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는 내게 처음 만난 ‘연출 없는 세계’였다."
국민학교 입학식 날,
나는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책가방을 메고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그날 오후, 나는 다시 경상남도 합천의 촬영장으로 돌아갔다.
나에게 입학식은 잠깐 들렀다 가는 ‘장면’에 가까웠고,
진짜 세계는 여전히 영화 촬영장이었다.
그해 나는
6·25 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죄 없는 병사들〉에서
주인공 ‘김혁’ 역을 맡았다.
필름으로 촬영하던 시대였고,
합천에서 6개월 동안 올로케이션 촬영을 했다.
(이 영화는 결국 내가 국민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크랭크아웃을 했다.)
그래서 나는 입학식만 하고,
1학년 1학기를 통째로 학교에 가지 못했다.
6개월 뒤,
1학년 2학기에 처음으로 학교에 가던 날이 왔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학교가 어떤 곳인지 제대로 몰랐다.
세상 모든 어른과 아이가
나처럼 연기하며 살아간다고 믿던 시기였으니까.
입학식에서 잠깐 본 몇 명의 친구들은 나를 기억했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내가 전학생이라고 생각했다.
교실은 나를 알지 못했고,
나 역시 교실이라는 세계를 알지 못했다.
더 큰 문제는
학교를 촬영장처럼 이해했다는 점이었다.
첫 수업 시간.
아이들은 조용히 앉아 있었고,
선생님은 칠판에 글씨를 적고 있었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며
아주 솔직하게 이렇게 생각했다.
“이 장면은 언제 컷 하지?”
그리고 아무 말도 없이
그냥 운동장으로 뛰어나갔다.
촬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컷도, 액션도, 카메라도 없었다.
나에게는
연출 의도가 없는 장면은
머무를 이유가 없는 공간이었다.
당시 1학년 담임이셨던
장인자 선생님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수업시간에 사라지는 아이.
말없이 운동장으로 나가는 아이.
교실에서 10분도 앉아 있지 못하는 아이.
결국 선생님은 어머니께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문혁이는 학교에 적응을 못 하고 있습니다.
유급을 고민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큰 충격을 받았다.
선생님도 마음이 무거웠다고 한다.
하지만 두 분 모두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 아이를 학교라는 세계에 적응시켜 봅시다.”
어머니의 꾸준한 지도,
선생님의 인내와 훈육 속에서
나는 천천히 학교의 규칙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해의 유급은 아슬아슬하게 피하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학교를 촬영장이라고 착각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내게 세상은 늘 대사와 감정과 카메라로 움직였고,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는 이유는 대부분 ‘역할’ 때문이었다.
학교는 처음 만난 “연출 없는 세계”였고,
그 세계를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깨달았다.
세상은 하나가 아니었다.
촬영장의 세계와,
촬영이 아닌 진짜 세계가 있었다.
그 두 세계 사이에서
나는 처음으로 ‘문혁’이라는 이름을
내 역할과 분리해 바라보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그때 운동장으로 뛰어나갔던 장면은
내 어린 시절 전체를 상징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연기의 세계에서 자랐고,
학교는 그 세계와 처음 부딪힌 현실이었다.
그 충돌 속에서
나는 천천히 자라기 시작했다.
배우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