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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M삼min May 24. 2024

9만 원씨, 뭐가 그리 성급했나

조금은 후회 중

 아홉 살, 어둠이 무서웠다. 잘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님이 모습을 감춘 한밤에는 귀신이 나올 것만 같았다.


 스무 살, 나를 쫓아오는 낯선 사람이 무서웠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하루를 마감한 한 가족의 가장이 어디서 어떻게 돌변할지 몰라 무서웠다.


 서른 살, 돈이 무서웠다. 일하지 않으면 눈 깜짝할 사이에 금방 사라지는 통장 잔고가 무서웠다.


 마흔, 모든 무섭다. 딱히 잃을 게 있는 것도 아닌데, 이제는 어둠도 돈도 사람도 무섭다.


 스무 살의 패기는 어디로 갔을까? 블라인드로 창을 다 가리고 두꺼비 집 같은 고층에 숨어 안도하던 내가 1층의 삶은 예전 같이 안전하지 않다고 하루아침에 징징 거린다.

 이사 후, 나흘 만에 나는 혼자가 두려워졌다. 낮은 담장도, 앞집을 마주 보는 침실의 창도. 

 창을 활짝 열어놓고 흐릿한 나무냄새를 맡고 싶은데, 나흘 만에 갑자기 겁쟁이가 되어 온 창문을 꼭꼭 걸어 잠갔다.


  새벽 두 시가 넘은 일요일, 창밖의 남자가 내 이름을 부른다.

 " ○○ 아!"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 화면을 끄고 아무도 없는 척 숨죽이고 동태를 살폈다. 분명히 그것은 내 이름이다. 애써 무시하며 비슷한 이름이려니 생각해도 이 골목엔 세 집 밖에 없다. 소리는 머리맡 옆 집으로 난 창문 밖에서 들렸다.

 내 이름이 아니라면 문이 열리고 남자가 옆집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나야 이치에 맞지 않은가?

 아무 소리도 없었다. 열 살, 어쩌면 스무 살의 내가 귀신인지 사람인지 모를 나를 부르는 것이 두려워 떤다.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해야 할 사람이 나였기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열 살의 내가 화장실도 가지 못하고, 이불속에 숨어 동이 트기만을 기다렸다. 

 창 밖의 무엇은 나를 다시 부르지도, 제 집으로 들어가지도 않았다. 다정하게 울던 고양이는 어디로 갔는지 뱃속의 소리만 요란하게 빈방을 가득 채운다. 평온하다고 느꼈던 공간이 조금씩 뒤틀려 버린 것 같았다.



 

 월요일이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빌딩숲 속의 내가 다시  서른 살이 되어  돈이 무섭다. 은행의 대출 연장 서류 독촉 전화에 곧장 현실에 뿌리를 내리다 못해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주민등록등본

가족관계증명서

확정일자부 임대차계약서

건축물대장

공제증서


 은행 돈을 융통하려면 가족들의 개인정보까지 팔아넘겨야 한다. 서류를 팩스로 보내다 지난 계약서 작성 때 신경을 곤두세우며 '근저당 설정을 하지 않는 것''임대인의 세금납세 증명서'에 중점을 두는 바람에 놓친 공인중개사의 실수를 확인했다. 지난 4월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지급한 공제증서는 22년도부터 23년까지의 증서가 들어있다. 오늘 오전까지 서류를 보내야 하는데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실수라니 짜증이 확 솟구친다.

 24년도에 22년도 서류를 첨부하는 공인중개사라니, 전혀 믿음이 가지 않는다. 그리고 그걸 미처 확인하지 못한 나에게도 화가 났다. 설마 이 한 장의 서류 때문에 전세자금대출을 토해내야 하는 건 아니겠지? 이미 잔금도 다 치르었는데.

  해당 공인중개사에게 22년도 공제증서 사진을 찍어 문자 메시지로 보냈다. 메시지를 보냈다가 확인이 늦어질 것 같아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던 중개사는 전화도 받지 않는다.

  언제나 똥 싸지르는 놈, 치우는 놈 따로 있다. 나는 주로 치우는 편이다. 돈 주고 쓰는 공인개사가 이런 기본적인 실수를 하는 바람에 또 상황을 수습하는 일은 나에게 떨어졌다. 치우는 것 또한 전세자금대출을 운용해야 하는 임차인의 온전한 몫이다.

 중개사는 제 실수에 수치심도 없는지 별것도 아닌 일에 유난이라는 듯 올해 갱신한 서류를 주겠다고 했다.

 '그래 썅, 당신 같은 공인중개사를 믿은 내 탓이지.'

 계약서 작성 날짜는 매 1년마다 갱신한다는 올해의 공제증서 기간 갱신 전이다. 계약일 이후에 갱신한 증서를 보낸다면 은행 측에서는 당연히 계약서 작성 날짜 당시의 공제증서를 요구할 것이다. 

 한 번 참았던 거, 두 번은 못 참겠는가? 최대한 침착하게 계약서 작성 날짜가 올해의 공제증서 갱신  시점이라는 사실을 중개사에게 상기시켜 준다.

 '내가 널 어까지 참아줘야 하니?'

 도대체 하는 게 뭐냐고 묻고 싶었지만 역시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고, 중개사는 나에게 단 한 차례도 사과하지 않았다. 


 오전의 실랑이로 기운이 쑤욱 빠진다. 종이 한 장의 해프닝일 뿐, 큰일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하지만 먹고살아야 하는 9시부터 6시의 9만 원씨는 할 일이 산더미고, 이미 타인의 실수를 고쳐주고 설명하고 해결해 주는데 지칠 대로 지쳤다. 오르막길을 노인처럼 오르던 며칠 전의 나처럼.

 마흔 살의 9만 원씨는 잃을 게 별 거 없어도, 매일같이 무서운 것이 늘어난다. 열 살의 나를, 스무 살의 나를 그리고 서른 살의 나를 보듬어 줄 내가 되려면, 몇 살의 나를 만나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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