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내가 최선이면 좋겠다.

서로에게 서로가 최선의 선택지였음을 바라는 집사의 바람을 가득 담아서,

by 타이타

28. 싱가포르, 갈 수 있을까? - 3



"애들 밥, 간식은 여기 있고요, 아 또 엘리 약은 여기 있어요. 그냥 목에 꾹 누르시면 되고, 또... 혹시 필요하시면 요기 카드 쓰셔도 되니까..."


누가 보면 여행을 가는 게 아니라 혹한기에 군 훈련소에 끌려가는 모양새였다.

한숨도 자지 못해서 퀭한 얼굴 위로 겨우 펴 바른 파운데이션이 그나마 나의 얼굴을 사람처럼

보이도록 만들어 주고 있었다.


이 이상으로는 준비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만만의 준비를 마쳐 두었지만,

처음으로 오둥이를 두고 일주일 정도의 시간을 떠나야 한다는 게 막상 당일이 되니

여행의 신남이 아닌 걱정과 미안함으로 다시 변질이 돼버린 상태였다.


현관에서 발을 떼지 못하는 나를 본 이모가 피식 웃으시며 캐리어 위로 손을 올리시더니,

내 손을 꾹 잡아주시며 인자한 어른의 미소를 지어 보이셨다.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여행 시작인데 웃으면서 출발해야죠?"


기민한 오둥이인 만큼, 가족이 집을 나선다는 걸 금세 눈치챈 듯 오둥이는 각자의 자리에 앉아서

우리 가족을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다.


막내인 루시와 엄마인 지바의 표정이, 마치 "너네 우리 두고 어디 가니? 금방 오지?"

라는 물음을 건네는 것 같아 쉬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고, 물 먹은 솜이불처럼 무거운 나와 가족의 발걸음이

현관문의 쿵 소리와 함께 오둥이와의 짧은 이별의 스타트를 알렸다.



다녀올게, 얘들아.
5일 뒤에 만나자.






띠링-


공항에 도착할 때쯤, 이모에게서 사진 한 장이 도착해 있었다.

아이들이 각자 간식을 하나씩 물고 거실에 앉아서 제법 평온한 오전을 보내고 있는 모습이었다.


"거봐, 애들 괜찮다니까. 지들 집에 있으니까 크게 겁내지도 않네."


약간은 서운한 마음이 들 정도로 멀쩡해 보이는 오둥이가 담겨있는 사진.

그리고 아이들과 몇 백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이제는 수 천 킬로미터를 더 떨어져야 하는 나.


복잡 미묘한 감정을 끝으로 공항의 주차장에 들어서 짐을 내리고, 수속을 밟고, 짐을 부쳤다.

그때까지 휴대폰을 10분마다 한 번씩 확인하는 나를 본 엄마가, 도깨비 같은 표정으로 휴대폰을 낚아챘다.


너 휴대폰 금지.
비행기에서 내리면 줄게.


초등학생이 벌을 받는 것도 아니고, 갑작스러운 휴대폰 압수에 항변하듯 웅얼거렸지만,

엄마 옆에 나란히 서서 고개를 주억거리는 동생들의 모습에 결국 항복을 선언하듯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이미 공항이야. 비행기 타는 것 말고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그러니까 그냥 웃어, 즐기자고."


오둥이를 향한 걱정이나 불안이 그 말 한마디에 쉬이 꺼지지는 않았지만,

맞는 말이었다. 지금의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그것뿐이었으니까.


'그래, 이왕 여기까지 온 거... 그냥 즐겨보자!!'


무언의 결심을 속으로 삼키며 그때부터 나의 진정한 여행이 시작되었다.


공항의 시작부터 끝까지 부지런히 휘젓고 다니며 면세점과 맛집을 여기저기 쑤시고 다녔고,

그렇게 오후를 넘어설 무렵, 드디어 몇 년만의 비행기에 오르며 싱가포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부재중 전화 5건, 문자 15통]



싱가포르 공항에 내려 수속을 마치고 호텔로 향하는 길에 켠 휴대폰이 경고음처럼 울려댔다.

한국과의 시차를 생각하면 거의 12시를 넘은 시간인데, 수두룩하게 쌓여있는 연락들은...


하나같이 모두 이모에게서 온 것이었다.



"이모 무슨 일이에요, 대체...!"


전화를 걸자마자 들려오는 건, 복도를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들리는 오둥이의 짖는 소리와,

성이 난 사람들의 민원 소리, 그리고 삐비빅 거리며 비밀번호를 틀리는 소리였다.


"잠깐 나갔다 왔는데, 비밀번호를 까먹었어요..."


이유는 몰랐지만, 밤늦게 잠시 밖을 다녀오신 이모가 5번이 넘게 비밀번호를 틀리시면서,

겁을 먹은 아이들이 왕왕 짖고 있는 모양이었다.


평소에도 크게 짖는 일이 없어서 이웃과의 트러블을 겪어보지 못했던 우리 가족이었다 보니,

성난 이웃의 소리를 뒤로하고 다급하게 비밀번호를 전해 드렸다.


그제야 아는 사람을 봐서 조용해지는 오둥이의 마음이 느껴지는 기분에

호텔로 돌아가는 싱가포르의 첫날밤은 그야말로 대 혼돈의 눈물바람이었다.




이모도 미안한 마음이 크셔서 그런지,

다음 날 직접 위아래 이웃집에 방문을 하셨다고 한다.


실은 이 집주인들이 잠시 여행을 가서 이모가 돌보고 있는데,

비밀번호를 까먹는 바람에 놀란 강아지들이 짖은 것 같다며 사과를 연신 드리고 오셨다고 한다.


며칠 뒤에 한국으로 돌아가서 우리 가족이 다시 한번 사과를 드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천성이 착하신 이모가 꽤 무거운 죄책감을 느끼고 계셨던 모양이었다.


밤에 외출을 하신 이모를 원망하기도 했던 나 자신이 많이 부끄러워지는 여행의 첫날밤이었고,

두 번 다시는 아이들을 두고 집을 떠나지 않으리라 결심하던 여행의 첫날밤이었다.


이제 겨우 첫날밤이라는 사실이

잔혹하리만치 우리 가족에게 와닿았다.


세상에, 맙소사.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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