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at my memory

Eat, My Memory

#no. 8-2 껍질째 삶은 찰 옥수수-훼이싸이 행 버스

by 오M삼min

-잠은 좀 잤어?-

가브리엘이 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다정다감한 그였는데 난 왜 그리 누렇게 뜬 늙은 호박 마냥 픽픽 댄걸까?

그냥 그 버스가 그랬다.


좀 더 보송보송한 기분으로 깨끗하게 씻고 샴푸냄새도 풍기고, 아니 최소한 변기통에 발만 안 빠트렸으면, 나도 커스터드 크림같이 굴었을 것이다.

내 옆 자리에 라오스 청년은 왜인지 그 더운 버스 안에서 긴 팔을 입고 땀을 흘리고 있었다. 긴 팔 트레이닝복 져지는 젖어서, 이리 비틀 저리 비틀 커브길을 돌 때마다 내 팔뚝에 쩍하니 달라붙었다. 반대편 커브를 돌 때마다 그는 멀어져 갔으나 그의 옷소매는 여전히 내 팔뚝에 머물렀다. 참 순하고 착한 그였으나 나는 그가 미웠다.


잠깐 눈을 붙이다 깨어 목을 좌우로 까딱 까딱 움직였다. 차마 목을 뒤로 젖혀볼 엄두는 안난다. 옆 좌석을 건너 팔 하나가 쑤욱 넘어 온다.

껍질째 삶은 찰 옥수수.

참 동글동글 선하디 선하게 생긴 아저씨가 나에게 내밀었다. 무언가 먹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나 나도 그처럼 환하게 미소지으며 받아들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터미널에서 사둔 귤을 내밀자 그는 장난끼 넘치는 동그란 눈을 더 크게 뜨고 감탄했다는 표정으로 귤을 받았다. 저런 얼굴을 본 게 얼마만일까? 아무럼 망설임 없이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누고 또 의심 없이 타인이 건네는 것을 받는다. 거절하여 손이 부끄러울까, 혹시나 사람이 떠난 자리에 덩그러니 버려질까, 애초부터 그런 망설임은 겪어본 적도 없는 사람의 순수함이었다. '괜히 줬다가 욕 먹는 거 아닐까' 어느 순간부터 나눔의 기쁨이 나눔의 부담으로 자리 잡았다. 아무런 생각없이 나눈 것으로 사람들은 사람을 평가하기도 한다. 칠레로 떠나는 동료에게 그녀가 좋아하는 와인을 선물했다가 그게 공교롭게도 칠레산이라는 이유로 뒷담화의 주역이 된 일이 어렴풋이 떠올라 피식 웃었다. 그가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음이 기뻤다. 그의 세계에 함께할 수 있음이 기뻐서 끈끈한 팔과 옆 자리 청년의 축축한 상의에 집중되어 있던 온 신경이 잠시나마 해방될 수 있었다.


껍질을 열고, 몇 가닥의 수염을 거둬내고 옥수수 알갱이를 아랫니로 뜯었다. 사카린과 소금의 달콤 짭짜름한 맛이 맴돈다. 내가 좋아하는 맛이다.

먹을 생각이 없었는데 게눈 감추듯 싸악 긁어 먹고 손가락을 핥고 있다. 옥수수가 맛있기도 했고 손을 씻을 수 없으니 어쩔 수 없기도 했다.



구불구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산 길을 몇 시간 더 달려 새벽 4시 반, 매표소 직원이 알려준 시간보다 3시간 일찍 훼이싸이 터미널에 도착했다. 터미널의 버스 출발 시간표엔 치앙마이는 커녕 태국으로 가는 버스편은 아무것도 없었다. 터미널에서 내려 바로 태국행 버스표를 사고, 근처에서 아침을 해결 한 뒤 버스를 갈아타면 되리라는 어제의 생각은 비둘기 똥이 되어 나를 비웃었다.

-툭툭?-

툭툭이 다가온다.

-웨얼 아 유 고잉?-

치앙마이로 갈 생각이라고 하니, 훼이싸이 시티로 들어가 시내에서 태국행 버스를 타라고 한다. 시티까지 10만낍.


말도 안되는 금액이다. 10만낍을 줘 버리면 치앙마이행 버스 표 값이 모자랄지도 모른다.

-가끔은 그들을 믿어선 안될 때도 있어-

터미널 의자에 세상 편하게 긴다리를 쭈욱 뻗고 누운 가브리엘이 말했다. 도착하자마자 그는 지금 시내로 나가봤자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자리를 만들고 누웠다.

시내로 가는 툭툭이 10만낍이나 하다니, 12시간 가까이 달려온 차비와 맞먹는 금액이다. 이런 말도 안되는 가격을 제시하다니 시내에 또 다른 터미널이란 게 존재하는지도 의문스러울 정도로 10만낍의 툭툭기사는 못 미더웠다. 그냥 국경을 넘어 태국 치앙콩에서 버스 터미널을 찾는 게 낫지 않나 싶다. 라오스 국경까지 가는 건 얼마냐고 묻자 역시나 10만낍이라고 한다.


팍 씨.


그 이후로 일절 10만낍의 툭툭 기사와 시선도 맞추지 않고 대꾸도 해주지 않았다. 아쉬움을 가득 안은 그는 라오스 모자만 달랑 툭툭에 태운 채 터미널을 떠났다.


터미널에 우두커니 앉아 한 시간 쯤 보냈을까? 꽤 많은 사람들이 툭툭이나 자동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났다. 그리고 언제 나타났는지는 모르겠으나 테이블을 열심히 닦는 직원인 듯한 남자가 눈에 띄여 그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혹시 여기서 태국행 버스 티켓을 살 수 있는지'

'아니면 태국행 버스를 탈 수 있는 또 다른 터미널이 있는지'

'있다면 어디인지'

-익스큐...-

남자는 내가 생각한 질문 중 그 첫 번째를 꺼내기도 전에 내말을 딱 잘라서 손을 젓고 고개를 흔들었다.

-영어 못해요?-

또 남자는 나를 거들떠도 안보고 고개를 저었다. 왜 이렇게까지 무례하게 행동하는 거지? 눈을 맞추기도 싫은건가?어째서 No라는 단어도 모르는 거지?


옥수수의 힘이 끝났다. 선한 사람이 준 좋은 기운이 수명을 다했다. 먹는 물로 쓸데 없이 깔끔 떠는 것 같아 싫어하는 짓이지만 생수를 손에 덜어 얼굴과 팔, 목을 씻었다. 그렇게라도 일말의 찝찝함을 덜어내고 싶었다. 가방속에 구겨넣은 바싹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자리에 앉아 나도 뜨는 해를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무례한 남자가 내가 앉은 테이블로 오더니 제 할일을 계속했다. 그는 익숙하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빨간 메니큐어를 칠한 길게 기른 엄지 손톱으로 테이블에 눌어붙은 새똥을 긁어내기 시작했다. 나는 이 광경이 굉장히 역했다. 새똥을 꼭 내 앞에서 보란듯이, 그것도 하필이면 손톱으로 긁어야만 하는 걸까? 왜 저 엄지 손톱에만 메니큐어를 발랐을까? 새똥 긁기용이란 나름대로의 표식일까?

남자는 모든 테이블의 새똥을 엄지 손톱으로 긁었다. 그가 성실한 사람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남은 생수를 가지고 아무도 없는 구석에 숨어 다시 한 번 괜히 내 손을 씻었다.

-유 고 투 보더?-

치토스 오렌지색 티셔츠를 입은 또 다른 툭툭 기사가 말을 걸었다. 치앙마이로 가겠다는 말은 집어넣고 태국으로 간다고만 답했다. 툭툭을 타고 라오스 국경까지 간 뒤, 국경을 건너 태국으로 가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투 퍼슨, 라오 보더, 포티싸우젼-

가브리엘이 내 일행인 줄 안 모양이다. 혼자가면 얼마냐고 묻자 5만 낍이란다. 여전히 맘에 드는 금액은 아니지만, 나는 새똥 긁는 사내와 이 작은 터미널을 지금 당장 떠나고 싶었다. 사내는 남은 테이블의 새똥을 모조리 그 빨간 엄지손톱으로 하나하나 다 긁어내고 이제는 제일 큰 테이블에 옆으로 누워 새끼 손가락으로 귀를 파고 있다.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매자 툭툭 기사가 가브리엘을 가리켰다.

-유 고 얼론? 피프티싸우젼-

나는 혼자 갈 것이고 5만낍을 주겠다고 하자 툭툭 기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의 툭툭으로 안내했다. 가브리엘에게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그가 자는지 자는 척을 하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어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냉정하게 그 터미널을 떠났다.


선불을 제시하는 툭툭 기사에게 5만낍을 건내자, 드디어 라오스 국경을 향해 출발했다.

어느 새 동이 터 주위가 꽤 밝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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