염소네 집은 가난했다. 염소네 집은 밖에서 봐도 가난하다고 쓰여있었다. 그 낙인이 염소를 항상 따라다녔다. 못된 것만 배운 것들은 그 집 앞을 지나가며 내가 모른다는 듯 친절히 알려줬다.
-저거, 저거 염소네 집이다-
그 주변에 사는 여자 아이가 놀랍다는 듯이 거들었다.
-저기? 저기 산다꼬?-
그리곤 염소의 흉터로 이야기는 진행됐다. 이 부분에선 내가 잔인한 구석을 찾아볼래야 찾을 수 없었단 말을 취소해야 한다. 나는 재수없는 부류와도 꽤 잘 어울리는 녀석이었다.
염소의 어깨부터 팔꿈치 위까지엔 화상 자국이 있었고 여름이 되면 그녀는 센스있게도 한쪽 소매를 살짝 내려 오프숄더처럼 연출한 후, 끄집어 내린 소매를 스포츠용 팔목 밴드로 고정해서 입었다. 실용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이었지만 여자애들은 모두 다 그걸 못 마땅하게 생각했다. 어깨 좀 올려 입어, 이것 좀 내리지 마, 그렇게 어깨를 까고 싶니?
나 또한 그녀에게 한 번 그렇게 심술을 부린 일이 있다.
미안해.
쪼끄만 계집애와 염소와 나는 셋이 주로 어울리다가 어느 날 갑작스레 쪼끄만 계집애가 우리를 버리고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염소와 나는 곧바로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염소네 집에 들러 어머니께 허락을 구하고 우리 집으로 달려가 숙제를 함께 했다. 염소네 어머니는 염소가 우리를 데려갈 때마다 백 원씩 주셨는데 그 백 원으로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며 집까지 걸었다. 다 먹은 막대를 남의 집 담벼락 위에 올려놓을 쯔음 집에 도착한다.
둘이서 숙제랍시고 팔이 아프도록 전과를 베껴 쓰고 함께 저녁을 먹었다. 밥솥에 밥이 있으면 간장 비빔밥이고, 없으면 라면이다. 그 날 따라 밥솥에 밥이 가득했다. 양푼에 밥을 덜어 간장과 참기름을 넣고 석석 비볐다. 숟가락을 쥐고 양푼째 밥을 퍼먹었다. 밥을 먹는 내내 염소는 이게 가장 좋아하는 밥이라고 말해 주었다. 싹싹 긁어먹고도 허기져 한 차례 밥을 더 비볐다. 두 번째 비빈 간장밥도 염소는 아주 맛있게 먹었다. 친절하게도 맛있다는 말을 잊지 않고 해줬다. 둘 다 배가 많이 고팠는지 세 번째 그릇을 비볐다. 말끔히 비우고 후식으로 아오리 사과까지 먹었다. 염소의 공책을 챙겨서 해지기 전에 큰길 앞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왔다. 그 사이 집에 온 엄마가 밥통을 열어보며 놀라고 계셨다.
다음 날 학교에 도착해 실내화를 갈아 신고 화장실에 다녀오니 몇몇 여자애들이 신발장 앞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봐라, 이거 염소 거랑 똑같다, 이거 시장에서 파는 기다-
가까이서 보니 그 쪼끄만 년 손에 내 운동화가 들려 있었다. 그 말에 여자애들이 하나같이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는 듯 웅성거렸다. 어떤 말은 웃자고 한 말인데 나중에 되새기면 슬퍼지고, 어떤 말은 하나도 우습지 않은데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시간이 지나면 그렇게 된다. 나쁘지 않다.
나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듯 여자애들을 지나 내 자리로 돌아왔다. 짝꿍이 나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며 말했다.
-니는 바보가?-
내 짝꿍은 슈퍼나 문구점에서 가끔 물건을 훔치는 녀석이었으나, 그럼에도 가끔은 멋진 놈이었다. 녀석이 던진 말에 한 박자 늦게 발동이 걸렸다. 아까 그냥 그 쪼끄만 계집애 멱살을 잡고 흔들걸, '야 이 개 같은 년아' 하고 욕이라도 질러볼걸
그 날 나는 결국 집에 갈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그저 궁금했다. 그 애가 갑자기 왜 그러는 걸까.
그래도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염소가 오늘도 우리 집에 숙제하러 오겠다는데 거짓말을 했다. 동네에 다른 친구가 오기로 했다고 둘러댄 거 같다. 집으로 오자마자 운동화를 벗어 찬찬히 살펴봤다. 꽤 낡긴 했다. 하루아침에 운동화가 갑자기 낡아서 못 신게 된 것이다. 집에 돌아온 엄마에게 운동화를 새로 사달라고 졸랐다. 신발장 앞에 앉아 운동화를 검사하더니 며칠 뒤에 엄마가 새 운동화를 사다 줬다. 하루아침에 낡은 신이 된 그 운동화와 똑같은 녀석이 버젓이 현관 앞에 놓여 있었다.
다음 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우리 집에 놀러 오겠다는 염소에게 적당한 핑계를 대고 못 오게 했다. 서운한 기색이 역력하더니 그럼 자기 집에서 조금만 놀고 가라며 졸랐다. 못 이기는 척 염소네 집으로 갔다. 염소네 집에서 만화영화를 보고 있으니 염소네 어머니가 밥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오셨다. 따끈한 간장 비빔밥 위에 참깨를 뿌린 계란 후라이가 놓여 있었다. 밥 한 그릇을 다 먹고 집에 가려는데 염소네 어머니가 염소에게 이백 원을 주셨다. 염소는 내 손을 잡고 슈퍼로 달려가 아이스크림 두 개를 사, 그중 하나를 건넸다. 샛길까지 나를 데려다주고 염소가 잘 가라며 손을 흔들었다. 빈 아이스크림 막대를 손에 들고 집까지 와서 쪼그리고 앉아 운동화를 벗었다. 아직 개시도 안 한 새 운동화가 놓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지나치게 하얀 이 새 운동화를 보고 주져 앉은 그 자리에서 해가 다 져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