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원은 바지에 다리 한 짝을 집어넣으며 자신의 다음 행동을 계산했다. 일단 엄마의 존재를 확인하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엄마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어야겠다고 판단한 지원은 옷에 몸을 끼워 넣기가 끝나자마자 가방에서 자신의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최근 통화 리스트에서 ‘엄마’를 찾아 손가락을 그곳으로 향했다. 그러나 액정을 누르기 0.1초 전, 그녀는 흠칫 ‘엄마 휴대전화가 만약 집 안에서 울린다면?’이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순간 등골이 서늘했다. 그것은 전혀 예측할 수 없는데서 오는 두려움이었다. 엄마가 아직 이 집 안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엄마의 폰 역시 그녀와 함께 또는 그 근처에 놓여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 그런 상상을 하고 있는 자신이 역겨워졌지만, 현재 자신의 상황이 역겨운 것은 사실이었다.
그때, 머릿속에 오늘 교통사고로 알게 된 그 남자가 생각났다. 조금 전 자신을 집 앞에 내려준 남자. 자신을 지옥 같은 악취에서 잠시나마 일상으로 되돌려줬던 남자. 하준서. 그 사람이 머릿속에 떠오른 뒤 어쩌면, 그는 아직 멀리 가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는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우선 이 공간 안에 자신과 저 바깥의 악취 나는 남자 둘만이 존재하는 최악의 상황을 깨 부셔줄 수 있지 않을까.
지원은 휴대전화 맨 위에 찍혀있는 전화번호를 눌렀다. 고민할 틈이 없었다. 통화 연결음이 작게 이어졌다. 혹시나 그 소리마저 바깥에 새어나가진 않을까, 순간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아무런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악취는 여전히 문 가까운 곳에서 스믈스믈 흘러들고 있었다.
지원은 그 작은 통화 연결음을 들으며 오만가지 생각을 했다. 제발 그가 멀리 가지 않았길, 바쁘다던 그가 자신의 신변보다 일을 중요시하지 않길, 우선은 제발 전화를 받아주길 빌었다. 그 짧은 시간이 그토록 영겁으로 느껴졌다. ‘탈칵’ 그때, 휴대전화 저 편 어딘가에서 그와 연결되는 작은 마찰음이 들렸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크게 느껴지던지 본인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떤 지원은 가만히 수화기 너머에서 어떤 소리가 이어질지를 기다렸다.
“여보세요?”
그런데 그와 동시에 방문에 조심스러운 ‘똑똑’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쁘니? 혹시 안 바쁘면 잠시 나와서 믹스커피가 어디 있는지 좀 찾아줄 수 있겠니? 남의 집을 막 뒤져볼 수도 없고 말이지.”
지원은 얼어붙었다. 준서의 목소리에 대답조차 하지 못한 채 그저 딱딱하게 온몸이 굳어버렸다. 저 남자가 무언가 알아챈 건가? 그렇다기에는 통화음이 크지 않았는데. 방문을 넘어갈 정도의 볼륨이 절대 아니었다.
일단은 저 남자의 말에 대꾸를 하는 게 우선이었다.
“아. 아저씨, 잠시만요! 제가 옷을 갈아입고 있어서요. 화장도 지우고.... 그 윗 찬장 제일 가운데 문 열어보시면 믹스커피 통이 보이실 텐데요. 한 번 열어보시고 다시 말씀해 주시겠어요?”
“아, 그러니. 알겠다.”
문 밖 남자의 발소리가 조금 멀어지는 감이 있자, 준서가 휴대전화로 연결돼 있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지원은 액정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통화 연결 지속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너무나도 안도감이 몰아쳐서일까, 눈에 한가득 눈물이 고였다. 그 순간 뭐가 그렇게 갑자기 서러워진 건지, 눈앞에 뿌연 물기로 가득 찼다.
“여보세요?”
다시 건네진 4글자. 준서의 목소리에 한껏 움츠러든 목소리가 드디어 수화기를 타고 넘어갔다.
“도와주세요”
준서는 이제 막 강변북로로 진입하고 있었다. 그러다 전화가 온 걸 받기 위해 잠시 갓길에 차를 세워둔 상태였다. 평소였으면 무시했겠지만, 혹시나 회사에서 급한 전화가 온 거라면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뜻하지 않게 중요한 날 오전 내내 자리를 비우고 있는데, 전화까지 안 받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웬걸, 전화가 걸려온 곳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이었다. 조금 전 자신이 집까지 고이 모셔다 드린 교통사고 피해자, 강지원. 이제 겨우 헤어진 지 5분쯤 지났을까?
'연인들도 이렇게 까진 안 할 거 같은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 여자, 대체 자신에게 왜 이러는 걸까. 평소였음 짜증이 날 법도 한 상황이었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예측 불가능한 행동들이 오히려 조금 설레는 듯도 했다.
바디워시 이름을 언제까지 알려줄지 물어보려는 걸까. 한 번 더 미소를 짓고 그는 잠시 텀을 둔 뒤 수화기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그런데 예상된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누군가와 대화하는 소리가 흘러들었다. 믹스커피? 찬장? 뭔 상황인지 준서는 전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수화기 버튼을 잘못 눌렀나? 혹시나 싶어 다시 한번 상대를 불렀다.
“여보세요?”
“도와주세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녀가 도와달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는 갑자기 전화가 끊겼다.
도와주세요? 라니. 정말 의아해 잠시 준서의 모든 감각이 멈췄다. 어떤 판단도 이뤄지지 않았다. 도무지 지금 이 상황이 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준서는 잠시 생각했다. 일단, 그녀는 전화가 연결된 지 모르는 누군가와 일상의 대화를 나누었다. 옷을 갈아입고 있다며 누군가에게 커피를 찾는 방법을 설명했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갑자기 도와달라고 속삭이고는 전화가 끊어졌다.
일단은,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판단해야 했다. 어디가 아픈 것도 아니고, 위급한 무언가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경찰이나 소방서에 신고하기도 애매했다. 그렇다면 뭐지? 뭘 도와달라는 거지? 준서는 도통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녀의 전화를 무시하고 다시 회사로 향하기에는 어딘가 많이 찝찝했다. 자신과 조금 전 헤어진 그녀의 목소리는 자신과 대화를 나눌 때와 전혀 달랐다. 흔들리던 낮은 음성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 잠깐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준서는 일단 그녀에게 다시 전화를 해볼까 하다 멈칫 행동을 멈췄다. 속삭이듯 도와달라던 그녀는 자신과 통화 중인 사실을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으려는 듯 보였다. 그렇다면 자신이 다시 전화를 거는 것이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하... 어쩔 수 없나.’
준서는 갓길에서 깜빡이던 비상등을 오른쪽 유턴 등으로 바꿔 켰다. 그리고 차들이 신호대기 중인 틈을 타 차를 돌렸다. 일단 돌아가 봐야겠다. 무슨 상황인지 직접 확인하고 가야겠다는 판단이 서자 더 이상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준서의 차는 왔던 길을 되짚어 지원의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