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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M삼min Jun 18. 2024

갈 곳이 없다고 느낄 때면

춥지 않은 크리스마스를 보낸 집을 떠올린다

 더위가 찾아온다. 가만히 앉아서 지는 해가 내리쬐는 그 시간이 무사히 흘러가길 기다린다.

참고 기다리는 게 미덕인 양, 뙤약볕에 세워놓고 길고 긴 훈화말씀을 늘어놓는 교장 선생님을 참아내던 어린애처럼 무사히 그 시간이 흘러가길 기다린다. 그냥 흘려보낸 시간은 나이를 먹지 않는 것일까? 여전히 뙤약볕에 어린애가 되어 운동장에 서있다.

 그 아이처럼 시간이 빨리 흘러가길 기다린다.

 지는 해가 온 집안을 달구는 남서향의 더위가 싫은 것인지 이렇게 버티면서 살아가는 내가 성에 차지 않는 것인지 매해 여름을 보내면서도 잘 모른다.


 해가 지고 채광창에 야경이 드리우면 한 모금씩 서늘한 바람이 들어온다. 

 어떤 날은 작은 창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달갑지 않은 향기도 함께 온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나무가 이제 제 몫을 다하고 힘을 잃어가는 냄새인 것만 같다. 더운 집안에서 이 냄새와 함께 갇혀 갈 곳 없는 사람이 된 것만 같다.

 이제 지층의 밤이 처음처럼 두렵지는 않은 것 같아 며칠 전부터는 겁 없이 창을 열어 두었다. 더위가 두려움을 이긴 것인지, 익숙함이 불안함을 이겨낸 것인지 잘 모르겠다.

 커튼을 걷으면 밝은 달이 보인다.

 아무렇지 않게 창을 활짝 열고 잠을 청하는 이웃이 보인다.

 새벽 4시를 무사히 넘기면 마당을 훤히 비추는 가로등이 쉰다. 여전히 조용하다. 쿵쾅거리는 발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잠을 깨지도, 한밤중에도 오탐으로 건물이 떠나가라 울던 화재경보소리도 없다.

 가로등이 쉬는 시간이 와야 새가 운다.

 그리고 다시 오늘 하루 속으로 등을 떠민다.

 일찌감치 집을 나서는 아침공기 속에서도 갈 곳은 여전히 없는 기분이다.

 

 갈 곳이 없는 기분이 들 때면, 춥지 않은 크리스마스를 보낸 더운 나라의 집을 떠올린다. 여행을 다녀온 나를 두고 인디아 아줌마가 다시 여행을 떠난 텅 빈, 그 집.

 좀처럼 책장을 넘기기 힘든 책을 손에 쥘 때면 그 집을 떠올린다. 전구가 반짝이는 트리 옆에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펼 때면 인디아 아줌마의 강아지 두 마리가 내 곁으로 와서 자리를 잡았다. 늙고 뒷다리 하나가 없는 녀석이 한 숨을 푹푹 쉬며 내 오른쪽에 자리 잡으면 아직 다 지 않은 말썽꾸러기 강아지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내 왼쪽에 앉았다. 우리는 그렇게 조용히 인디아 아줌마를 기다렸다.

  지루한 이야기도 그 밤의 트리 옆에서는 읽을 수 있었다. 더디게  종이 사전을 찾아가며 책장을 넘겨도 녀석들은 다음장을 읽으라 채근하지 않았다. 커피를 가지러 주방을 기웃거릴 때마다 잔뜩 무언가 기대하는 얼굴로 나를 한 두 번 곁눈질했지만 녀석들은 이내 체념하고 그 자리에서 다시 나와 함께 시간이 흐르길 기다렸다. 녀석들은 인디아 아줌마가 돌아올 시간을 기다렸고, 나는 이 시간이 빨리 흘러 한국에 돌아갈 수 있길 기다렸다.

  시간을 무엇을 하며 보내야 할지 몰랐다. 나는 시간을 쓰는데 서툰 사람이었고 그때는 시간을 쓰기에도 너무 어렸다. 그렇게 시간이 가길 기다렸다. 갈 곳이 없어서 시간이 흐르길 기다렸던 것 같다.

 누군가를 기다렸고 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돌아가길 기다렸다. 나는 기약을 기다렸다. 갈 곳을 기다린 것이 아니었다. 남은 학기를 무사히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길 기다렸다.

춥지 않은 크리스마스를 보낸 그해의 나는 더 이상 뙤약볕을 버티는 어린이가 아니었다. 그 어린이를 한동안 잊고 지냈다. 기다렸지만 버티지 않았고 참아내지 않아도 됐다.




 그 집을 떠나고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다시 운동장에 있는 어린애가 되었다. 여전히 버티는 미덕인 양, 시간이 가길 기다린다. 넘어가지 않는 책장을 붙들기라도 하면 기약을 기다리던 그 집을 그리워한다.

 찜통 같은 더위가 찾아오면 어김없이 습도라는 것은 찾아볼 수 없던 19살의 여름을 보낸 더운 나라를 떠올린다. 수업이 끝나고 집에 오는 길, 가게에서 사 먹었던 새콤하고 달콤한 음료수의 맛이 여전히  아쉽다.

 겁 없이 활짝 열어놓은 창으로 서늘한 밤바람이 그 맛을 다시 가져다 주기라도 할 듯, 창가에서 크게 숨을 들이키며 잠시 누워 달구경을 한다.

 숨이 붙은 나무 냄새라도 날아들면 다시 춥지 않은 겨울을 보낸 그 집을 떠올린다.

 


 이웃의 창으로 환하게 불을 내가 보이건, 벌레가 어디에서 나오건, 잠시 이 집에서 내려놓고 쉰다.

 음악을 으며 걷다 우연히 발견했던, 나무가 많은 공원에서 잠시 쉰 날처럼, 갈 곳이 없다는 사실을 내려놓고 쉰다.

 꾸역꾸역 내일도 하루 속으로 등을 떠밀며 발걸음을 재촉하겠지만, 여전히 나는 뙤약볕에 서서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어린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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