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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M삼min Mar 31. 2024

9만 원씨, 달동네 단독주택을 가계약하다.

또 다시 전세 지옥, 보증보험 가입까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겠지.

거주 중인 오피스텔이 나가고 부동산이 챙겨주어 계약금을 받으니, 불안한 마음이 오히려 조금 잠잠해졌다. 이제 나만 집을 구하면 되는구나, 새로운 임차인의 이사일은 5월 16일, 그날 이른 아침에 짐을 다 빼라는 부동산의 명령이 여간 따갑다. 드디어 이 층간소음 지옥에서 벗어난다. 사서 걱정하는 내가 하필이면 전세 관련 사건 사고로 주목을 받은 강서구에 살게 되면서, 전세금을 돌려주지 않을 경우 임대인을 협박할 용도로 실제 주인이나 마찬가지인 임대인 어머니의 신상을 조사해 두었다.

 (원래 비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비서를 무시하지 마라)

임대인의 어머니는 교육자이기에, 부동산 투기 스캔들이 폭로될 경우 잃을 게 많은 사람이다. 그래서 이 집에서 4년 간 조금은 걱정을 덜하며 지냈다. 전세사기로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 자살했다고 들었을 때 나는 함께 분노했으나 또 내 걱정이 앞서, 참 몹쓸 이기심에 임대인의 신상을 캐내기까지 했다. 구글, 네이버, 인스타그램, 별 수고를 들이지도 않고 신상을 찾아냈다. 나를 만나게 될 임대인들이 끔찍하겠지만, 나는 앞으로도 전세살이를 하며 이 과정을 거칠 것 같다.


금요일 하루 연차를 써서 집을 보러 나섰다.

지금까지 본 집은 맘에 들지 않거나 (서촌), 입주 시기가 안 맞거나 (또 서촌), 대출과 보증보험이 가능하지만 임대인이 매매를 원하는 집인 데다가, 부동산공시지가가 낮은 다세대 구옥 빌라였다. (구기동)

공시지가가 높고 새 건물이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니다.

공시지가가 높고 낡은 건물인 경우 대출이 안 나올 수 있다. (불편함은 덤이다)

공시지가가 높고 대출과 보증보험이 가능하다고 광고한 서대문구의 오래된 주택 2층은 세입자가 돈을 받지 못하고 퇴실하며 임차권등기가 걸렸다. (새로운 새입자를 구해도 임차권등기 이력 때문에 대출이 안 나올 수도 있다고 한다.)

시간을 내서 볼 집도 없다. 사진을 보고 아, 이 집 괜찮다 생각해 봤자 막상 보러 가면 부동산에선 딱히 사전조사도 하지 않고 나온다.

 '되겠죠, 이 집도 중기청 대출받아 살고 있는데'

 '아휴, 되죠'

평창동 반전세 1억에 60의 빌라는 버팀목 대출과 보증보험 가입이 가능하다는 말에 집을 보러 갔고 마음에 쏙 들었으나, 집에서 혼자 700원을 주고 등기부등본을 떼봤더니 근저장이 줄줄이다. 매매 시세의 반이 근저당이고, 아마도 내 돈으로 근저당을 말소하는 조건을 걸어 계약을 진행하도록 유도할 것이다.

1억에 월세 60, 1억이 적은 돈도 아닌데, 상환능력이 의심 가는 임대인에 묶어둘 수는 없었다. 전세가 불안해 월세와 반전세를 찾은 것인데, 이렇게 서울 전역을 돌아다녀보니 1억이나 2억이나 모든 집이 위험하기는 매 한 가지이다.

단독주택, 그래 시발 안 주면 내가 사서 등기친다는 맘으로 단독주택을 찾아보자.


평지에 위치한 역세권 주택의 전세는 5억-6억

평지에 위치하고 역세권인 2층 독채 전세는 과반수가 위반건물로 대출이 어렵다.

평지에 위치하고 조금 걷지만 저렴한 다세대 주택은 기존 세입자들에게 우선순위가 밀린다.

평지에 위치하고 조금 걷지만 보증금이 5천만 원 최우선 변제금 미만인 다세대 주택은 월세가 비싸다. (마포구)

 씨발, 서울에서 혼자 자취하기 더럽게 좆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나는 언제 돈을 모으고 언제 집을 장만하며, 안전하게 저축하면서 살 수 있는 집은 어디 있단 말인가?

정말 서러워서 눈물이 핑 돈다.

확 회사도 때려치고 본가로 내려갈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아직도 엄마 뒤에 숨고 싶은 내가 한없이 초라하다.

며칠 회사에서 틈틈이 부동산 어플을 들여다보다가, 나보다 연식이 오래되었으나, 임대인이 제대로 리모델링을 마치고 세입자가 아이들과 함께 거주했던 단독주택을 찾았다.

 낡고 수려하지 않지만, 대출과 보증보험만 문제가 없다면 살아도 좋을 것 같은 집이다. 작은 방이 3개 거실 겸 부엌에 난 창으로 마당을 볼 수 있는 채광창과 창문이 곳곳에 위치했으며, 박공천정이 매력인 집이었다. 당장 부동산에 메시지를 보냈고, 한두 시간이 지나 전화가 왔다.

중개인은 거듭 안전한 집임을 강조했고, 금요일 연차를 내고 집을 보러 가기로 약속을 잡았다.


 전 날까지 그 집이 나갈까 봐 애간장을 태웠다.

회사는 여의도, 현재 거주 구역은 강서구, 한 시간 반 걸려 부동산에 도착했다. 전화 통화를 한 여자 중개인이 남자 중개인과 집을 보러 가라고 하는 바람에 낯선 사람과 길을 걸었다. 비 오는 날임에도 하루 종일 걸을 생각에 우산 없이 부동산에 도착한터라 우산을 빌려 언덕을 올라갔다. 남자 중개인은 성북동에 거주하는지 이 정도 거리는 껌이라는 듯 가뿐하게 움직였다. 평지 역세권 10분 거리에서 4년을 거주한 나는 헉헉 가쁜 숨을 내쉬며 좀 천천히 가자고 애원했다. 중개인은 '제가 걸음이 좀 빠릅니다' 하고 멋쩍게 웃었다. 언덕의 언덕을 르고 좁은 골목길에 다다르자, 여기 쓱배송이 오는지 걱정이 되었다. 시멘트 계단을 허걱대며 오르자 좁고 낡은 시멘트 길이 나왔다. 고맙게도 짧은 시멘트 길 오른편에 몇 개의 계단과 검은 대문이 보였다. 중개인은 우편함에서 대문 열쇠로 문을 따고 집을 공개했다.


 비 오는 오전 11시 40분,

시멘트를 바른 낡고 작은 마당과 벽, 전에 살던 세입자가 두고 간 벽걸이 신발장이 꽤 쓸모 있어 보였다. 쓰임이 남은 물건을 굳이 버릴 필요는 없다.

 계단 위에 신발을 벗어두고 현관문 안으로 들어선다. 현관문 앞에 계단 두어 개와 부엌 겸 거실이 마주한다. 인덕션과 드럼 세탁기는 옵션이고 오른편에 옷방으로 용도를 짐작할 수 있는 빛이 들어오지 않는 작은 방과, 꼬리를 달랑거리는 에어컨 호스가 벽에 매달려 있다. 에어컨 구멍은 야무지게 잘 막아 두었다. 계단 밑으로 난 좁은 통로를 지나며 밖이 보이는 작은 창 두 개를 지나자 또 작은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좁은 통로 탓에 문은 미닫이 문이지만 방 안에도 채광을 신경 쓴 유리창과 창문이, 흐린 날 낮은 채도와 명도의 빛을 끌어온다.

 계단 위 부엌 겸 거실 옆의 안방은 박공천정으로 아늑함을 살렸고, 방문을 기준으로 앞과 옆에 작은 창을 뚫어 환기에 신경 쓴 방이다. 창문을 하나씩 열어 방충망과 잠금장치를 시험해 봤고, 마당을 넘어 위치한 앞집의 아름다운 정원을 훔쳐보았다. 오래된 구옥이니 화장실에서 살짝 하수구 냄새가 올라왔지만, 비어둔 집인 것을 감안하면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싱크대에서 물을 틀어보니 중개인이 끼어들어 한 마디 거들었다.

 "성북동이 지대가 다들 높다 보니 펌프는 강한 걸 써서  물은 잘 나옵니다"


 여름이 더울 것 같은 집이지만, 이 집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은 사실 어제 저녁 네이버 지도를 탐닉하며 찾아낸 주소로 떼 본 등기부등본이 깨끗했기 때문이다. 집주인은 부부로 추정되는 두 사람이었고, 2020년도에 집을 매매해 수리한 것으로  추정된다. 세입자가 나가면서 임대인은 대출로 보증금을 돌려주었고, 기름보일러였던 낡은 보일러도 가스보일러로 수리를 막 마쳤다 중개인의 말도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임대차계약 특약-근저당 설정을 하지 않는다-과 보증보험으로 어느 정도 안전장치를 해 두고 2년 살기에 괜찮을 것 같았다. 최소한 세입자에게 돈을 돌려주는 당연한 처사를 이행하는 사람이니, 악덕 임대인은 아니겠지 하는 마음이 컸다. 전 세입자가 이이들을 데리고 살았다면, 나 혼자 못 살 이유도 전혀 없어 보인다.

 현관을 나와 마당에 서서 전경을 바라보았다. 집을 구하며 감상에 젖는 여유 따윈 위험한 일이지만, 여기서 눈이 오는 겨울을 맞이하면 좋을 것 같다. 눈을 쓸고 제설제를 뿌리는 수고야 주택에 살면 당연한 것이고, 그 수고를 얻음으로써 온전히 내 천장을 그 누구와 공유하지 않는 잠을 얻는다면, 그만한 값어치의 노력은 충분한 대가인 것 같다.

(관리소장님과 겨울에 종종 눈을 쓸어본 경력이 있음)


"이삿짐 여기까지 옮겨 주나요?"

"아휴, 그럼요. 다 해주죠. 성북동은 다 지대가 높아요. 그리고 여기 사시던 분도 잘 이사 가셨는데요"


 언덕길을 내려가며 중개인은 곧 한 사람이 또 이 집을 보러 온다고 말했다. 낚인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마당에 서서 이 집을 놓치면 꽤 아쉬울 것 같다는 맘이 들었기에 덜컥 계약하겠다고 말했다.


현재 시설물 상태로 임차. 근저당권이 없으며, 버팀목 대출과 보증보험 가입에 협조하며 계약 시 국세 및 지방세 완납 증명서를 제출하는 것에 임대인이 동의했다는 문자 메시지를 받았고, 가계약금 백만 원을 입금했다.



 하지만, 나란 인간이 얼마나 이상한 인간 이던가?

하루가 지나자 이거 덜컥 미친 짓을 해버린 것은 아닌가, 오밤중에 여자 혼자 그 좁은 계단과 시멘트 골목을 어찌 누비나, 변태가 길에서 덜컥 제 물건을 내놓고 이상한 짓이라도 할만한 그런 어두운 골목이면 어쩌나,

망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에 나는 운동화를 신고 토요일 밤 홀로 그 집으로 향했다.

9호선, 여의도에서 5호선, 동대문역사공원에서 4호선을 갈아타는 내내 조바심이 나 빨리 도착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발을 동동 굴렀다. 지하철에서 휴대전화로 이어폰도 연결하지 않은 채 전래동화를 듣는 얼굴이 벌게진 아저씨 옆에 앉았다가 자리를 옮겼다. 이런 사람이 득시글거리는 동네라면 사양인데, 과연 내가 잘한 일인가? 나란 사람은 그 많은 난관을 혼자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인가?

 역에서 내려 혹시나 부동산에서 시간에 동네를 방문한 나를 이상하게 볼까 봐, 굳이 길을 건너 이동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토요일 저녁 8시의 거리를 훑었다. 드디어 만난 오르막길,  오르막 길에 이르자 거리가 무척 조용하다. 빌라 안에 불빛을 보니 사람들이 조용한 저녁을 맞이한 시간인 같다. 단독주택을 지날 사람의 흔적은 느낄 없으나 가로등 불빛이 밝았다. 숨이 깔딱깔딱 넘어가는 찰나, 문제의 계단길이 나왔다. 여기도 가로등 불빛이 밝다. 어두울 없는 가로등 불빛에 계단을 오른다. 100개는 되는 알았던 계단이 10개 그리고 15개, 쓱배송은 갖다 주겠다.

 시멘트 골목 입구에 서니 그 집 바로 옆에서  마당을 밝히는 가로등에 나는 다시 안도했다. 대문을 스을쩍 밀어보니 잠기지 않았기에 정말 이상하게도 남의 집 마당에 앉아 잠시 야경을 내려다 보았다.


 고양이가 싸운다. 츄르 협약을 맺어 쥐를 쫒을 수도 있겠다.

조용하고 마당이 있는 삶, 아 맞다! 나는 이것으로 이 집에 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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