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청년이 왔다.
빗소리와 함께 그들도 내게 복수하러 왔다.
오랜만에 볕 쪼이며 점심으로 기분 좋게 생태 지리 한 사발을 맛있게 먹고 사무실로 돌아가는데 임대인에게 문자가 왔다.
-안녕하세요. 도시가스 점검을 해야 한다는데 담당자에게 연락처 전달드려도 될까요?-
내가 입주하기 전 기름보일러를 가스보일러로 교체했기 때문에 정기점검 겸 설치 확인을 나오려는 모양이다. 지난주에는 수도 검침원이 다녀갔다 나를 만나지 못하는 바람에 난생처음 수도 계량기함을 열어보았다. 낡아서 표면이 뿌옇진 계량기를 한참 읽다가 결국 사진을 찍어 확대해서 확인했다. 스티로폼 박스 안에 숨겨진 계량기를 열어볼 땐 물론 조금 긴장했다. 무언가가 툭 튀어나올지도 모르는 것 아니겠는가? 찜찜함을 참지 못하고 다음 날 함을 다시 열어 살충제를 미리 뿌려 두었다. 오지마을에서 생활하는 유투버나 시골의 작은 집을 매매해서 농장으로 탈바꿈한 유투버를 보며 꽤 오랫동안 대리만족했었는데 나는 그런 위인이 못된다는 것을 이제라도 깨달았으니 됐다. 역시, 그런 삶은 아무나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토요일 오전에 검침 약속을 정해 놓으니, 금요일 밤 잠이 들 무렵부터 비가 내렸다. 지붕을 내리치는 빗소리가 화이트 노이즈가 되어 저 어디 산속 우중캠핑을 즐기는 사람처럼 기분 좋은 잠에 들려던 찰나, 뽀드득 바시락 거리는 소리에 올 것이 왔음을 직감했다.
죽여도 죽여도 늘 같은 장소에 나타나는 녀석들을 매일 아침 제거하는 일상이 이젠 좀 무뎌질 때도 되었는데 도대체 개체수가 이 집 안에 얼마나 되는 건지, 녀석들의 주 서식지가 어딘지 당최 알 수 없어 화병이 날 것만 같다. 그저 엉뚱한 곳에 살충제만 잔뜩 뿌리고 있는 건지 하루에 8마리는 욕지거리가 나온다.
위기를 감지하면 몸을 둥글게 말아 적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어릴 적 뒷동산에서 종종 만나던 쥐며느리, 일명 콩 벌레. 놈들은 어릴 때 내가 저들을 잔인하게 채집하고 학살했던 것에 복수하기 위해 나를 그들의 본거지로 끌어들인 게 틀림없다.
몸을 동그랗게 마는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했는지 너 덧살의 코흘리개는 녀석들이 보이는 데로 잡아 동그랗게 만 모습을 구경했다. 손바닥 위에 놓인 대 여섯 마리의 껍데기 색이 각기 다른 게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지지, 내려놔! 안돼!"
창문을 열고 뒷동산을 향해 경고하는 가족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바지 주머니에 소중하게 녀석들을 집어넣었다. 양손을 어색하게 바지춤에 넣고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가 마침 놀러 온 사촌언니에게 검거되었는데, 놈을 숨기려고 귓속에 굴려 넣고 말았다. 육아 난이도가 굉장히 높은 아이였음이 틀림없다.
결국 나는 그 길로 엄마 손에 이끌려 이비인후과로 이송되었다. 화타의 손길에 붉은 약에 쩔어 꿈틀거리며 귓속에서 나온 녀석이 여전히 기억나는 걸 보면 그 장면이 꽤나 강렬했던 모양이다. 의사 선생님은 그렇게 충격 요법으로 다시는 내가 귓구멍에 무언가를 집어넣지 못하게 만드셨다.
채집, 학살 그리고 생매장까지, 녀석들이 내게 불타는 복수심을 지닌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나는 그 후손들에게 대대로 척결대상 1호로 널리 알려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놈들은 본거지 위에 집을 짓고 내가 덫에 걸리길 기다렸던 것이다.
오전 9시- 싱크대 위 두 마리 (간 밤에 배수구 뚜껑으로 막아둠) 방에서 산 놈 두 마리, 죽은 놈 네 마리.
비가 왔기 때문일까? 뜨듯하고 습도 가득한 집안 환경에 매료되어 여기저기서 올라온 것일까? 이제 벼랑까지 쫓기는 기분으로 외부용 살충제를 세탁기 밑에 뿌렸다. 최대한 건드리거나 호흡하지 않기 위해 세탁기 안 쪽으로 조심스레 밀어 넣었다. 혹시나 모를 부작용을 막기 위해 꽃분홍 마스크를 쓰고 세심하게 작업하는데 마침 검침원이 도착했다.
우산을 쓰고 마당으로 뛰어 나가 대문을 열었다. 이사 후 처음으로 현관문 앞에 달동네 팅커벨이 정체를 감추었다.
대문 앞에 말끔한 청년이 비옷을 입고 서 있었다. 비 오는 날 이 산골까지 올라온 것이 못내 마음이 쓰였다. 마당을 통해 건물 외벽을 따라가면, 아주 옛날에 아궁이로 썼을 법한 콘크리트 상자 안에 보일러가 설치되어 있다. 보일러가 설치된 장소를 안내해 주자 청년은 여기저기 가스 누수가 없는지 확인하고 꼼꼼히 살폈다. 남의 집 귀한 아들을 저 무시무시한 콘크리트 상자에 밀어 넣으니 맘이 좋지 않다. 어둡고 습한 저 상자 안에는 콩벌레를 기다리는 포식자들이 거주하고 있을 것만 같다. '누수되고 있습니다, 당장 이 집을 탈출하세요' 보다 '여기 쥐 있어서 못 들어가겠어요' 혹은 '여기 왕지네가 또아리 틀고 있어서 검침 못하겠어요'라고 말하는 상황이 더욱더 공포스럽다.
청년이 잔뜩 몸을 구부린 채 검침을 무사히 마치고 나와 비를 뚫고 다시 언덕을 내려갔다.
그가 할 일을 마치고 돌아가니 금방 비가 그쳤는데 시원하게 천장을 두드리던 빗소리가 사라지더니 지붕과 외벽 어딘가에서 '부스럭' '두둥' 하는 소리가 울렸다.
남의 집 귀한 아들은 마녀의 화덕 같은 아궁이에 잘도 집어넣더니 고작 나는 지붕을 확인할 엄두도 나지 않아, 이것은 '고여있던 비가 흘러내린 소리'라고 정의하고 오늘 하루 종일 마당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았다.
사방이 고요한 밤이 되면 싱크대 배수구에서 드륵 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가 나는데, 역시나 너무나도 무서워 팔팔 끓는 물을 들이붓고는 뚜껑으로 배수구를 막아버렸다.
넓고 깨끗하고 불편함이 하나 없는 내 소유의 집, 그런 건 어디에 있을까?
한 끼 식사를 맘 편히 지어먹을 수 있는 넓은 부엌이 갖고 싶다. 제대로 정돈되어 한눈에 무엇이 어디 있는지 잘 보이는 옷방이 갖고 싶다. 벌레나 소음 걱정이 없는 내 소유의 지붕 아래서 가능하면 별을 보면서 잠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
환기가 잘 되어 바닥이 잘 마르는 욕실에는 욕조가 있었으면 좋겠다. 베쓰밤을 하나 풀고 향이 좋은 거품 목욕을 하면서 홀짝홀짝 와인을 마실 수 있으면 금상첨화겠다.
역세권은 아니더라도 배송 기사나 검침원들이 나의 집에 도착했을 때 가쁜 숨을 몰아쉬지 않아도 되는 곳이었으면 좋겠다. 그 집에 살면서 출근길에 위장이 아프지 않은 삶, 그런 건 어디에 가야 찾을 수 있을까?
내가 하루에 얼마를 벌어야 가질 수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