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개인들은 기본적으로 거짓말을 잘한다. 법정 상한 수수료 최대치를 받으면서 늘 남는 게 없다고 말한다.
그렇게 좋은 집에 임대인들은 살지 않고 중개인들도 살지 않는다. 둘 다 더 좋은 집에 살고 있나 보다.
달동네 단독주택이라니, 내가 그 댁 성주신에게 단단히 홀린 게 아닌가 싶다. 혹은 그 댁 성주신이 내가 단단히 마음에 든 모양이다.
4년째 거주 중인 현재의 오피스텔은 맘에 들었던 집이 아니라, 유일하게 남은 집이었다. 뭐, 언제나 내 이사는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긴 했다.
이사철마다 언제나 서둘러서 집을 구하는 편인데, 좀 괜찮다 싶으면 하루도 안 가 나가버리고, 막상 보러 가면 중개인이 날 속인 경우가 허다했다. 어디에 무슨 집을 보러 가겠다고 하면 보여주겠다고 하지만 약속 시간에 부동산에 가면 그 집은 나갔단다. 다른 거 보여 준단다. 뭐라도 봐야 하니 보여달라고 한다.
사는 동네가 싫어 이사할 생각인데, 바로 옆 모텔골목에 새로 지은 빌라를 보여주며 대출이자를 지원해 주겠다고 한다. 2년 뒤에 또 새로운 빌라로 이사하면 또 이자를 지원해 줄 테니 장기 고객이 되어 달라 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뒤통수를 한대 퍽 소리 나게 후리고 싶었다. 그는 하루 종일 모텔이 즐비한 골목에 들어선 보증보험 가입이 될지 말지 아직은 모르는 5층 짜리 신축 빌라에 나를 데리고 다녔다. 후한이 두려워 욕을 하거나 때리지는 않았다.
하루 한 시간이 아까운데, 결국 이사할 만한 집은 하나도 못 보고 중개인의 '호구야 놀자'놀이에 놀아났다. 다음 날에도 계속 전화와 메시지로 다른 물건을 보여주겠다 재촉하길래 조용히 차단했다. 어지간히 우스운 호구를 물었나 보다.
그렇게 계속된 시간 낭비로 대출 서류를 제출해야 할 만큼 시간이 촉박해져 또 맘이 급해졌다. 가만 보면 한 동네에서 오래 자리를 지켜온 부동산은 맞춤한 매물이 나오면 알려주겠다고 하곤 연락을 안 준다.
자기들 이익 챙기기만 급급한 부동산만 자꾸 원하지 않는 동네에 원하지 않는 매물을 '좋은 집'이라며 보여준다.
자기들 세치 혀로 구슬리면 넘어올 거란 그 자신만만한 태도가진절머리 난다.
오피스텔 하나를 봤다. 신축이고 대출이나 보증보험이 다 가능하다고 한다. 딱히 맘에 들었던 게 아니라, 그 두 가지 조건에 충족되는 매물이 흔치 않았다. 집주인이 누구냐고 물었다.
"그냥 아주머니예요"
집이 맘에 들면 가계약금을 걸라고 한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에게 집을 보여주지 않는단다. 언제부터 이 가계약금 제도가 생긴 걸까? 계약서를 읽어보기도 전에 이 서울에서 잠자고 씻고 밥 먹으려면 돈부터 보내야 한다.
계약서가 마음에 안 들면 가계약금은 돌려주는 걸까?
가계약금 계좌의 이름이 너무 '요즘 어린이' 이름 이길래 물었더니, 그 새 말을 바꾸었다.
"어머님이 따님 오피스텔 하나 사주신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또 중개인 말을 믿고 가계약금을 보내고 계약서 작성 일자를 잡았다. 오피스텔을 사준다니 집에 돈은 좀 있나 보네, 하고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망설이다 맞춤한 집을 놓친 적이 있어 부랴부랴 이거라도 놓칠세라 가계약금을 보냈다.
집이 맘에 들지 않아도 대출, 보증보험만 가능하면 성공적인 이사라고 생각했다. 출퇴근도 나쁘지 않았다. 탑 층이 아닌 것이 조금 걸렸지만 다른 것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그렇게 똑똑한 선택을 했다는데 자아도취되어 계약서를 작성을 하러 갔다니 분양 계약서를 보여준다. 신축이라 그렇다고 한다. 아, 그런가 보다 했다. 그제야 신탁등기를 설명한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너무도 쉽게 길에서 도너츠 하나 사 먹을 때 만 원짜리 내고 거스름 돈 거슬러 받듯이 얘기한다. 나는 좋은 집과 좋은 중개인을 고르는 눈이 없는 호구가 분명하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 오피스텔은 신축이라 전부 이렇게 진행했어요! 원래 신축은 다 이렇게 진행하는 거예요"
건물을 지은 시공사는 신탁회사의 돈으로 건물을 짓고, 신탁회사가 수분양자에게 잔금을 지급받아 신탁등기를 말소하고, 수분양자의 이름으로 등기를 이전하여 온전한 제 소유의 집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돈이 부족한 수분양자는 거주할 임차인을 구한다. 임차인의 전세금으로 신탁회사에 잔금을 치르고 신탁회사가 지정한 법무사는 그 길로 신탁등기를 말소하고 수분양자를 소유주로 올린다.
맞다. 내 돈 갖고 생판 남이 집을 산다. 이 통장에서 저 통장으로 움직이는 것은 임차인의 돈이고, 이 모든 위험을 감수하는 것도 제 이름으로 대출받아 전재산을 바리바리 싸들고 온 임차인이다.
위험한 것은 내가 현 상태 신탁회사의 소유라 볼 수 있는 건물에, 아직 중도금을 지불하지 않은 수분양자와 계약을 치른다는 점이다. 작성한 계약서는 수분양자와 내가 체결한 계약이라 신탁회사는 책임이 없다. 수분양자가 소유권 이전을 서두르지 않으면 은행 또한 대출금을 회수한다. 누구에게? 당연히 대출을 실행한 당사자인 임차인이다. 수분양자가 나쁜 맘먹으면 피해를 보는 건 오롯이 임차인이 되는 것이다.
중개인과 수분양자의 선택에 내 운명이 걸려있는 계약이다. 잘되야 본전, 틀어지면 조정위원회로 끝나지 않을 오피스텔에 코를 꿰고 만 것이다. 어쩜 이렇게 집을 보는 눈이 없는지, 이쯤 되면 나란 사람에게 로또가 터져도 이상할 게 없는데 스피또 5천 원 말고는 뭣도 없다.
이상 당일, 잔금 날.
수분양자이자 임대인이 될 어린 여자의 부모님은 은행에서 대기 중이라고 했다. 계약 대리인이 관리사무소에 와서 잔금 입금 및 신탁등기 말소와 소유권이전을 책임졌다. 중개인 또한 계약일의 본인보다 더 예민해진 내가 잔금을 잘 치를 수 있도록 도왔다. 계약서에 명시한 그대로 당일 바로 소유권 이전이 처리되었다.
잔짐을 방바닥에 내팽개쳐두고 대항력을 위해 부랴부랴 주민센터에서 주소이전 신고를 하고 돌아오니 소유권 이전 등기 접수증이 우편함에 꽂혀 있었다.
몇 달 만에 처음으로 안도한 순간이었다.
나쁜 마음을 먹은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가능했던 일인지도, 혹은 대수롭지 않은 하나의 계약체결 방식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유권 이전이 이루어지고 보증보험에 서류를 제출한 날까지 내 머릿속은 전혀 대수롭지 않았다. 이후로 나는 신축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
내 돈 가지고 내 집을 사는 게 불가한 서울살이가 만들어낸 여러 형태의 계약과 주거, 도대체 어디까지 겪어야 하나 싶다.
몇 달 밤을 꼬박 새우며 한탄을 쏟아냈던 것은, 이 모든 피 말리는 과정이 돈이면 다 해결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