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야기 #7
내가 당신에 대해 다시금 떠올리게 된 건 동명이인의 책에서였다. 나와 동명이인인 그 작가는 그 존재를 무척이나 싫어했었나 보다. 죽여버리고 싶다는 표현이 적혀 있었다. 사회적으로 당신과 나와의 관계도 평범하진 않았다. 하지만 원체 남에게 관심 없는 사고방식을 가진지라 당신이 나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은지 몇 날 몇 달이 지나도 별로 떠올리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내가 성인이 된 후 떠올린 기억의 당신은 그냥 잘생긴 얼굴 하나였다. 어렸을 적 기억이라 미화되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기억에선 키 작은 장동건이었다. 엄마도 당신이 잘생겨서 결혼했다고 했으니 완전히 미화된 건 아닐 거다. 피는 물보다 강하다는데 나는 왜 안 잘생겼는지 아쉬울 뿐이다.
나에겐 어렸을 적 기억이 조각조각 있다. 한밤중에 갑자기 미술학원이 가고 싶어서 몰래 집을 나갔던 일, 택시를 탔는데 문을 제대로 닫지 않은 채 출발해서 문이 덜그럭 거렸던 일, 연못이 있던 마당에서 잉어를 사냥하는 고양이를 보며 울었던 일, 학교 앞에서 파는 병아리를 사다가 닭으로 키웠던 일.
이 많은 기억에서 당신은 없었다.
몇 조각 당신의 기억이 있는데, 당신이 기억난다기 보단 당신의 방이 기억난다. 그 방에는 내 키의 몇 배나 되는 책장들이 있었는데 거기엔 언제나 정리되지 않은 무수한 책들이 꽂혀 있었다. 읽는 것 자체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던 나는 키가 허락하는 만큼의 책을 뽑아 들어 무작정 읽었다. 당신의 취향은 고집이 없었고 책장 정리에도 고집이 없어서 덕분에 나는 다양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이해하지 못하는 시사교양 책부터 가벼운 유머집, 역사집, 세월의 흔적이 묻어있는 문학집까지 많은 책들이 즐비했다. 내가 아무렇게나 읽고 아무렇게나 꽂아놓아도 당신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당신도 그렇게 하기 때문이었다.
가끔 당신의 큐레이션이 있을 때도 있었다. 물리 선생님이었던 당신은 과학책이나 수학책을 몰래 내 눈높이에 꽂아두곤 했는데 당신의 딸이 같은 관심사의 책을 읽었으면은 하지만 질문 요정의 끝없는 물음표에는 대답하기 귀찮았던지 내가 책을 꺼내 읽으면 다른 방으로 도망가곤 했다. 지구 끝까지 따라가서 질문하다가 꿀밤을 맞았던 기억도 있다. 다음날 책장에는 지구과학 용어 사전이 꽂혀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집순이 기질이 있었던 나는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과 어디 놀러 갈 생각보단 집에 돌아와서 그 방이 오락실이 된 것처럼 틀어박혀 있었다. 책장 위의 책들이 탐나서 기어 올라가다가 책장이 넘어질 뻔한 적도 있고, 넘어지지 않게 조심히 꺼낸 윗단의 책이 금지된 사랑을 다룬 글이라 엄마를 기겁하게 한 적도 있다. 당신은 문학인데 어떠냐며 소심하게 내 편을 들어주었다.
내가 자라면서 그 방에는 당신이 학교에서 가져온 컴퓨터가 자리를 잡았다. 여느 직장인들이 그러하듯 당신도 업무를 핑계로 게임을 즐겼고 자연스럽게 나도 옆에 앉아서 구경했다. 화면 속 책과는 또 다른 생생한 세계가 펼쳐진 모습에 매료되었고 곧 당신과는 형제처럼 서로 자기가 컴퓨터를 독차지하려고 유치하게 싸웠다. 나는 지금도 게임을 잘하지 못하는 편인데 그때는 손도 작아 키보드를 잘 못 눌러서 언제나 당신의 놀림감이었다. 체구는 쪼그만 게 지기 싫어하는 성질은 있었던지 빽빽 거리며 당신이 퇴근하기 전까지 열심히 연습했던 기억이 있다. 나의 이글거리는 열정에 못 이겨 결국 당신은 컴퓨터를 하나 더 가져와서 설치해주었고 본격적인 대결 상태에 들어서게 되었다. 내가 블리자드를 처음 만나게 된 건 당신 덕분이었다.
한 가지에 집중하면 주변을 전혀 돌아보지 못하는 뇌구조를 가져서 인지 나만의 책 세상, 나만의 컴퓨터 세상을 가진 이후로는 또다시 당신에 대한 기억이 흐릿하다. 분명 그 방에 대한 기억은 또렷하고 그 방이 당신의 서재였다는 사실도 또렷한데 어째선지 당신의 모습은 뜨문뜨문하다.
지금 와서 새삼스럽게 당신이 그립거나 하진 않다. 가끔 이렇게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이 된다. 누군가에게는 당신이 그런 존재이진 않겠지만 나에게는 그런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