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있어 25년은 통째로 사라진것 같다. 25년 시작하자 마자 몸에 이상이 있어 병원갔다가 2월에 혈액암 진단을 받고 외투세포 림프종이라는 처음 들어보는 병을 진단받았다.
여지껏 반백년정도 살면서 입원 한번 해본적 없었지만 하루아침에 나는 혈액암 환자가 되었고 항암치료가 필요했다. 오랫동안 다녔던 회사를 그만두고 항암치료를 받기 위한 준비를 했다.
흔히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처음엔 믿기지 않았고,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분노와 좌절을 느꼈다. 갑자기 암환자가 되자 거짓말 같았고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현실감이 없었다.
나만 바라보고 사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어떻게 이 사실을 말해야 할지, 아직 건강하신 부모님들에게는 아들의 암소식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막막했다.
머리가 빠져서 모자를 쓰고 살이 빠져 창백한 모습으로 병원에 누워있는 내 모습이 생각났고 더 나아가서는 내 장례식장에서 서있는 아이들이 생각났다. 여태껏 살면서 이런 저런 위기상황들을 겪어보고 바닥까지 떨어졌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지만 그때는 몸이 건강하고 젊었다. 그래서 힘은 들었지만 절망이나 좌절은 하지 않았다.
비교적 긍정적이고 건강한 사고방식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나는 그래서 그때마다 힘을 내고 희망을 잃지 않았다. 어찌 어찌 살다 보니 남들 사는것처럼 비슷하게 흉내도 내보고 나름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살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의 전제는 나를 비롯한 가족들이 건강한 것이었다.
다행이 지금까지 80세가 다 되신 부모님들도 건강하셨고 아이들도 지금까지 자라오며 병원 응급실 한번 찾은 적이 없었을 정도로 큰 편지풍파는 없었다. 나와 아내 역시 비교적 건강하게 지내고 있었고 언제까지 이런 삶이 지속될 줄 알았다.
암환자들이 얼마나 많고, 암이 아닌 다른 중대한 질병도 많지만 막연하게 나와 우리 가족에게는 일어나지 않는 남의 일로만 생각했었다. 그 모든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는 내가 병원에 가보고 나서야 알았다.
평안한 삶이라는 건 얼마나 얇은 모래성과 같던가. 암이라는 거센 파도에 얇은 모래성 같은 내 평안은 송두리째 씻겨 사라졌다.
당장 치료를 해도 완치를 장담할 수 없는 혈액암이란 녀석은 그만큼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미처 대비할 수도 없이 다가온 폭풍앞에 나를 막아줄수 있는 건 없었다. 당장 가족의 생계를 꾸려오던 직장을 그만둬야 했고 항암치료를 시작해야 했다.
보험이라고는 실비 하나 빼놓고는 그동안 먹고 살면서 전부 해약했다. 다행이 산정특례제도가 있어 돈이 없어 항암치료를 못 받는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항암치료가 하루 이틀에 끝나는게 아니기 때문에 치료와 함께 생계걱정도 해야 했다.
2월에 진단을 받고 3월에 항암치료를 시작했다. 계획은 8차까지 였으니 꼼짝없이 올해는 다른 일은 신경도 쓸 수 없었다. 그것도 잘해야 8차에 끝나는 것이고, 상태에 따라 더 빨리 끝날수도, 기약없이 연장될 수도 있었다.
실제 항암치료를 위해 입원한 병원에서 비슷한 병으로 치료를 받는 분들 중에는 몇년씩 치료를 받고 있는 분도 있었고 완치 판정을 받고 몇 년후에 다시 재발해서 치료를 오는 분도 있었다. 하지만 재발도 일단 다 나아야 일어나는 일이었다.
생전 처음 입원을 했고 항암치료를 시작했다. 말로만 듣던 골수검사도 했고 끔찍했던 부작용도 겪었다. 막막하고 암담했지만 아이들과 부모님에게 사실을 얘기했고 가까운 친구와 지인들에게도 암에 걸렸다는 얘기를 했다.
이렇게 25년 나에게 다가온 암은 거대한 폭풍으로 내 인생을 멈췄다. 벌써 몇 개월째 병원과 집만 오가며 치료에만 전념하고 있다. 아내는 나대신 일을 하기 위해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아이들과 부모님은 아빠와 아들 걱정이 일순위가 되었다.
내가 신념처럼 믿고 있는 말은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다. 지금 당장은 정말 힘들고 어렵고 죽을것 같아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 지나가게 되있다. 그 당시에는 정말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어쨌듯 지나고 나니 이겨낼 수 있더라.
암도 결국엔 지나갈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웃으면서 암 투병 하던 사실을 얘기하게 될것이다. 그렇다. 이 또한 지나갈 것이다.
부디 26년엔 이 폭풍이 멈추고 맑은 날만 이어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