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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M삼min Apr 09. 2024

9만 원씨, 난공불락의 요새

물자를 담당할 기사단을 모집하는 바이다!

 "성북동은 다 이래요!"
중개인이 한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살아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르막 길을 오르고 골목, 계단 그리고 또 골목을 오가는 이사는 난공불락의 산중 요새에 각종 물자는 옮기는 것이었다.

 계약서를 작성했으니 이사 업체를 선정해야 한다. 이삿날이 손 없는 날이라 업체를 빨리 선점해야 한다. 미리 찍어둔 거리 사진을 전송하니 지레 겁을 먹은 업체들이 견적마저 포기한 것 같다. 실제론 2분 거리란 말을 했어야 했나? 견적서를 받기 위해 나의 모든 것을 공개한다. 침대, 책상, 너덜거리는 옷이 성황당처럼 걸려있는 헹거와 서랍장. 사진을 찍어 업체에 보낼 견적 요청서에 전시한다.

 견적서 작성을 위해 투룸 이상을 클릭했는데, 이걸 투룸이라고 보긴 어렵지 않나 싶다. 한 평짜리 옷방은 가지고 나갈 게 옷 밖에 없다. 참, 투룸이랍시고 쪼개논 꼬라지가 가관이다. 10평이 채 안 되는 공간을 쪼개고 또 쪼갠다. 유리 가벽을 세워 1.5룸이라고 하며 보증금을 더 받는다. 한 평짜리 공간에 옷장 하나 붙박이로 짜놓고 투룸이랍시고 또 받는다. 사방이 정신병에 걸릴 것 같은 획일화된 허연 공간이 구역질 난다. 사람이 사는 공간을 공장에서 찍어낸 기성품처럼 만들어 놓고 ‘깔끔한 화이트 인테리어’라고 광고한다. 인테리어라는 단어의 뜻도 시대가 가면서 바뀐 모양이다.


 여름잠을 설치게 만든 모기가 앉은 새하얀 벽을 탁 치자 온 벽이 퉁 하고 울렸었다. 주먹으로 세게 치면 구멍이 뚫릴 것 같은 벽이다. 이 텅 빈 벽을 위층의 청소기 헤드가 따닥따닥 부딪힐 때마다 아래층인 내 벽이 투웅투웅 하고 한숨을 쉬었다. 작은 땅 덩어리 위에 오늘도 지어지는 무수히 많은 닭장 같은 집에는 나처럼 전 재산을 임대인에게 보내고 덜덜 떠는 사람들이 잠을 청하고 있을 것이다. 도통 꺼질 생각을 않는 생각의 스위치를 어쩌지 못한 채 잠을 청하는 밤은 염치없게도 길다. 그리고 내 이웃은 염치없게도 스멀스멀 내 공간에 함께 들어와 제 생활방식을 강요한다.

 그녀의 아래층으로 보낸 시간은 4년, 우리는 한 집에 살면서 서로 말은 하지 않은 오래된 동거인 같다. 서로에게 관심은 없지만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던 딱 그 정도의 뒤틀린 관계의 이 동반자에게서 드디어 해방되는 것이다!

 추레한 날 것의 나를 전시한 견적 요청서에 답장이 왔다. 지난주에는 가능하다고 했다가 달아난 타 업체보다 저렴하다. 냉큼 계약금을 보낸다. 베테랑을 이렇게 부려먹고 고생시킬 생각을 하니 어째 또 마음이 불편하다.

 한 사장, 그대를 이 난공불락 요새에 물자를 담당할 나의 친애하는 기사로 임명하노라,
(사장님, 제발 달아나지 마세요!! 무거운 건 제가 다 나를게요!!)

 나는 그대를 내 식탁에 앉혀 배를 곯지 않게 하고,
(사장님, 짜장면 곱빼기로 시켜드릴게요! 제발 저랑 이사해요!)

 그대의 노고에 눈을 감고 귀를 닫지 않겠노라
(사장님, 당일 날 힘드시면 제가 좀 더 챙겨 드리겠습니다요!!)


 꽤 오래 사용한 서랍장을 버릴까? 아직은 쓸만한데, 이걸 산중 요새로 옮기는 게 나의 친애하는 기사단에게 채찍이라도 휘두르는 꼴 같아서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든다. 책상도 버릴까, 의자도 버릴까, 나를 어디까지 비워야 하나 죄다 갖다 버리는 걸 생각해 봤는데, 그냥 날 갖다 버리는 게 나을 것 같다. 가전은 하나 없는 살림살이라, 책상만 어떻게 옮기면 서랍장은 분리해서 옮기면 될 것 같다. 그래도 걸어서 2분 거리, 짐을 들고 옮기는 사람에겐 20분과 같은 거리일 것이다. 도로변이 아니라 사다리차 사용 불가, 인편으로 옮겨야 하는 악조건에 기사단이 충성맹세를 어기고 달아나면 난공불락 요새에 진입하기도 전에 산속에 갇혀버리게 되는 건 아닐지 걱정이다. 돈이면 다 된다는 대한민국도, 안 되는 게 없으란 법은 없고, 나에게는 다 되게 할 만큼의 돈은 없는 것 같다.

 뭐에 홀려도 단단히 홀렸던 건 아닌가 모르겠다. 계약을 파기했다는 전 계약자도 어쩌면 이사 업체를 찾다가 지레 겁먹고 ‘대출이 안 나오네요’라는 핑계로 달아나 버린지도 모르겠다.

 한 달 뒤에는 더 이상 이 닭장 같은 오피스텔에 눕지 않아도 된다는 데 들뜨다가도, 인편으로 무수한 짐을 옮겨야 하는 이삿날을 생각하면 또 쉬이 잠이 오지 않는다.

 쿠당쾅쾅 위층이 돌아오는 소리가 어김없이 귓바퀴를 찌른다. 새벽 3시에 진공청소기를 쓰고, 새벽 1시에 털털털 탈수를 해대는 저 미친 여자와의 동거도 끝이다. 싸다구 한대만 매섭게 때려주면 속이 시원하겠다. 그 간의 추억을 떠올리면 내가 많이 밑지는 꼴이다.


 원래 다 이런 성북동, 나의 기사단과 한 번 요새를 향해 진격해 보겠다.
 뭐 어쨌든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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