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나, 걔 회식 때 부장님한테 사원들 다 있는데서 더 일하고 싶다고, 자기 계속 일할수 있게 해달라고 울었데-
두 사람이 남았다. 더 간절한 사람과 더 교활한 사람. 이왕 늦는 거 들키지 않게 점심시간에 출근하는 사람이 남는다. 지각 기록을 남기지 않기 위해 1층 안내 데스크에서 임시 출입증을 빌려오는 사람이 남는다. 2-3분 늦어 지각자 명단에 이름이 남는 사람이 나간다.
우는 아이에겐 떡 하나 더 준다. 수상적은 냄새만 안 풍기면 그만이다. 회사란 그렇다.
가장 교활한 사람과 가장 간절한 사람이 남는다. 평균이 남았다. 양 극이 만나 조화를 이루어 절대적인 평균의 법칙이 이루어졌다. 그렇게 평균에 들지 못하는 나는 내쳐졌다. 나는 화물칸 엘리베이터 앞에서 먼저 출근한 동료에게 문을 열어달라 구걸하지 않았고 자존심을 지키느라 부장님 앞에서 울지도 않았다. 그들의 기준에서 나는 평균에 미치지 못했다. 간절하지도 교활하지도 못했다. 이런 걸 '나가리'라고 부르면 된다. 한 동안은 혼자 오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매일 생각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더욱 교활하게 굴었어야 하는 시점과 더욱 비굴해져야 했던 시점을 오갔다. 고통을 깨달음으로 승화라도 시킬냥 나는 스스로에게 가학적인 기억의 고통을 되뇌었다. 그렇게 몇 달간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선한 사람을 만나기로 한다. 갓난아이가 있는 친구를 만난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기 시작한 아이가 있는 친구를 만난다. 정화된 사람들과만 교류한다. 한 겨울에도 미친 듯이 땀을 쏟아내며 오물을 씻어낸다. 부정하던 나에게 내려진 유죄판결에 화가 나기 시작했다. 내부고발하지 않은 나를 질책한다. 부장들에게 살갑지 않은 나를 질책한다. 회식에서 아부하지 않은 나를 질책한다. 교활하지 않은 나를 질책한다.
한동안 나를 괴롭혔다. 부정하고 증오하고 그리고 에너지가 다해 체념하기 시작했다.
이제 떠날 때가 된 것이다. 나는 아무 잘못도 없었다. 그렇다고 더 교활한 사람과 더 간절한 사람을 탓할 일도 아니었다.
나는 그 어떤 선택을 하는 것도 두려운 사람이 되었다. 비행기 티켓 결제를 앞두고 아직도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면접 후, 약속한 2주가 지나간다. 설마 하던 그 마지막 날 저녁, 전화가 울렸다. 받을까 말까, 망설이고 있다. 면접 본 회사가 싫은 게 아니다. 좋다. 그런데 지금 전화를 받으면 나는 떠나지 못하게 될 것 같다.
예정된 계획대로 떠날 채비를 한다. 마음은 한없이 불안하다. 나는 그저 순간의 판단 착오로 기회를 놓친 것인가,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덜컹하는 기분이 든다. 나는 아직 정화가 더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평균에 들지 못해 올바른 사고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다.
나는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내가 괜찮은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 떠나지 않으면 떠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비행기에 올랐다. 한참 공항에 앉아 나의 선택에 대해 집착하고 되뇌며 후회하고 두려워하길 반복하다가 탑승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나는 오늘 아침부터 자학의 기억 반복에 시달리느라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물을 마신 지 10시간이 지났다. 이 혼란 속에서도 밥 생각을 하는 나에게 실소가 터졌다. 푸시 백, 이젠 내려놓아야 한다. 고민하기에도 이미 늦었다. 되돌리려는 노력도 이미 늦었다. 그냥 잊기로 맘먹는다. 맘 같지 않아 억지로 잠을 청하며 내내 나를 괴롭혔다.
나는 수많은 생각과 선택을 되뇌었다. 선택지는 조각조각 찢어진 답안지 같은 형태가 되어 허공에서 휘몰아쳤다. 나는 어떤 조각을 집어야 할지 몰라 손을 허우적거리기를 반복한다. 기억의 학살로 만신창이가 되어 뜬눈을 숨기고 잠이든 여자인척 한다.
옆자리에 앉은 친절한 아줌마가 챙겨둔 물 한 병을 권했다. 곤히 자길래 음료수 서비스할 때 챙겨둔 거라며. 고마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요란한 착륙과 함께 배고픔이 땅에 내렸다. 더운 공기를 뱃속까지 후아 하고 들이쉰다. 텅 빈 위장까지 더위가 차는 게 느껴진다. 배가 고프다. 한 번 더 크게 더운 날숨을 들이키자 습하고 더운 기운이 몸을 따라 흘렀다. 얼어있던 몸속의 감각이 녹아 움직이는 기분이다.
한밤중에 또 혼자가 되어 덩그러니 서있으려니 잠깐이지만 까맣게 잊어 해방된 줄만 알았던 두려움이 다시 나와 함께 걸었다. 끝맺음 짓지 못하고 과거의 기억 속으로 불필요한 회귀를 반복하며 곡기 마저 끊고 나의 행복을 거부한 녀석이 나란히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