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왕관을 쓰지 않는 왕
2022년 여름, 서울의 한 스타트업에서 흥미로운 실험이 진행됐다.
"이번 프로젝트는 막내가 총괄합니다."
회의실이 술렁였다. 입사 6개월 차 신입사원이 2억 원짜리 프로젝트를 맡는다고?
더 놀라운 건 CEO의 다음 말이었다.
"실패해도 됩니다. 단, 왜 실패했는지는 명확히 정리해 주세요."
3개월 후, 프로젝트는 성공했다. 예상 매출을 40% 초과 달성했다. 신입사원은 어떻게 해냈을까?
"처음엔 무서웠어요. 그런데 CEO가 '네가 결정해. 난 네 결정을 지원할게'라고 하니까 오히려 더 신중해지더라고요. 남 탓할 수 없으니까요."
이것이 진정한 권한 위임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떨까?
한국식 권한 위임의 민낯
"권한은 위임하되 책임은 함께 진다."
많은 리더들이 하는 말이다. 듣기엔 좋다. 하지만 현장의 목소리는 다르다.
케이스 1: 가짜 위임
대기업 A사의 팀장 김 과장의 하소연이다.
"부장님이 '네가 알아서 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진행했는데, 나중에 '왜 나한테 먼저 물어보지 않았냐'고 하시더라고요. 알아서 하라면서요?"
이른바 '샌드위치 위임'이다. 위임한 척하지만 실제로는 모든 것을 통제하려 한다.
케이스 2: 폭탄 돌리기
IT기업 B사의 사례다.
"신규 사업 TF를 만들어서 저를 팀장으로 임명했어요. 리소스도 없고, 기간도 촉박한 프로젝트였죠. 안 될 게 뻔한 일을 떠넘긴 거예요. 역시나 실패했고, 전 좌천됐습니다."
권한 위임을 가장한 책임 전가. 한국 기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진짜 위임 vs 가짜 위임
그렇다면 어떻게 구분할까?
진짜 위임의 특징
명확한 권한 범위
"1억 원까지는 네 판단으로 집행해"
"이 고객사는 네가 전권을 갖고 관리해"
실패 수용
"실패해도 내가 책임질게"
"실패에서 배운 점을 공유해줘"
적절한 지원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
"주 1회 진행 상황만 공유해줘"
가짜 위임의 신호
모호한 지시
"적당히 알아서 해"
"내가 바쁘니까 네가 좀 봐줘"
숨은 조건
"실패하면 네 책임이야"
"잘못되면 네가 다 뒤집어써"
과도한 간섭
"왜 이렇게 했어?"
"내가 하라는 대로 안 했네?"
토스의 실험: 완전한 자율성
토스는 '완전한 권한 위임'으로 유명하다.
"저희는 '사일로(Silo)'라는 독립 조직을 운영해요. 각 사일로는 작은 스타트업처럼 움직입니다." - 토스 리더
각 사일로의 권한은 다음과 같다.
독자적 채용 권한
독립적 예산 운영
자율적 의사결정
별도 성과 측정
결과는? 토스뱅크, 토스증권, 토스페이먼츠 등 각 사일로가 독립 기업처럼 성장했다.
"처음엔 혼란스러웠어요. '정말 우리가 결정해도 되나?' 싶었죠. 그런데 진짜더라고요. 실수해도 배우라고 하고, 성공하면 인정해 주고." - 토스 사일로 리더
실패를 대하는 자세가 핵심
권한 위임의 진정성은 실패했을 때 드러난다.
배달의민족의 사례
2019년, 배민의 한 팀이 신규 서비스를 런칭했다가 3개월 만에 접었다. 손실액 15억 원.
보통의 회사라면 책임자 문책, 경위서 작성, 인사 조치 등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배민의 대응은 달랐다.
"실패 사례 공유회를 열었어요. 왜 실패했는지, 뭘 배웠는지 전사에 공유했죠. CEO가 '빠르게 실패해줘서 고맙다'고 하더라고요." - 프로젝트 리더
이후 그 팀은 배민 최고의 히트 서비스를 만들어냈다.
권한과 책임의 매트릭스
권한과 책임의 관계를 매트릭스로 정리해보면,
1사분면: 권한↑ 책임↑ (건강한 위임)
진정한 리더십 개발
높은 동기부여
빠른 성장
2사분면: 권한↑ 책임↓ (무책임한 방임)
도덕적 해이
조직 와해
통제 불능
3사분면: 권한↓ 책임↓ (소극적 조직)
낮은 생산성
수동적 문화
혁신 부재
4사분면: 권한↓ 책임↑ (독성 조직)
높은 스트레스
잦은 이직
번아웃
대부분의 한국 기업은 4사분면에 있다. 권한은 주지 않으면서 책임만 묻는다.
단계별 권한 위임 전략
한 번에 모든 권한을 넘기는 것은 위험하다. 단계적 접근이 필요하다.
1단계: 정보 공유 "이런 상황인데 어떻게 생각해?"
의견을 묻되 결정은 리더가
2단계: 제안 요청 "네가 결정한다면 어떻게 하겠어?"
제안을 받되 최종 결정은 리더가
3단계: 공동 결정 "같이 결정하자"
함께 논의하고 함께 결정
4단계: 사전 승인 "계획을 보고하면 내가 승인할게"
계획은 부하가, 승인은 리더가
5단계: 사후 보고 "실행하고 나서 알려줘"
실행은 자율, 보고는 의무
6단계: 완전 위임 "네 영역이야. 알아서 해"
결과만 공유
역량과 의지의 매칭
모든 직원에게 같은 수준의 권한을 줄 수는 없다. 개인별 맞춤 전략이 필요하다.
역량↑ 의지↑ : 완전 위임 "믿고 맡긴다. 네가 CEO다."
역량↑ 의지↓ : 동기 부여 "능력은 있는데 왜 의욕이 없을까?"
역량↓ 의지↑ : 코칭 강화 "열정은 있으니 역량을 키워주자."
역량↓ 의지↓ : 기본 관리 "기초부터 다시 시작하자."
위임받는 사람의 자세
권한을 받는 것도 기술이다.
삼성전자 임원의 조언
"부장 시절, 상무님이 큰 프로젝트를 맡기셨어요. 무작정 덤비지 않고 먼저 물었죠.
의사결정 권한이 어디까지인가요?
예산 범위는 어떻게 되나요?
보고 주기는 어떻게 할까요?
실패의 기준은 무엇인가요?
명확히 정리하고 시작하니 서로 편했어요."
체크리스트
□ 권한의 범위가 명확한가?
□ 사용 가능한 자원은 무엇인가?
□ 보고 체계는 어떻게 되는가?
□ 성공/실패의 기준은 무엇인가?
□ 지원받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중간관리자의 딜레마
가장 어려운 위치는 중간관리자다. 위에서는 '위임했다'고 하고, 아래서는 '권한이 없다'고 한다.
현대자동차 부장의 경험
"전무님은 '네가 알아서 해'라고 하시는데, 실제로 뭔가 하려면 다 결재받아야 해요. 팀원들은 '부장님이 결정해 주세요'라고 하는데, 제게 진짜 권한이 있나요?"
해법에는 어떤 게 있을까?
위와 아래에 투명하게 소통 "제 권한은 여기까지입니다. 이 이상은 함께 올라가서 논의해야 해요."
작은 권한이라도 최대한 활용 "팀 회식 메뉴는 막내가 정해. 예산 내에서 네 권한이야."
점진적 권한 확대 요청 "이번에 이 정도는 제가 결정하고 싶습니다. 다음엔 더 큰 권한을 주세요."
성공 사례: 쿠팡의 'Two Pizza Team'
쿠팡은 아마존의 'Two Pizza Team' 규칙을 한국식으로 적용했다.
"피자 두 판으로 배부를 수 있는 규모의 팀. 보통 6-8명이죠. 이 팀은 독립적으로 의사결정하고 실행합니다." - 쿠팡 임원
각 팀의 권한을 아래외 같이 정했다.
독자적 로드맵 수립
자율적 일정 관리
독립적 성과 측정
직접적 고객 소통
결과는 신선했다.
의사결정 속도 3배 향상
혁신 아이디어 5배 증가
직원 만족도 40% 상승
"처음엔 불안했어요. '우리가 이렇게 해도 되나?' 그런데 실패해도 다시 하면 된다는 문화가 있으니까 과감해지더라고요." - 쿠팡 팀 리더
실패 사례에서 배우기
L전자의 실패
2020년, L전자는 '자율 경영'을 선언했다. 각 사업부에 전권을 위임한다고 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위임이라고 할 수 있었을까?
매주 실적 보고 요구
모든 투자 건 본사 승인
인사권은 여전히 본사에
1년 후 핵심 인재 30%가 이직했다.
"말로만 자율 경영이었어요. 책임만 늘고 권한은 그대로. 차라리 예전이 나았죠." - 전 L전자 사업부장
교훈
말과 행동의 일치 필요
형식적 위임은 독
신뢰 없는 위임은 실패
권한 위임의 ROI
권한 위임이 정말 효과가 있을까? 데이터를 보자.
맥킨지 연구 결과 (2023)
권한 위임 수준 상위 25% 기업
수익성 33% 높음
혁신 속도 2.5배
직원 몰입도 67% 높음
국내 기업 사례
권한 위임 강화 후 성과
A사 : 신제품 출시 주기 50% 단축
B사 : 고객 만족도 35% 상승
C사 : 이직률 60% 감소
실천 가이드라인
리더를 위한 체크리스트
□ 위임할 업무가 명확히 정의되었는가?
□ 담당자의 역량을 정확히 파악했는가?
□ 권한의 범위를 구체적으로 설명했는가?
□ 필요한 자원을 제공했는가?
□ 실패 시 나리오를 공유했는가?
□ 지원 체계를 마련했는가?
□ 간섭하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 있는가?
직원을 위한 체크리스트
□ 권한의 범위를 정확히 이해했는가?
□ 불명확한 부분을 질문했는가?
□ 필요한 자원을 확인했는가?
□ 리스크를 파악하고 대비했는가?
□ 정기적 소통 계획을 세웠는가?
□ 도움 요청할 타이밍을 알고 있는가?
신뢰의 선순환
진정한 권한 위임은 신뢰에서 시작한다.
"직원을 믿지 못하면서 권한을 준다? 그건 위임이 아니라 방임이죠." - 스타트업 CEO
신뢰 → 권한 위임 → 책임감 → 성과 → 더 큰 신뢰
이 선순환을 만드는 것이 리더의 역할이다.
물론 쉽지 않다. 때로는 실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기억할 것은,
"완벽한 통제는 환상이다. 불완전한 위임이 완벽한 통제보다 낫다."
리더의 진정한 성공은 자신이 없어도 돌아가는 조직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권한을 쥐고 있을 때가 아니라, 권한을 나눠줄 때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