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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M삼min May 27. 2024

9만 원씨의 새 보직:관리소장입니다.

퇴근 후 또 다른 일, 일, 일, 쉬지 않는 단독주택 관리인

 정리가 거의 마무리되니 이제 집 주변이 보이기 시작한다. 초인종 고장, 인터폰 고장, 왜인지 원치 않는 비데도 고장이다. 그냥 변기 뚜껑으로 쓰라고 안 버린 모양이다. 싱크대 찬장, 벽과 바닥에도 찍히고 긁힌 자국, 아이들 낙서 자국도 꽤 있다. 오래전에는 새 사람이 들어오면 집주인이 장판과 도배를 해줬는데, 요즘은 상태가 심각하지 않으면 그냥 조용히들 넘어가는 추세다. 나중에 배상하라는 시비가 붙을 수도 있으니 여기저기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어 기록해 둔다.


 해가 지니 멀리 미쳐 가려지지 않은 좁은 폭의 한양 도성길이 보인다. 이 폭이 넓어진다면 이 가격에 집을 구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름 끼치게 정확한 저울이 내 삶의 어디까지 마수를 뻗치고 있을지 궁금하다. 좁고 시끄럽고 깨끗한 오피스텔의 저울추에 꼭 맞는 넓고 조용하고 더러운 낡은 주택이라니, 그저 대한민국 부동산의 가격이 소름 끼치게 정확한 것인지도 모른다.

 달도 불빛도 밝아 여전히 별은 보이지 않는다. 훤한 가로등 밑에 쌓아놓은 쓰레기는 며칠 째 수거해 가질 않는다. 이사 후 내다 놓은 재활용 비닐도 저기 한몫을 하고 있는데, 언제 가져 가는지 수거를 안 하는 이유가 뭔지 알 수가 없다. 수거 시간대는 오후 6시-8시, 퇴근이 늦어지면 쓰레기를 내다 버릴 수도 없다. 며칠 집안에 쓰레기를 쌓아두다가 눈치를 보니 앞집과 옆집도 서로 얼굴 붉히지 않고 미리 내다 놓는다. 고민거리를 하나 덜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출근길에 플라스틱, 비닐 모두 다 잘 분류하여 내다 놓았는데 이 골목길 쓰레기만 며칠 째 그대로 있다. 옆집, 앞집에서는 개의치 않는지 배출 장소에 그냥 쌓아두고 있다. 이 동네는 수거를 잘 안 해 가냐고 물어보고 싶은데, 아직 안면도 트지 않아 묻지는 못하고 구청 홈페이지를 여러 번 뒤적거렸다. 수거 일정을 보니 이미 두어 번 다녀가고도 남는데, 차가 들어오지 않는 골목이라 수거를 잘 안 해가는 것인지, 내일 오전에 수거 업체에 전화라도 해 봐야겠다. 차가 들어가지 못하는 좁고 비탈진 골목의 몇 채 안 되는 낡은 주택은 어딘지 모르게 당연한 것들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보살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이 사각지대는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좁고 외진 골목 어귀에서 대충 훑어보고, '이 정도면 오늘 수거해 가진 않아도 되겠다' 하고 흐리게 뜬 눈으로 이 골목을 외면한 것인지도 모른다. 재활용 쓰레기 두 봉다리에 소외된 계층의 기분을 살짝 핥아본 것 같아 맘이 씁쓸하다. 혼자서 조용히 살아간다는 것은 홀로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모든 일을 온전히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별이 보이지 않는 아쉬움을 내다 놓고 달동네 추위에 짧은 마당 산책을 접는다. 5월부터 더웠던 오피스텔을 떠올려 보았다. 거실의 시스템 에어컨 바람은 한점 침실로 들어오지 않아 무용지물이던 지난여름을 떠올리며 이 쌀쌀한 바람이 언제 그랬냐는 듯 뚝 멈추어 찜통 같은 여름을 보낼 이 집에서의 나날을 상상해 본다. 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해가 한 점 들지 않는 창고방이라도, 밤이 되면 어느 하나는 눈 붙이고 잘 만큼은 더위가 가시겠지.

 이제는 식탁이 된 책상에 앉아 며칠 전 언덕 아래 편의점에서 사 온 샴페인 한 병을 땄다.
축하할 일도 없는데 저 혼자 펑하고 터지는 걸 보니, 여기에 앉아 한 잔 하는 내가 이 댁 성주신 마음에는 드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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