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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이아 Nov 26. 2021

썼다 지웠다

한 권을 채우자

마감날이 되면 부끄러운 듯 뭉툭한 원고를 내놓는 작가님들이 항상 신기했다. 전업작가도 아닌데 바쁜 시간 쪼개가며 어떻게 저 분량의 글을 쓰는 걸까. 언제 어디서든 고찰을 할 수 있는 집중력을 가지셨나? 영감이 송송 솟아나나? 나 몰래 48시간을 사시나? 아무리 글은 작가가 아닌 마감이 쓰는 것이라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모습은 언제 봐도 신기하다.


"어떻게 그렇게 글이 나와요?" "다 마감 덕분이죠." "거짓말하지 마요. 어딘가 이야기보따리 숨겨놨죠?" "어허, 선생님 또 이러시네. 궁금하면 직접 써보세요. 마감신이 도울 거예요."


그 좋다는 마감신을 만나기 위해 없는 마감을 만들어내야 했다. 어떤 마감이 좋을까 고민하다 그중에 가장 무섭다는 유료 마감(워크샵)을 등록했다. 친절하고 다정한 선생님도 좋지만 주위가 산만하고 합리화가 가득한 나에겐 무섭고 FM인 선생님이 이제껏 잘 맞았다. 그런 선생님이 칭찬해줄 때가 제일 신났다. 그러니 이번에 만날 마감신은 무서운 마감신으로 부탁합니다. 좋아. 시작까지 한 달이 남았으니 그동안 조금씩 글을 써두면 되겠지.


하나도 안 썼다.


워크샵 첫날에 다음 주까지 PDF를 제출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망했다. 아니지, 괜찮아. 나에겐 무서운 마감신이 있잖아? 머리채든 멱살이든 잡히면 어떻게든 될 거야. 


분명 마감신이 머리카락이나 옷깃을 잡고 있는 느낌인데도 글이 써지지 않았다. 마치 좋아하는 사람에게 줄 편지를 썼다 지웠다 하는 것처럼, 몇 줄 조심스레 적었다가 지웠다가 했다. 깜박이는 커서가 좀 내려가는가 싶더니 다시 제위치로 오기를 반복했다. 이 얘기는 재미없고 이 얘기는 너무 부정적이고 이 얘기는 결말을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고 이 얘기는 너무 개인적이잖아.


뱉어버린 말은 주워 담을 수가 없어 뱉기 전 항상 조심스러운데 발행해버린 글은 더욱더 주워 담을 수 없어 발행 전 얼마나 조심해야 하는가. 이건 고양이파가 저 사실 멍멍이 파입니다 하는 것보다 심각한 문제란 말이다. 노트북을 째려보며 한숨을 쉬었더니 방에서 룸메가 나와 맥주캔을 하나 내밀었다. 초보 창조자들은 긴장을 풀어줄 필요가 있다고. 자신도 초보일 때 내 작품이 어떻게 보일까 얼마나 잘해야 할까 머리가 너무 복잡했는데 마감 전날에 에라 모르겠다 하고 맥주 한 캔 하고 앉았더니 긴장이 풀리며 술술 나오더라고.


"살짝 취한 상태로 부르면 마감신이 더 빨리 오지 않을까요?"


예술가들은 술을 좋아한다더니. 그 세계에 발을 들이려면 나도 마실 줄 아는 놈이 되어야 하는 것인가! 오랜만에 마신 술은 원래도 낮았던 알콜 역치량을 넘었고 거의 눈을 반쯤 감은 상태로 손을 움직였다. 맥주 한 잔 정도 마시면 주사가 나오는데, 그날도 그렇게 주사대로 잠이 들었다.


"그래서 마감신이 도와줬어요?" "알콜 부스터를 썼죠. 취한 상태로 부르니까 놀라서 달려오시던데요." "벌써 고급 스킬을 쓸 줄 아시다니. 대단한데요?" "근데 너무 힘들어서 안 하려고요." "얼마나 마셨는데요?" "한 캔이요." "아.. 맞아요. 저도 나이 드니까 이제 잘 못 마시겠더라고요." "그 대화 방향, 틀렸어요." "괜찮아요. 솔직해져도 돼요." "아니라니까요. 원래 못 마신다니까."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던 글이 마감전에 채워졌다. 너에게 줄 편지가 완성되었다. 아직 술냄새가 남아있으니 잠깐 햇볕에 놔두었다가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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