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말이 황금이 되는 조직
오전 9시, 스타트업 C사의 하루가 시작되는 곳은 단체 카톡방이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 10시 미팅 준비 완료했습니다"
"어제 공유한 자료 확인 부탁드려요"
"점심 메뉴 추천받아요"
오후 6시 퇴근할 때까지 단톡방에는 150개가 넘는 메시지가 오간다. 하지만 정작 옆자리에 앉은 동료와 나눈 대화는 5분도 안 된다. 점심도 각자 컴퓨터 앞에서 먹으며 단톡방을 확인한다.
3개월 후, 이 회사의 신입사원 퇴사율은 40%를 넘었다. 퇴사 면담에서 가장 많이 나온 이유는 의외로 "회사가 너무 삭막하다"였다.
디지털 과잉 시대의 역설적 단절
우리는 역사상 가장 연결된 시대를 살고 있다. 스마트폰 하나로 지구 반대편 사람과도 실시간 대화가 가능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전 세계 3만 명의 직장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는 충격적이다. 팬데믹 이후 팀즈(Teams) 메시지 사용량은 250% 증가했지만, 직원들의 유대감은 오히려 31% 감소했다. 더 많이 연결됐지만 더 단절된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질까?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의 한계를 이해하면 답이 보인다.
첫째, 디지털은 정보는 전달하지만 감정은 전달하지 못한다.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메시지에서 진심을 읽기는 어렵다. 상대방의 표정, 목소리 톤, 제스처가 없기 때문이다.
둘째, 디지털은 즉각적이지만 깊이가 없다. 단톡방에서 오가는 대화는 대부분 업무 전달이나 단순 정보 공유다. 서로의 고민을 나누거나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는 깊은 대화는 일어나기 어렵다.
셋째, 디지털은 기록되기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다. 단톡방에서는 솔직한 의견이나 엉뚱한 아이디어를 말하기 꺼려진다. 혹시 오해받을까, 나중에 문제가 될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카카오의 실험: "목요일은 단톡 없는 날"
2022년, 카카오 개발팀은 흥미로운 실험을 시작했다. 매주 목요일을 '단톡 없는 날'로 정한 것이다. 처음에는 반발이 컸다. "메신저 회사가 메신저를 안 쓴다니?" 하지만 규칙은 단순했다. 목요일에는 급한 것이 아니면 단톡 대신 직접 찾아가서 대화하기.
첫 주는 혼란스러웠다. 습관적으로 메시지를 보내려다 멈추고, 어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동료를 찾아갔다. 하지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처음엔 불편했는데, 직접 가서 얘기하니까 5분이면 끝날 일이더라고요. 메신저로는 오해도 생기고, 이래저래 30분씩 걸렸는데."
더 극적인 변화는 다른 곳에서 나타났다. 문제 해결 속도가 40% 향상된 것이다. 직접 만나 화이트보드에 그려가며 논의하니 복잡한 문제도 빠르게 해결됐다. 무엇보다 팀워크 만족도가 35% 상승했다.
"얼굴 보고 얘기하니까 동료가 아니라 사람으로 보이더라고요. 그의 표정, 고민, 열정이 보였어요."
6개월 후, 이 실험은 카카오 전사로 확대됐다. 그리고 1년 후, 카카오의 직원 만족도는 업계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용도별 소통 채널의 최적 배분
그렇다고 디지털을 버리고 아날로그로 돌아가자는 말은 아니다. 각각의 장점을 살려 적절히 배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즉시성이 필요한 경우: 디지털 100%
시스템 장애 상황 공유
긴급 일정 변경 안내
단순 정보 전달 (회의실 변경, 자료 위치 등)
재택근무 시 업무 진행 상황 공유
이런 상황에서는 디지털의 즉시성과 동시 전달력이 빛을 발한다. 굳이 모든 사람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다.
관계와 신뢰가 필요한 경우: 아날로그 70%
성과에 대한 피드백
갈등 조정이나 민감한 대화
창의적 브레인스토밍
신입사원 온보딩
팀 빌딩 활동
이런 상황에서는 대면 소통이 훨씬 효과적이다. 상대방의 비언어적 신호를 읽고,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복잡한 의사결정: 하이브리드 방식
사전 자료는 디지털로 공유
핵심 논의는 대면 회의
결정 사항은 다시 디지털로 기록
이렇게 각 채널의 강점을 조합하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
토스의 "Walking Meeting"
토스의 이승건 대표는 중요한 결정일수록 회의실을 나와 걷는다. '걸으면서 하는 회의'는 토스의 독특한 문화가 됐다.
"회의실에 앉아 있으면 형식적이 되기 쉬워요. PPT 넘기고, 정해진 아젠다 따라가고... 그런데 걸으면서 얘기하면 달라집니다. 자연스럽게 핵심만 말하게 되고, 걷는 리듬이 사고를 활발하게 만들죠."
실제로 토스의 주요 의사결정 중 상당수가 이런 워킹 미팅에서 이뤄졌다. 로켓페이 인수, 토스증권 출범 같은 중대 결정도 마찬가지다.
토스는 소통 유형별로 최적의 채널을 정해놨다.
정보 공유: 디지털 80% / 아날로그 20% 슬랙으로 빠르게 공유하되, 중요한 것은 주간 미팅에서 다시 강조
아이디어 회의: 디지털 30% / 아날로그 70% 사전 아이디어는 온라인으로 모으고, 발전시키는 건 오프라인으로
팀 빌딩: 디지털 10% / 아날로그 90% 단톡방 잡담보다는 함께 밥 먹고 커피 마시는 시간 중시
당근마켓의 "티타임 복권"
당근마켓은 더 재미있는 시도를 했다. 매주 금요일, 랜덤으로 2명을 매칭해 커피 한잔을 하도록 하는 '티타임 복권' 제도다. 규칙은 단 하나. "업무 얘기 금지."
"처음엔 어색했어요. 모르는 팀 사람과 커피 마시면서 뭘 얘기해야 하나... 그런데 의외로 재밌더라고요. 개발자가 쓴 시, 디자이너의 요리 취미, 마케터의 육아 고민... 사람들이 이렇게 다채로운지 몰랐어요."
이 제도의 효과는 숫자로도 증명됐다.
부서 간 협업 프로젝트 300% 증가
이직률 업계 평균 대비 50% 낮음
"회사가 재미있다" 응답 85%
한 당근마켓 직원은 이렇게 말한다. "단톡방에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대화들이에요. 그런 사소한 대화가 쌓여서 진짜 동료가 되는 것 같아요."
황금비율 찾기: 7:3 법칙
그렇다면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이상적인 비율은 얼마일까? 정답은 없지만, 많은 성공 기업들이 '7:3 법칙'을 따르고 있다.
주간 커뮤니케이션 시간 기준
디지털 소통: 70% (정보 전달, 진행 상황 공유)
아날로그 소통: 30% (관계 구축, 깊은 대화)
하지만 이것도 직급과 직무에 따라 달라진다.
실무자: 디지털 80% / 아날로그 20% 빠른 업무 처리가 중요하므로 디지털 비중이 높다.
중간관리자: 디지털 60% / 아날로그 40% 위아래를 연결하고 갈등을 조정해야 하므로 대면 소통이 늘어난다.
임원: 디지털 40% / 아날로그 60% 비전 제시, 동기부여, 중요 의사결정을 위해 대면 소통이 필수다.
우리 팀의 디지털 의존도 체크
□ 옆자리 동료에게도 메신저로 대화한다
□ 하루에 받는 알림이 100개가 넘는다
□ 점심시간에도 단톡방을 확인한다
□ 중요한 피드백을 메신저로만 준다
□ 일주일에 동료와 커피 한잔 하는 시간이 30분 미만이다
□ 팀 회식보다 온라인 모임을 선호한다
4개 이상 체크했다면, 아날로그 소통을 늘려야 할 때다.
실천 가이드: 디지털 디톡스 & 아날로그 부스트
월요일: 메신저 없는 오전 오전 9시부터 11시까지 2시간은 메신저를 끈다. 급한 일은 직접 찾아가거나 전화한다. 놀랍게도 업무 집중도가 2배 이상 높아진다.
화요일: 런치 토크 점심은 반드시 동료와 함께. 다른 팀 사람과 먹으면 더 좋다. 업무 얘기 3할, 일상 얘기 7할 정도가 적당하다.
수요일: 워킹 미팅 실내 회의 대신 밖에서 걸으며 회의한다. 15분 걷기는 1시간 회의실 효과가 있다. 신선한 공기가 창의적 사고를 자극한다.
목요일: 커피 브레이크 오후 3시, 팀원들과 15분 커피타임을 갖는다. 노트북과 스마트폰은 놔두고 가는 것이 규칙. 가벼운 대화가 팀워크를 만든다.
금요일: 디지털 정리의 날 한 주간 쌓인 메시지를 정리하고, 불필요한 단톡방은 나간다. 다음 주에 만나서 논의할 아젠다를 정리한다.
하이브리드 소통의 미래
구글은 유명한 'TGIF(Thank God It's Friday)' 전사 미팅을 팬데믹 이후 하이브리드 방식으로 전환했다. 온라인으로 참여하는 직원과 오프라인으로 모이는 직원이 공존하는 방식이다.
흥미로운 것은 참석률은 비슷하지만 만족도는 40% 상승했다는 점이다. 비결은 무엇일까?
온라인 참석자도 실시간 투표와 Q&A 참여
오프라인 참석자는 미팅 후 네트워킹 시간
중요 발표는 오프라인 우선, 정보 공유는 온라인 활용
모든 내용은 디지털로 아카이빙해 언제든 다시 볼 수 있게
핵심은 선택권과 유연성이다. 각자의 상황과 선호에 맞춰 소통 방식을 선택할 수 있게 하되, 전체적인 균형은 유지하는 것이다.
시작은 작은 변화부터
한 IT 기업 팀장의 이야기다. 그는 매일 아침 10분씩 팀원들과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단톡방 인사 대신 얼굴 보고 인사하기.
"처음엔 10분이 아까웠어요. 그 시간에 메일이라도 하나 더 처리하고 싶었죠. 그런데 신기하게도 오히려 일이 빨라졌어요. 커피 마시며 간단히 논의하고 바로 실행하니까 메신저로 주고받던 시간이 줄었거든요."
6개월 후, 그의 팀은 회사에서 가장 성과가 좋은 팀이 됐다. 비결을 묻자 그는 웃으며 답했다.
"특별한 건 없어요. 그냥 얼굴 보고 얘기하는 시간을 늘렸을 뿐이에요. 디지털은 도구일 뿐, 사람이 중심이라는 걸 잊지 않으려고요."
디지털과 아날로그는 대립 관계가 아니다. 상호보완 관계다. 디지털의 효율성과 아날로그의 인간미를 적절히 조합할 때, 진정한 소통이 일어난다. 잠시 스마트폰을 내려놓아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