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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이아 Dec 07. 2021

밥 아저씨

한 권을 채우자

세상에 호기심이 많아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던 어린 나를 앉은자리에 고정시킨 건 디즈니 만화가 아니라 밥 아저씨였다. 우연히 켜져 있던 티브이에 복슬 머리 아저씨가 참 쉽죠하며 그림을 슥슥 완성해가는 게 너무 신기했다. 그저 붓 한번 휘두르고 나이프 몇 번 휘둘렀을 뿐인데 호수가 되고 숲이 되고 바다가 되었다. 신세계. 그것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밥 아저씨는 그림만 그리는 게 아니라 여러 인생 조언을 해주었는데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진 몰랐지만 좋은 말이라는 건 알았다. 한 번씩 아저씨의 셔츠 주머니에서 청설모가 나와 돌아다니는데 그게 또 그렇게 귀여웠다. 


엄마에게 나도 저렇게 그리고 싶다고 미술학원을 졸랐다. 저렇게 유유자적하게 마법을 부리며 청설모와 함께(이게 본심이었을 거다) 하는 생활을 하고 싶었다. 매일 친구들과 우당탕 뛰어놀며 어딘가 하나씩 다쳐오는 딸이 미술을 배우고 싶어 하다니. 엄마는 옳다구나 싶었다. 다음날 엄마의 손을 잡고 도착한 곳은 어린이 눈높이 미술학원이 아닌 전문 작가님이 활동하시는 화실이었다. 엄마, 밥 로스 아저씨가 되고 싶다곤 했지만 밥 로스 아저씨와 같은 환경에서 시작할 필욘 없었는데. 


낮은 테이블, 공주 공주 한 스케치북, 휘황 찬란 크레파스가 아닌 이젤에 고정된 수채화지와 물감이 짜여있는 팔레트로 처음 그림을 만났다. 작가님의 작업실 한 켠을 쓰는 작은 공간이었고 나와 입시 준비 중인 언니들과 나이 지긋한 어르신과 그림을 그렸다. 작가님은 늘 작품 준비로 바쁘셨지만 원생의 질문에 꼼꼼히 대답해주셨고 정성 들여 그림을 봐주셨다. 꼬꼬마인, 그림도 처음 그려보는 내가 원생들 사이에서 혹시나 의기소침할까 봐 소질이 있다며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잘한다고 칭찬을 퍼부어주셨다. 거의 물통에 붓을 부딪히며 물기만 털어도 칭찬해주셨다. 그 방법은 성공적이었고 칭찬이 전부인 어린이는 대가로 한 자리에 몇 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 4절지 풍경화 하나를 완성할 수 있는 참을성을 갖게 되었다. 실력이 그리 좋지 않았던 기억으로 봐서는 엄마와 작가님의 계략이었던 거 아닐까.


참을성은 화실을 그만두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색에 대한 이해도가 생겨 필요로 하는 곳에 잘 써먹고 있다. 덕분에 시야가 넓어지고 다양한 세상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책도 만들 수 있게 되었고.  밥 아저씨가 말했던 "여러분이 그리시는 작품은 점점 나아지고 나아지고 나아질 겁니다."처럼 내가 앞으로 그려갈 작품은 점점 나아지고 나아지고 나아지길. 참, 좋아하는 색은 #ffbb01이다. 역시 색상코드는 외우기 쉬운 게 짱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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