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왕관을 쓰지 않는 왕
2023년 가을, 서울 강남의 한 컨퍼런스 홀. 300명의 직원들이 모인 가운데 한 스타트업 CEO가 무대에 올랐다.
"여러분, 제가 올해 한 가장 큰 실패를 발표하겠습니다."
청중이 술렁였다. CEO가 실패를 '발표'한다고?
"우리가 6개월간 개발한 신규 서비스, 출시 3주 만에 접었습니다. 제 판단 미스였어요. 시장 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고, 내부 목소리만 들었습니다. 손실액은 15억 원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다음이었다.
"그래서 오늘 '올해의 실패상'을 제가 받겠습니다. 상금은... 없습니다. 대신 실패에서 배운 교훈을 공유하겠습니다."
이것이 B사의 연례행사 '실패 자랑 대회'의 한 장면이다.
성공 신화의 그늘
우리는 성공 스토리에 중독되어 있다. 서점에는 성공한 CEO의 자서전이 넘쳐나고, 언론은 유니콘 기업의 화려한 성과만 조명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성공만 이야기하는 조직은 실패한다.
왜일까?
첫째, 실패를 숨기는 문화가 만들어진다. 모두가 성공한 척하느라 바쁘고, 문제는 덮어진다. 곪아 터질 때까지.
둘째, 학습이 일어나지 않는다. 실패는 최고의 스승인데, 그 스승을 외면한다. 같은 실수가 반복된다.
셋째, 혁신이 죽는다. 실패가 두려우면 도전하지 않는다. 안전한 선택만 하다가 시장에서 도태된다.
실리콘밸리의 "Fail Fast" 문화
실리콘밸리에는 이런 말이 있다. "Fail fast, fail cheap, fail forward."
빨리 실패하고, 적은 비용으로 실패하고, 실패를 통해 앞으로 나아가라는 뜻이다. 이들에게 실패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성장의 증거다.
구글의 "실패 박물관"
구글 본사에는 실패한 제품들을 전시하는 공간이 있다. 구글 글래스, 구글 플러스, 구글 웨이브... 수백억 달러를 날린 프로젝트들이다.
왜 굳이 실패를 전시할까? 한 구글 엔지니어의 설명은 이렇다.
"실패를 자랑스럽게 여기라는 게 아니에요. 실패에서 배우라는 거죠. 그리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메시지예요. 구글도 이렇게 많이 실패했는데, 여전히 혁신하고 있잖아요."
한국 기업들의 변화: 실패를 포용하다
한국 기업들도 변하고 있다. 특히 스타트업과 일부 대기업에서 실패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고 있다.
토스의 "Fail & Learn" 세션
매주 금요일, 토스 직원들은 한 주간의 실패를 공유한다. 규칙은 간단하다.
비난 금지
해결책 함께 찾기
교훈 문서화하기
"처음엔 정말 어색했어요. 한국에서 실패를 자랑하다니... 그런데 신기하게도 팀이 더 강해지더라고요. 실패를 숨기지 않으니 빨리 해결되고, 서로 돕는 문화가 생겼어요." - 토스 개발자
삼성전자의 "C-Lab 실패 수당"
삼성전자 사내벤처 C-Lab은 파격적인 제도를 도입했다. 도전적인 프로젝트가 실패하면 '실패 수당'을 지급한다. 단, 조건이 있다.
실패 원인을 명확히 분석할 것
교훈을 전사에 공유할 것
다음 프로젝트에 반영할 것
결과는 놀라웠다. C-Lab 출신 스타트업들이 연이어 성공하며 혁신의 요람이 됐다.
실패를 자산으로: 쿠팡의 사례
쿠팡은 한국에서 가장 많이 실패한 기업 중 하나다. 소셜커머스에서 시작해 수많은 피벗을 거쳤다. 김범석 대표는 이를 숨기지 않는다.
"우리는 정말 많이 실패했어요. 하지만 각 실패가 다음 단계의 디딤돌이 됐죠."
쿠팡의 실패 리스트
소셜커머스 → 티켓 판매량 저조
로컬 커머스 → 수익성 악화
여행 상품 → 경쟁력 부족
하지만 이 실패들이 쌓여 '로켓배송'이 탄생했다. 각 사업에서 얻은 교훈들은 무엇일까.
고객은 할인보다 편의를 원한다
배송이 커머스의 핵심이다
차별화된 경험이 충성도를 만든다
결과: 한국 이커머스 1위, 나스닥 상장, 시가총액 100조 원.
실패 공유의 심리학적 효과
실패를 공유하는 것이 왜 조직에 도움이 될까? 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1. 심리적 안전감 형성
리더가 먼저 실패를 인정하면, 구성원들도 안심한다. "실패해도 괜찮구나" 하는 안전감이 생긴다.
2. 집단 학습 효과
한 사람의 실패가 모두의 교훈이 된다. 전체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된다.
3. 신뢰 구축
완벽한 척하는 리더보다 실패를 인정하는 리더가 더 신뢰받는다. 진정성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4. 혁신 문화 조성
실패가 용인되면 도전이 늘어난다. 도전이 늘면 혁신의 확률도 높아진다.
당근마켓의 "실패 리포트"
당근마켓은 모든 프로젝트 종료 시 '사후 분석(Post-mortem)'을 진행한다. 성공한 프로젝트도, 실패한 프로젝트도 예외 없이.
실패 리포트의 구성
What : 무엇을 시도했나
Why Failed : 왜 실패했나
Key Learnings : 핵심 교훈은
Next Actions : 다음에는 어떻게
"우리는 실패를 '투자'로 봅니다. 15억을 날렸다고 생각하지 않고, 15억을 주고 귀중한 교훈을 샀다고 생각해요." - 당근마켓 프로덕트 매니저
실제로 당근마켓의 '당근페이' 서비스는 3번의 실패 끝에 성공했다. 각 실패에서 얻은 교훈이 쌓여 완성된 것이다.
실패 자랑 대회 운영 가이드
실패 공유 문화를 만들고 싶다면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1단계 : 리더의 솔선수범
CEO/임원이 먼저 자신의 실패 공유
"나도 실패한다"는 메시지 전달
실패를 성장의 과정으로 재정의
2단계 : 안전한 환경 조성
실패 공유 시 비난 절대 금지
"덕분에 우리가 배웠다" 분위기 조성
작은 실패부터 시작
3단계 : 체계적 운영
정기적 실패 공유 시간 확보
실패 아카이브 구축
'Lessons Learned' 데이터베이스화
4단계 : 인센티브 설계
'건설적 실패' 포상
실패에서 배운 교훈 공유 시 보상
성과 평가에 '도전 지수' 반영
실패 유형별 접근법
모든 실패가 같은 것은 아니다. 유형별로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
1. 혁신적 실패 (Intelligent Failure)
새로운 시도에서 발생
예측 불가능했던 결과
가장 가치 있는 실패
접근 : 축하하고 격려하기
2. 예방 가능한 실패 (Preventable Failure)
부주의나 태만으로 발생
프로세스 준수로 막을 수 있었던 것
반복되면 안 되는 실패
접근 : 원인 분석 후 시스템 개선
3. 복잡한 실패 (Complex Failure)
여러 요인이 얽힌 실패
완벽히 예측하기 어려웠던 것
시스템적 접근 필요
접근 : 다각도 분석 후 종합적 개선
넷플릭스의 "Sunshine Policy"
넷플릭스는 '햇빛 정책'을 운영한다. 모든 실수와 실패를 햇빛 아래 드러내듯 투명하게 공개한다.
리드 헤이스팅스 CEO의 철학을 올기면
"실패를 숨기는 것이 실패 자체보다 더 큰 문제다. 햇빛은 최고의 소독제다."
넷플릭스의 실천 사례
전사 이메일로 실패 사례 공유
실패한 프로젝트 팀이 직접 발표
"What We learned" 문서 의무화
실패 공유한 직원에게 보너스 지급
"처음 넷플릭스에 왔을 때 충격이었어요. VP가 자기 실패를 전 직원 앞에서 발표하는데... 한국이었으면 사표 썼겠죠. 근데 여기선 박수를 쳐요. 그리고 다음 프로젝트를 맡겨요." - 넷플릭스 한국 지사 직원
실패를 대하는 한국적 정서의 극복
한국에서 실패 문화를 만들기가 특히 어려운 이유가 있다.
체면 문화 : 실패는 곧 무능력으로 인식
완벽주의 : 100점 아니면 0점인 사고
경쟁 문화 : 남의 실패가 나의 기회
연공서열 : 선배의 실패를 지적하기 어려움
하지만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배달의민족의 '망했어요' 전시회
배민은 실패한 마케팅 캠페인들을 사내에 전시했다. '치킨 모자', '배달 음악 앨범' 등 망한 아이디어들이다.
"웃으면서 보다가 깨달아요. 이런 시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배민이 있구나. 실패도 우리 역사의 일부예요." - 김봉진 의장
카카오의 '실패 컨퍼런스'
카카오는 연 1회 실패 컨퍼런스를 연다. 각 계열사에서 가장 크게 실패한 프로젝트를 발표한다.
2023년 대상 : 카카오페이지의 웹소설 AI 추천 시스템
개발비 20억 투입
정확도 32%로 폐기
교훈 : 기술 중심이 아닌 사용자 중심으로
실패 문화의 오해와 진실
실패 문화에 대한 오해들을 바로잡아야 한다.
오해 1 : "실패를 장려한다"
진실: 실패를 장려하는 게 아니라 도전을 장려한다. 실패는 도전의 부산물이다.
오해 2 : "무책임해도 된다"
진실: 오히려 더 책임감 있게 된다. 실패를 분석하고 공유해야 하므로.
오해 3 : "성과가 떨어진다"
진실: 단기 성과는 떨어질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혁신과 성장으로 이어진다.
오해 4 : "아무나 실패해도 된다"
진실: '똑똑한 실패'만 가치가 있다. 같은 실패를 반복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실패 지표 : 건강한 실패 vs 위험한 실패
조직의 실패를 측정하는 지표들은 어떤 게 있을까.
건강한 실패의 신호
실패 공유 빈도 증가
도전적 프로젝트 수 증가
실패 후 개선 속도 향상
구성원 심리적 안전감 상승
위험한 실패의 신호
같은 실패 반복
실패 은폐 시도
책임 전가 문화
도전 의욕 감소
스타트업 생태계의 실패 문화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도 실패를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고 있다.
실패 경험이 스펙이 되는 시대
투자자들이 실패 경험 있는 창업자 선호
"어떻게 실패했고 무엇을 배웠나" 질문
연쇄 창업자 우대
재도전 지원 프로그램
정부의 재도전 지원금
액셀러레이터의 'Second Chance' 프로그램
실패 창업자 네트워킹 모임
"첫 창업 때 30억 날렸어요. 망하고 나니 오히려 투자 제안이 들어왔죠. '실패해본 사람이 더 잘한다'면서요." - 연쇄 창업자 K씨
대기업의 변화 : 실패 허용 범위 확대
보수적인 대기업들도 변하고 있다.
SK의 '실패 사례 공모전'
전 계열사 대상 실패 사례 공모
최고의 실패 선정해 포상
CEO가 직접 시상
LG의 '패스트 트랙'
혁신적 아이디어는 실패해도 불이익 없음
'패스트 트랙' 지정 프로젝트
실패 시 다음 기회 우선 부여
글로벌 비교 : 실패를 대하는 문화 차이
미국 : 실패는 훈장
실리콘밸리에서는 실패 경험이 없으면 오히려 의심
Fail fast 문화가 일상화
일본 : 실패는 치명적
한 번의 실패가 커리어 종료
하지만 최근 변화 조짐
중국 : 실패는 학습
빠른 시행착오 중시
정부도 실패 용인 정책
이스라엘 : 실패는 경험
후츠파 정신으로 계속 도전
실패를 당연하게 여김
실패 자랑 대회 성공 사례
B사의 연례 "Failure Festival"
매년 12월 개최
부문별 최고의 실패 선정
CEO상, CTO상, CFO상 등
진행 방식 :
5분 발표 (실패 과정)
5분 Q&A (교훈 공유)
투표로 수상자 선정
상금 대신 다음 프로젝트 우선권
효과 :
혁신 프로젝트 3배 증가
실패 비용 50% 감소 (빠른 중단)
직원 만족도 40% 상승
실패를 자산화하는 방법
1. 실패 데이터베이스 구축
모든 실패 사례 기록
태그로 분류 (원인, 교훈, 개선점)
신규 프로젝트 시작 전 필수 검색
2. 실패 멘토링 프로그램
실패 경험자가 신규 프로젝트 멘토
"이런 실수 조심하세요" 조언
실패 예방이 아닌 빠른 인지 도움
3. 실패 시뮬레이션
"만약 이게 실패한다면?" 워크숍
Pre-mortem 분석
리스크 대응 계획 수립
리더의 역할: 실패하는 모습 보여주기
페이스북 마크 저커버그의 고백 "우리가 모바일 전환에 늦었던 것은 제 판단 미스였습니다. HTML5에 올인했다가 2년을 낭비했죠."
공개적 인정 후 변화 :
전사적 모바일 퍼스트 전환
인스타그램, 왓츠앱 인수
모바일 광고 시장 1위
토스 이승건 대표의 일일 실패 공유
매일 아침 전직원 슬랙에 전날의 작은 실패 공유 "어제 고객 미팅에서 준비 부족으로...", "제품 방향성 판단을 잘못해서..."
효과 : 직원들도 자연스럽게 실패 공유 시작
실패 문화 만들기 체크리스트
□ 리더가 먼저 실패를 공개했는가?
□ 실패 공유 시 비난하지 않는가?
□ 실패에서 배운 점을 문서화하는가?
□ 도전적 시도를 격려하는가?
□ 같은 실패 반복을 방지하는 시스템이 있는가?
□ 실패 경험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가?
□ 빠른 실패를 장려하는가?
□ 실패 비용을 최소화하려 노력하는가?
6개 이상 체크 : 건강한 실패 문화 3-5개 : 개선 필요 3개 미만 : 시급한 변화 필요
실패에서 혁신으로: 3M의 포스트잇
3M의 가장 유명한 제품 포스트잇은 실패에서 탄생했다.
스펜서 실버는 강력 접착제를 개발하려다 실패했다. 약하게 붙었다 떨어지는 이상한 접착제였다. 하지만 3M은 이 실패를 버리지 않았다.
아트 프라이가 이를 활용해 포스트잇을 만들었다. 지금은 3M 매출의 핵심이다.
"우리는 실패를 '아직 용도를 찾지 못한 발명'이라고 부릅니다." - 3M 연구소장
실패의 재정의
토마스 에디슨은 전구를 발명하기까지 1,000번 실패했다. 기자가 물었다. "1,000번이나 실패한 기분이 어떻습니까?"
에디슨의 대답: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전구가 작동하지 않는 1,000가지 방법을 발견했을 뿐입니다."
이것이 21세기 리더십의 핵심이다. 실패를 실패로 보지 않고 학습으로, 성장으로, 혁신의 재료로 보는 것.
오늘부터 시작해보자. 팀 미팅에서 이렇게 말해보는 것이다.
"이번 주에 가장 크게 실패한 사람 손들어보세요. 그리고 무엇을 배웠는지 공유해주세요."
처음엔 어색할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깨달을 것이다. 실패를 자랑하는 조직이 결국 가장 크게 성공한다는 것을.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리더, 실패에서 배우는 조직. 그것이 미래의 경쟁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