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은 인간관계를 극복하는 법
사람을 대하는 일을 한다는 건 참 어렵다. 기사는 사람으로부터 소스가 나오고, 사람을 통해 팩트 체크를 한다. 그래서 늘 항상 취재원들과의 관계를 형성하고, 그들로부터 정보를 얻으며, 그들에게 나 역시 내가 가진 정보를 전해주며 관계를 이어간다.
그런 일하는 관계 속에서도 사람과 사람의 접촉인지라, 일을 뛰어넘는 개인적 관계가 형성된다. 힘든 일이 생기면 발 벗고 나서서 돕게 되고, 좋은 일은 함께 축하하는 그런 관계 말이다. 정보를 주고받는 관계가 아닌, 그냥 ‘지인’같은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내 직업군의 특성상 직장 동료와는 또 다른, 오묘한 인간관계에 놓이게 된다.
주기적으로 약속을 잡아 식사를 하고, 맥주 한 잔을 기울이며 깊은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서로의 사생활도 종종 공유하고, 자녀 문제에 조언을 해주기도 한다.
누가 봐도 '친근'한 관계다.
그런데 이 관계라는 것이 참으로 간사한 게, 지인이 되었다가도 결국 그와 나의 관계는 ‘원점’으로 돌아와야 하는 순간이 온다. 아무리 친한 지인의 탈을 쓰고 서로를 대한다 하더라도, 결국은 기자와 취재원, 혹은 기자와 당국자의 관계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일하는 관계와 개인적 관계의 간극은 그토록 늘 존재하는 것이다.
늘 웃으며 서로의 안부를 묻고, 필요한 일이 있으면 편안하게 전화해 요청하던 한 당국자가 있었다. 비슷한 나이대의 여성인 그분은 성도 나와 같고, 성품도 온화했다. 그래서 그나마 이 상막한 출입처 안에서 의지를 좀 했던 것 같다. 온전한 ‘지인’의 탈을 쓰고 관계를 이어온 지 벌써 1년여가 넘었다.
그런데 어제 그녀가 속한 그룹의 납득할 수 없는 사항을 알게 되었고, 난 그 사항을 그녀에게 문의하게 되었다. 사실 개인적 친분이 있기에, 솔직하게 다 말해주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친절한’ 설명이 가능할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착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평소와 전혀 다른 딱딱한 말투와 행동으로 나를 대했다.
당국자와 기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태도. 당연한 것일지 모르겠는데, 그 상황이 하루가 지난 오늘까지도 머릿속을 맴돈다.
결국 내가 맺고 살아가는 대부분의 관계는 한낮 겉껍질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보다. 난 기자라는 업을 가졌기에 일터에서 만나는 상대에게 좋은 얘기만 하며 살 수는 없는 태생적인 한계를 지닌다. 그런 순간에도 서로에 대한 믿음이 기저에 깔린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란 정말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인간관계로부터 상처를 받는 건 기자생활을 10년 넘게 해도 변하지 않는다. 믿었던 사람들에게 뒤통수를 맞고, 친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어려운 상황에 놓이면 뒤돌아서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그렇게 하루하루 버텨내는 삶.
결국 기자라는 업은 업을 벗어던지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참으로 덧없는 직업이다 싶다. 그럼에도 이 직업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사실 거창할 게 없다. 그 와중에도 정말 믿을 수 있는, 내 사람들이 단 몇 명이라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 굳이 내 사람이라 칭하지 않아도 영원히 내 편이 되어줄 내 가족들이 든든히 내 인간관계의 울타리가 되어주고 있기에, 상처를 받아도 금방 회복하고 또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다.
글을 써 내려가다보니 마음이 또렷해진다. 굳이 이런 일에 상처받지 말자. 매번 겪어도 매번 들쑤셔지는 마음이지만, 그래도 스스로 상처를 덮고 새살이 돋게 하자. 결국 이리 될 관계였다면 언젠가는 이리 되었을 관계이다. 상처받을 시간에 소중한 관계를 한 번 더 돌보자. 평생 기자를 할 생각은 없다. 그렇다면 결국 언젠가는 다 추억이 될 상처다.
그 수많은 관계 속에서 옥석을 가려내고, 소중한 관계는 더없이 단단하게 다지면 그뿐이다.
모든 사람에게 내가 소중한 관계일 수 없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