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1년을, 어쩌면 그 이상을 미뤄온 군대에 대한 나의 첫 글... 아마 이 글은 군대에서 내가 배운, 내가 잊지 말아야 할 몇가지 일들에 대한 기록이고 다음 글은 군대라는 조직에 대한 내 전반적 견해이지 않을까 싶다. 물론 바로 다음 글이 이 글의 속편이 아니라 전혀 다른 주제일 가능성이 크지만...
오늘 카톡을 정리하다 아주 재밌는 카톡을 봤다. 2022년 11월, 신병, 이병 도향이 분대장인 상병 이상민에게 영점 사격 신청 사실에 대해 분대장 결산을 올린 카톡이었다. 그때 당시 병장 짬인 사람 중엔 단 한명도 병장이 없었다. 전부 풀진급누락에, 아예 중대 통틀어서 정상 진급을 한 사람이 딱 한명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마저도 본부중대에서 활동을 하는 정훈병 유민혁 상병. 내가 속해있던 1사단은 파주의 FEBA부대, 그러니까 GOP 바로 후방에 있는 전방 부대에 속했다. 뭐, 사세한 내용은 이쯤에서 접어두도록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자. 크게 2가지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악재의 가장 아픈 요소는 걱정이라는 것에 대해, 그리고 정답은 죄송합니다에 대해이다.
안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걸 인지하면, 주로 실제 경험해보면 "할 만한데?"라는 생각이 든다. 다시 말해, 걱정이 가장 고통스러운 부분이고, 실제로 해보면 "좆밥"이다.
다들 알다시피 난 만창을 다녀왔다. 군기교육대에서 15일. 이 판정을 받은건 아마 2023년 3월 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영창을 간건 5월 중순이었는데, 이는 합참 검열 훈련을 끝내고 가라는 뜻이었다. 내 생일을 영창에서 보내다니, 그리고 보상으로 받는 대대 전원 전투휴무 조차 누리지 못하다니, 이건 보급관 고준혁이 나를 세배로 엿먹이는 판타스틱한 이벤트였다. 징계위원회에 소집될 것이라는 걸 깨달은 당일, 나는 오열하며 흡연장에서 땅을 치며 7개월간 한 금연을 끝낼 수 밖에 없었다. 당시 PX에는 국산 담배만 있었는데, 천사 선임 김주환이 말보로 레드를 한 3-4대 정도 준것으로 기억한다. 전출을 갈 것이라는 불안감, 군생활이 무려 0.5개월이나 늘어났다는 좌절감, 어쩌면 빨간줄이 그일지도 모르는 상태, 미국으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너무나 많은 일들이 한번에 닥쳤다.
결론만 말하자면 내 군생활의 하이라이트는 이 만창이었다. 정말 감사하게도 군기교육대 교관분들은 나를 좋게 봐주셨고, 무엇보다 내가 꿈에 그리던 무한 독서시간이 부여됐다. 덕분에 나는 전역할때 목표였던 18권 이상인 20권을 읽을 수 있었다. 군기 교육대에서 12가지 인생의 법칙을 포함한 5권의 책을 읽지 못했다면 아마 지금 나는 조금은 다른 사람일 것이다. 또한, 군기교육대에서 만난 조교님은 아직도 자주 생각나는, 잊지 못할 감사한 은인 중에 한명이다.
모든 땅개, 육군이 공감할 수 있는 얘기를 해보자면 훈련이나 특히 행군에 대한 이야기이다. 행군 일자에 어떻게든 휴가를 끼워 맞춰보려고 도박식 휴가 신청을 올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어김없이 행군은 갑자기 일정이 잡히거나 원래 잡힌 일정이 미뤄지는게 일상이었다. 군장을 메고, 방탄 조끼와 헬멧을 쓰고, 총을 메고 30키로 행군, 그것도 매우 가파른 북한과의 국경을 눈과 비를 맞으며 걸었다. 영하 20도면 취소된다, 비가 오면 취소 된다, 눈이 오면 취소된다, 전부 개소리였다. 진눈깨비가 왔지만 행군은 출발했다. 2주 전부터 걱정이 됐다. 모두가 서로에게 약속을 했다. "야! 1키로때 내가 열외할테니까 너도 같이 열외해야된다!" 이 말은 즉, 모두가 30키로 행군을 오전 6시에 완료해서 녹초가 된 상태로 생활관에서 다시 만나자는 얘기였다.
"행군","혹한기","FTX". 전부 군필자에겐 개빡치는 단어들이다. 하지만 기억을 되짚어보면, 훈련 전에 '아, 이번 훈련 개힘들겠다'라는 생각이 우리를 더 힘들게 했다. 막상 훈련에 참여하면 윗대가리들끼리 서로 짜고 치는 게임이기 때문에 죽기 직전까지 내몰지 않는다. 행군은 정말 "그만둘까"라는 생각도 안들고 '좀 힘들긴 한데 할만한데?'라는 생각이 50퍼센트까지 우리를 걷게 했고 '이까지 했으면 돌아가는게 아깝다'라는 생각이 나머지 반을 차지했다. 발이 아프거나, 어깨가 아프거나, 둘 중에 하나였다. 우리 대대는 특히 야간 행군에, 내가 속한 소대는 융통성 없는 소대장 때문에 대화도 하지 못해서 괴로운 기억이다. 하지만 누가 머리에 총을 갖다 대고 하라고 하면, 할 수 있다. 누가 100만원을 준다고 하면 할것이다. 한마디로, 걱정이 더 힘들었다. 다른 훈련들도 마찬가지다. 2박 3일 숙영, 무박 훈련을 한다고 해도 실제로 해보면 할만했다. 훈련이 시작되기 전 걱정이 더 힘들었다. 나한텐 일련의 개같은 경험과 걱정이 참 좋은 교훈을 줬다. 앞으로도 개같은 상황이 닥칠 것이라는 걸 알면, 실제로 해보면 좆밥이겠지라는 마인드로 마주칠 수 있다. (이게 안되는 경우는, 주로 예상치 못하게 코 앞에 닥치는 일이다. 이를 테면 얘기치 못한 누군가의 죽음 또는 사랑하는 이의 급작스런 이별통보).
정말 간단한 진리인데, 대한민국의 최소한 절반은 이 말이 뭔지 모른다. 다른 말로, 지금 내가 하는 말만 똑바로 알아 들어도 당신은 다른 미필들이나 당나라 군대 다녀온 이들보다 우위에 있을 것이다. 군대를 안 갔다온 사람은 닥치고 죄송합니다가 무슨 소린지 단 1도 이해를 못할것이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사회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다. 부당한 일이 있으면 바로 잡아야하고, 내가 방관자여도 부분적 책임이 있다. 하지만 실제 사회는 더럽고 치사하고 부당하다. "평등함"이 강조되는 이유는 실제 세상이 전혀 평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당연한걸 바로 잡으려 하지 않는다. 실제로 존재하는 부당함을 바로 잡기 위해 교육을 하는데, 평등의 중요성은 항상 강조된다. 이 이유는 실제로 사회에 나가보면 모든 이에게 계급이 있다는 걸 깨닫기 때문이다. 부장 밑에 차장, 차장 밑에 과장, 과장 밑에 대리, 대리 밑에 주임, 주임 밑에 사원, 그리고 그 아저씨 사원 밑에 학생, 그 학생 밑에 저학년, 등등. 참고로 부장 위로는 한도 끝도 없다. 부사장, 사장, 회장, 대주주, 시장, 국회의원, 대통령, 그 위에도 누군가가 있다. 이 계급은 없애려고 없앨수도 있는것도 아니고 없앤다고 마냥 이 세상의 모든 문제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뭘까?
바로 그 순리에 저항하지 않고 따라서 사는 것이다. 정확히는 그 큰 구조를 파악하고 그 누구보다 충실하게 그 이점을 잘 활용하는 것이다. 큰 무리의 가장 말단 꼬리가 지랄 염병을 싸봤자 그만 비난 당할뿐, 실제론 우두머리가 한 무리의 "문제"가 무엇인지 정하고, 어떻게 할것인지에 대해 결정한다. 그렇다면 상관에게 꾸중을 들을 것 같다면, 혼나는 상황이라면 뭘 해야할까? 바로 닥치고 죄송합니다이다. 이건 꽤나 슬프지만 나름 효과적인 치트키인데, 한번은 내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해 행정반에 불려가 30분동안 혼난 적이 있다. 전혀 다른 사람이 한일을 내가 했다고 착각한 듯한 상황이어서 당연히 억울했지만, 닥치고 죄송하다고 했다. 닥치고 죄송합니다만 반복하고 땅바닥을 처다보고 이 세상의 모든 죄는 이 미천한 멍청이가, 도향이 지었다고 생각해야한다. 어제 갑자기 바르샤가 레알을 4대0으로 이긴 것도 내가 숨을 쉬어서이고, 오늘 병기관의 아내가 점심시간에 그에게 전화로 화를 낸것도 전적으로 내 잘못이다. 당직 사관의 라면이 1분만에 다 안 익은것도 내 잘못이고 먹고 싶은데 너무 뜨거워도 내 잘못이다. 지가 처 먹으려고 했다가 지 입천장이 다 까이면 나는 사형이다. 그러니까 닥치고 죄송하다고 해야한다. 이건 꽤나 좋은 마인드셋을 가지게 해주는데, 나중에 사회로 나오게 되면 꽤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군대에선 내가 하지도 않은 짓을 책임져야한다. 하지만 밖으로 나오면, 내가 하지 않은 것들은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 그러므로 내가 한 것에 대해선 정말 최선을 다하고 책임을 져야겠다는 마인드셋이 생긴다.
아직 본인이 군대를 가지 않았더라면, 사회생활을 안해봤다면, 이 치트키를 알고 있는것은 아주 큰 강점이 될것이다. 기억해라. 니 잘못이 아니지만, 닥치고 죄송하다고 해라. 그래야지 살아남을 수 있다. 그래야지 1년동안 밉보일게 1시간으로 끝난다. 상관은 니 상황에 대해 1도 안 궁금하다. 단지 지금 니가 내 앞에 있을 뿐이고 내 기분이 개같고 나는 너한테 이렇게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이니까 너한테 화풀이를 좀 하는 거고, 너는 충실히 샌드백 역할을 해주면 된다. 물론 난 이게 싫어서 한국에서 회사 생활을 할 생각은 없지만, 만약 하게 된다면 그 누구보다 대가리를 박고 죄송합니다를 잘할 수 있다. 익숙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