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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위트랜드 Sep 03. 2024

레몬향이 나는 남자.

6.  지옥 같은 냄새

일단은 참아내고 있었지만, 더는 버티기 힘들었다.     


지원은 일단 이 남자와 한 공간에 있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돌아 집에서 나가자니, 모양새가 이상했다. 곧 갈 거라는 손님을 혼자 집에 두고 집을 비우는 게 누가 봐도 정상적인 형태는 아니었으니까. 일단 핑계를 대고 거실을 벗어나야겠다고 지원은 생각했다.       


“저는 잠시 화장실 좀... 편하게 계세요.”

“그래”            

   

지원은 걸음걸음 힘을 줘 걸어갔다. 괜히 휘청하는 모습을 보여 좋을 게 없었다. 저 앞에 있는 화장실 문이 곱절은 멀게 느껴졌다.      


숨을 잠시 참았다. 저 화장실 문을 열고 닫으면 잠시나마 저 역한 냄새와 멀어질 수 있었다.     


지원은 화장실 문 옆에 가방을 내려놓고, 차분히 화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문을 닫고 걸어 잠근 지원은 ‘후-’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말이지 상상도 못 한 냄새가 콧속을 순간 후벼 팠다.    

  

이건, 피 냄새였다.

그 누구도 아닌, 엄마의 피 냄새였다.      


엄마가 농사를 짓다 다치시면 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여주며 맡았던 그 피 냄새. 폐경을 맞기 전에는 한 달에 한 번씩 엄마에게서 나던 그 피 냄새. 유독 쇠 냄새가 짙어 피가 조금만 나도 지원은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지원은 얼어붙었다.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어 옴짝달싹 하지 못한 채 눈만 깜빡이며 스며드는 냄새만 무의식 중에 들이켰다.  

   

정확히 어디에서 나는 냄새인지 지원은 알지 못했다.      

하수구인 것도 같았고, 세면대인 것도 같았고, 욕조인 것도 같았다. 다만 냄새가 짙진 않았다. 옅게 스민 냄새가 아주 가느다랗게 코로 흘러 들어왔다. 10초쯤 지났을까, 피 냄새에 조금 익숙해지니 화장실의 다른 냄새들이 섞여 들기 시작했다.  

   

지원은 너무 두렵고 무서웠다. 하지만 이 냄새가 저 거실의 남자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지는 지금 당장 단정할 순 없었다. 엄마가 요리를 하다 다친 손을 욕실에서 씻어낸 것일 수도 있고, 화장실 어딘가 뾰족한 곳에 찍혀 피가 난 걸 수도 있었다.      


일단은 저 남자에게 자신의 뭔가를 알아챘다는 사실을 들켜선 안 된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지원은 고개를 두어 번 흔들고는 변기 물을 내렸다. ‘쏴’ 하는 소리와 함께 기존의 변기물이 흘러 내려가고, 새 물이 가득 차올랐다. 지원은 세면대 물을 틀고 손을 닦았다. 레몬글라스 향이 가득한 물비누로 손을 닦아내니, 옅었던 피 냄새는 레몬 향기에 덮이며 더 옅어졌다. 그러나 분명 사라지진 않았다.      


거울을 바라보며 지원은 눈을 껌뻑였다. 어쩌면 아무 일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거라면? 이 정신없는 상황을 되짚던 지원은 일단 엄마의 존재를 확인해야겠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휴대폰이 있는 곳으로 다시 가야겠다고 생각한 지원은 조용히 화장실 문을 열고 옆에 내려놨던 가방을 들어 올렸다. 순간 또다시 차오르는 역한 악취에 어지러웠지만, 정신만은 또렷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옮겨 그대로 자신의 방으로 걸어갔다. 화장실을 등지고 거실은 오른쪽, 자신의 방은 왼쪽에 위치해 있었다. 지원은 오른쪽은 쳐다도 보지 않은 채 왼쪽 자신의 방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런 지원의 모습을 남자도 확인했겠지만, 그는 특별히 움직이거나 말을 걸지 않았다.


지원은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순간 긴장감이 조금 느슨해지며 다리가 휘청했지만, 벽을 짚으며 균형을 유지했다.      


그때였다. 악취가 훅 지원의 방문 틈으로 짙게 스며들었다. 틀림없이 문 밖에 그가 서 있다. 아무 소리 들리지 않았지만, 지원은 냄새로 그 남자의 존재가 자신의 방 가까이로 이동했음을 인지했다. 문에 귀를 대고 있는 걸까. 지원은 팔에 오소소 돋아난 닭살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장롱 쪽으로 걸어갔다.


일부러 좀 더 쿵쿵 걸었다. 드르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린 장롱 속에서 편안한 실내복 상하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 다음 편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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