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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M삼min Jun 27. 2024

9만 원씨와 그의 자아

습도 습도 망할 습도

 급행열차 두 정거장, 일반열차 다섯 정거장의 출퇴근 거리 이점을 포기한 지 한 달이 지났다. 까마득한 옛날에 비축해 둔 체력을 긁어모아 쓰는  서서히 지친다. 버티고 참는 것에 체념한 9만 원씨라 다행이다.

 출근길에 이 언덕을 내려가면 반드시 적중할 것만 같은 ‘불행할’ 촉이 오는데, 여기 살면서 한 번은 다리가 부러질 것 같다. 나쁜 일의 촉은 대부분 적중한다. 하이힐을 진작에 포기했다. 9.5cm 부츠는 여기 사는 동안 신을 일이 없을 것이다.



 내려왔던 길이니, 돌아갈 때는 올라간다.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언제 도달할지 까마득한 거리는 생각하지 않는다. 대부분 혼자 걷는다. 이 동네에서 차가 없는 사람은 나 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내려갈 땐 적당했던 하루의 무게가, 올라올 땐 버겁다. 겨우 화요일이라니, 아직도 수요일이라니, 세상에 모든 짐은 혼자 다 짊어진 것 같다. 꾸역꾸역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며 '자아가 주제넘게 비대하다'는 타인의 견해를 시 한번 곱씹는다.


 -방긋방긋 웃으며 시키는 허드렛일이나 했으면 싶은데, 건방지게 저년은 모가지가 너무 뻣뻣하다. 반드시 저 대가리를 조아리게 만들고야 말겠다.-


 아무리 고민해 봐도  정도의 마음을 몇 달 며칠은 품고 있어야 저런 의사를 타인에게 표현할 수 있을 텐데, 도대체 얼마나 참고 기다렸던 것일 한편으론 참 대단한 집념이다.


 허드렛일 하는 처지에 비해 자아가 너무 비대해서 하루가 더 무거운지도 모른다. 자아를 집에 두고 회사에 가서 허드렛일만 하며 아침과 다르게 잔뜩 쪼그라들었으니, 나를 마중 나온 자아가 그 조그만 그릇에 도로 들어가는 게 얼마나 버거운 일인가?


 “와, 어항 속에 있는 것 같아”.

 지나가던 동네 꼬마 아이가 제 아버지에게 말했다.

 그래, 맞는 말이네. 아줌마도 어항 속에 있는 것 같다. 이 망할 습도가 지하철 역사에서부터 아줌마를 따라오는구나. 아니 어쩌면 회사에서부터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은 고약한 입김이 이렇게 습한지도 모르겠다. 

 무거운 몸뚱이에 들러붙은 습도가 쉬이 떨어지지 않는 여름날을 또 한해 이 언덕 위에서 나야 한다. 버티고 참는 것은 잘하니 다행이다.


 오르막 길에서는 좀처럼 속도를 낼 수 없다. 빨리 지칠 뿐이다. 천천히 한 걸음씩 조금씩 거리를 좁힌다. 두 번째 언덕길을 반쯤 오르면 산에서 찬 바람이 내려온다. 올라가며 운동에너지를 발산한 몸뚱이가 같은 바람을 좀 더 시원하게 맞이하는 건지도 모른다.

 큰 길가에 근접한 낮은 언덕에는 도로에 깔린 열선이 확연히 보이지만, 문제의 이 두 번째 언덕에선 잘 보이지 않는다. 바로 여기다. 조만간 내 다리가 부러질 것이라고 행할 촉을 보내는 곳.


 잔뜩 기울어지는 상체를 일으켜 한 번 쉰다. 오르막길에서 빳빳이 쳐든 몸뚱이는 아무 쓸모가 없다. 그저 납작 엎드리듯 구부러지는 상체에 순응하며 한 걸음씩 옮겨야 한다. 중요한 것은 무게 중심을 앞에 두는 것이다.

 골목길에 전기 자전거와 전동 킥보드가 워져 있다. 앞집의  이웃들이 모두 집에 돌아온 모양이다. 시멘트 계단을 하나씩 차분하게 디디며 나도 답한다.

 '나도 돌아왔어요. 나도 오늘 하루를 무사히 보내고 집에, 이 골목에 온전한 나로 돌아왔어요.'

 계단 끝에 마중 나온 비대한 자아가 가방이라도 대신 들어주는 것인지 이제서야 구부러진 상체를 고 고개를 다시 빳빳이 쳐든다. 집이다. 아무도 고개를 조아리라고 바득바득 굴복시키지 않는다. 타인의 입김이 힘을 잃은 듯하다.



 대문 앞에 주문한 제습기가 버티고 있다. 자아에게 이걸 좀 같이 들어달라고 하고 싶지만, 자아는 신체적 능력이 없다. 그저 먼저 마당에 들어가 할 수 있다고 나를 응원해 줄 뿐이다.

 대문을 열고 계단 위로 제습기를 들어 옮겼다. 무겁다. 이걸 여기까지 운반한 배송기사가 얼마나 욕을 했을까? 이 무거운 걸 계단 위로 나르며 몇 번째 계단에 잠깐 내려놓고 허리를 한 번이라도 을까? 열 번째, 혹은 다섯 번째와 열아홉 번째?

 넓지도 않은 마당에 제습기를 내려놓고 잠깐 허리를 폈다. 한양 도성길에 불이 켜지고 다 넘어간 해에 불그스름한 구름이 뽀송하다. 자아가 마당에 앉아 맥주 한 캔 하자고 졸랐지만, 사러 다시 내려가는 것도 내 몫이니 잠자코 제습기를 집안으로 옮긴다. 온몸에 묻은 습기를 땀방울이 이긴다. 또르르 얼굴에서 땀이 떨어지도록 버겁다. 제습기 하나가 이렇게 무거운데, 하루가 무거운 건 당연한 일이다.

 박스를 열고 제습기 손잡이를 잡고 들어 올린다. 자아가 박스라도 밑에서 잡아주면 좋겠는데, 녀석은 끌만큼의  신체적 능력도 없다.

 "고작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니가 주제도 모르고 비대하다고 하는 걸까?"

 자아에게 물었다.


 ‘근데, 내가 뭐에 비해서 비대하다는 거래? 하루 9만 원 버는 니 벌이나 직책에 비해서 비대하다는 거야?’


박스나 좀 잡아주지, 망할 년.


 냉매 가스가 들어있어 눕히지 말라는 경고문구에도 어쩔 수 없이 제습기를 눕혀서 박스에서 꺼냈다. 옷 방으로 옮기고 안내문을 꼼꼼히 읽는다. 2시간 경과 후 작동 시키는 게 안전할 것 같다. 얼굴에서 흐른 땀이 윗옷에 떨어지도록 박스와 스티로폼 해체 작업에 열중했다. 그 사이에도 창 밖을 내다보던 자아가 ‘야, 아직 파란 하늘에 구름이 핑크색이야, 근데 마당에서 맥주를 안 마셔?’ 하며 마당만 뚫어져라 보고 있다. 마당에 선탠 베드라도 하나 사달라고 하면 한 대 때려줄 참이다.


 제습기 박스에 종이 재활용 쓰레기를 담아 분리배출 장소에 내다 놓았다. 허리를 고 멀리 한양 도성길을 내다보며 자아가 그렇게도 맥주를 마시고 싶어 하는 마당에서 고개를 빳빳이 들고 온전한 나로 잠시 서 있다 들어간다.


 ‘에어컨 말고 제습기 샀네! 그래, 옷방 습하면 옷 다 버려. 잘했어!’


응, 제습기 샀어, 입김이 너무 습해서 짜증 나길래.


 자아가 제습기를 이리저리 구경하며 이 버튼 저 버튼 눌러본다. 이 망할 습도가 저 때문에 나를 따라 여기까지 들어오는 줄도 모르고.


 창밖을 바라보며 창틀의 벌레 사체가 성가시다는 듯 후후 불어 구석으로 밀어 넣더니 한쪽 얼굴을 찡그리고 귀를 후비는 자아를 바라본다. 왜인지 녀석도 조금 움츠러든 게 아닌가 싶어 옷방에 밀어둔 제습기를 자아가 자리 잡은 방구석으로 끌고 갔다.

 주어진 역할에 과한 자아를 꼭 한방 먹여야겠다는 그 심보, 빳빳한 모가지를 조아리게 만들고야 말겠다는 광기, 그 어느 하나 습하지 않은 것이 없다.

 제습기를 틀어 멀리 쫓아낸다. 남겨봤자 곰팡이가 될 망할 김서린 입김은 돌아오는 오르막길에 버리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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