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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이아 Dec 08. 2021

안경

한 권을 채우자

시력이 안 좋은데 안경은 안 쓴다. 왜. 강동원도 안 쓰고 다닌댔다 뭐. 아예 안 보이는 건 아니라 일상생활에 불편함이 없고 가끔 보기 싫은 건 자동으로 블러 처리돼서 편하다. 이 적당히 흐린 시야에 적응되어 버렸다. 사람을 확인할 때 미간을 찡그리는 것도 적응되어 버렸고. 전시를 보러 가거나 페어를 가는 등 시력이 필요할 땐 일회용 렌즈를 낀다. 그땐 세상이 쨍하게 보이는데 어우. 흐리멍텅했던 내가 갑자기 선명해진 기분이라 적응이 안 된다. 어둠의 자식이 햇빛 쨍한 곳에 서 있는 느낌이다. 숨을 데 하나 없이 마음속까지 다 선명하게 보여버릴 것 같아 무섭다. 나는 반듯반듯한 것보다 좀 흐물흐물한 게 어울리는데.


좋은 게 좋은 거라 주어진대로 상황에 잘 적응한다. 처음 샀던 노트북은 12살에 생을 마감했다. 버퍼링이 생기고 로딩이 길어져도 잘 썼다. 유튜브 자동재생을 켜놓고 널널이 작업했다. 구매 당시 미래 지향적인 디자인이라며 사이버틱한 와인색이 반짝였던 녀석이었다. 녀석과 안녕하고 한동안 회사 노트북을 이고 지고 다니다가 올해 초 반백수가 된 기념으로 노트북을 하나 샀다. 디자인 시안을 고르듯 여러 개를 따져보다 '처음 본 게 제일 낫네요.'란 마음으로 데려왔다. 데려온 하얀 아이로 지금 글을 쓰고 있다. 알지 노트북아? 저게 너의 미래의 모습이란다. 긴 시간 잘 부탁해.


결혼하고 일을 관두었던, 친했던 언니와 오랜만에 연락이 닿아 집에 초대받았다. 내년이면 벌써 아이가 초등학생이 된다고.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는 질문에 책 만들고 산다 하니 놀란 눈이었다. "헐. 진짜? 엄청 대단하네. 근데 너랑 진짜 잘 어울린다. 너 맨날 책 끼고 다녔잖아. 독서모임도 하고. 결국 사는 거에 지쳐 만드는 거야?" "어오. 아니야, 언니. 나는 그냥 나부랭이고 어디 가서 그런 말 하면 매장당해." 언니가 내려준 홍차가 적당히 식어 손을 대기 딱 좋은 컵 온도였다. 아이가 방에서 놀다가 로봇을 들고 나와서 엄마 옆에 앉았다. "그럼 어떤 책 만들어?" "일단은 될 대로 돼라 하고 해보고 싶었던 거 다 해보는 중이야. 할수록 책 분야가 엄청 다양한 게 눈에 계속 들어오더라고." "엄마, 이 이모는 케세라 세라야?" 아이는 고급 어휘처럼 보이는 케세라 세라를 말하고 싶었던 눈 친데, 이게 틀린 말은 아닌데, 맞다고 하면 계속 왜곡된 뜻으로 알고 갈까 봐 조용히 방으로 가서 이모와 함께 놀자고 했다.


안경을 쓰지 않으면 이점보다 불편한 점이 더 많다. 정확한 분간이 힘들어 계단 끝이 구분 안된다거나, 메뉴판이 벽에 붙어있는 식당에선 일어서서 봐야 한다거나, 굴러가는 비닐봉지를 보고 고양인 줄 알고 쫓아간다거나 등등 하지만 내 눈에 모든 너가 예쁘고 잘생겨 보이는 이점이 있다. 그거면 됐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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