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는 로망보다는 다시 현실을 볼려하니 이제는 글감이 예전과 같은 감성을 담긴 힘들겠지 싶다.
비슷한 상황들이 담겨있어서 에세이같지만
픽션이 가미됐으니 사실 소설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요새는 하고 싶은 걸 하고 살자.'
보다는 현실을 살자. 로 점점 마음이 기운다.
사람에게 치이는 일들이 하나둘 늘어갈 수록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삶에 마음이 끌리는 것 같다.
하지만 다시 예전 글을 끄집어내서 발행해보는 것을 보면
조금은 감성적이고 마음대로 썼던 그 순간이 그리워서
다시 끄집어내서 들여다보는 구나. 싶다.
일단 발행해두면 예전 생각과 지금의 변화를 볼 수 있으니 그것도 나름대로 좋은 것 같다. 작년 12월에 썼던 글이다.
<아람의 일기>
어릴 적 난 매미의 눈동자와 작지만 힘있는 목청소리를 좋아했다. 매미는 참 사랑스러운 존재였다.
초등학교 4학년 여름방학 때 종이컵 하나를 들고 혼자 매미를 찾아 여행을 떠났다. 선크림 하나 안 바르고 맨 얼굴로 3시간 가량 혼자 안양천 일대를 매미를 찾아 하염없이 배회했다. 태양볕이 너무 뜨겁고 온 몸이 타들어가는 듯 했는데 매미를 한번 보겠다는 집념으로 타는 갈증을 이겨내며 온 나무들을 샅샅이 관찰하고 다녔다.
바깥보다 집이 더웠고 찜통이 따로 없던 집은 더울 때면 습한 공기에 불쾌지수가 더 올라가서 그런지 집안의 잡음들이 전쟁터의 총소리와 폭격을 연상케했는데 그럴때면 슬그머니 나와 조용하고 고요한 곳을 찾아 집을 나서곤 했다. 갈 곳이 없던 나는 에어컨이 나오는 언덕배기 아래에 위치해 있는 교회 안에 있는 작은 도서관을 종종 찾아 가곤 했었다.
우리 집은 눈이 오면 자동차가 굉음을 내며 헛바퀴를 도는 소리가 들리곤했다. 겨울엔 차가 올라오지 못 할만큼 꽤나 언덕이 높은 아스팔트 산 위에 위치해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재계발로 군데군데 스프레이자국과 폐허, 무당집, 점집들은 흔한 전경이었다.
가장 낮은 반지하는 볕이 들지 않아 꿉꿉했고 장롱 뒤 촌스러운 꽃무늬벽지에는 회색빛깔의 희끄무레한 곰팡이가 수놓아졌다. 곰팡이를 가릴려고 벽지로 겹겹히 덧입힌 모양새는 학교 운동장의 버려진 낡아빠진 축구공을 연상하게 했다. 반지하는 그런 모양새였다. 겨울엔 외풍이 심해서 장판 하나에 네식구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옴짝달싹 못하는 상태가 되곤 했다. 가장 높은 곳에 있지만 층수로는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공간이 우리집이었다. 소설 속에 달동네는 꽤나 익숙했고 어딘가 친숙했다.
도서관 소설 속에 나오는 집들은 울집보다 더 잡음이 심하거나 비슷한 집안이 많아서 "아항~원래 다들 이렇게 사는구나" 생각했었다.
그냥 이유없이 울컥울컥 마음 속에 뭔가가 올라오고 이따금 가슴이 답답해져 숨이 안 셔지곤 했다. 열심히 부정적이라 생각했던 감정들을 꾹꾹 눌러서 종이접기 하듯이 숨겨두고는 했다.그러다 보면 종종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무감한 공허한 상태가 되곤 했다.
어릴 땐 목이 늘어난 나시를 입고 항상 집안에서 게임을 하던 아빠, 경찰서를 집처럼 놀러다니던 동생, 차별을 하며 말로 힘들게 하는 할머니 덕에 더 괴로워 할 엄마가 안쓰러워 나까지 더는 부담을 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어느 것 하나 틀리거나 실수하면 안되는 착하고 완벽한 첫째딸이 되어야 했다.
나는 매미를 사랑하는 것처럼 엄마를 사랑했다. 엄마가 화장실에서 소름 끼치는 절규를 할 때면 온 몸에 닭살이 돋았다. 정말 살곁이 껍질을 벗겨낸 생닭처럼 도들도들 닭살이 돋는게 신기했다. 소리의 파동이 몸에서 스며들어 내 가슴 속을 깊숙히 전기가 찌르는 것처럼 저릿했다. 따뜻한 가슴을 차갑고 딱딱하게 꽁꽁 얼어붙은 얼음장으로 만드는 것 같았다.
엄마의 절규는 상처입은 고라니 떼가 사방팔방에서 갑자기 뛰어 나와 괴성을 지르며 희미한 달빛이 맴도는 숲속을 헤매고 서로 부딪히는 것 같았다. 앞이 보이지 않는 고라니 떼들은 나무들에 이리저리 부딪히며 검은 숲속을 잔뜩 헤집어 놓았다. 숲이 어두움에 잠길 수록 난 침묵을 간절히 원했다. 하지만 고라니 떼들은 더 날카로운 비명소리를 냈고 난 숨소리를 죽이고 몸을 움추리며 소리가 잠잠히 지나가길 간절히 빌었다. 추위에 떨듯 몸이 으스스 사시나무처럼 그냥 떨렸다. 소리가 때론 너무 날카롭고 무섭게 느껴져 사람의 소리인지 짐승의 소리인지 가히 구분하기 어려웠다.
다만 한가지 확실한 건 그 소리엔 아픔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 안아주고 다가가고 싶었지만 그 소리가 그냥 너무 놀라고 무서워서 도저히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그래서 다가가지 못하고 용기가 없이 무력한 스스로가 참 미워서 자책했었다. 엄마는 내가 사랑하는 존재였지만 다가가 안아주기엔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이였다.
그런 절규를 들으면 소화가 되지 않아서 음식 먹는 걸 좋아하는데도 체끼가 올라와 한동안 아무것도 입에 넣을 수 없는 상태가 되곤 했고 턱턱 가슴이 막히고 목이 매였다.
위로도 아래도 아무것도 나올 수 없는 꽉 막힌 상태가 되곤 했다.
난 다큐멘터리부터 역사극 모든 장르를 가리지 않고 전부 다 좋아하는편이다. 특히영화나 책을 보고대화하는 걸 좋아하는데 유일하게 공포영화는 보기가 싫다. 갑작스레 놀라는 자극 요소가 많고 개연성없이 비명이 난무하고잔인한 장면이 가득한 공포 영화는심장이 쪼그라드는 것처럼 놀라고 무서워서 싫어한다. 머릿 속에 잔상으로 남는 그런 영상과 소릴 접하는 것은 내게 너무 괴로운 일이었는데 어릴 때 가위에 종종 눌린 탓도 있었고 그때 일이 조금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무서운 건 싫다.
숲은 달빛이 사라져 더 칠흑같이 어두워졌고 달빛이 보이지 않을 무렵 고라니 떼의 비명 소리는 더 날카롭고 그 안에는 슬픔과 분노가 한가득 뒤엉켜 있었다.
나무에 잔뜩 부딪쳐 상처입은 고라니떼들이 내 머릿 속을 잔뜩 헤집어 놓는 날이면 아파서 우짖는 비명 소리가 잔상처럼 머릿 속에 내 가슴 중앙에 딱딱한 뼈부근에 깊숙히 박히고 관통해서 누군가 잔뜩 매듭을 꽉 쥐고 옭아맨 코르셋처럼 갑갑하게 느껴졌다.
이따금 숨이 턱턱 막혔다. 숨이 안 셔져서 숨 쉬는게 어려워서 혼자 숨쉬기를 다시 연습해보았다. 그냥 숨은 살아있으면 쉬는건데.. 난 살아있는데 그 숨쉬기가 참 버거웠다. 가슴을 움켜잡고 때론 자그마한 주먹으로 가슴을 쿵쿵 세차게 내리치며 숨을 쉬려고 노력했다. 나는 간절히 살고 싶어서 숨을 쉬고 싶어서 살아내기 위해 가슴을 내리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 나는 지금 숨을 쉬고 있구나. 고로 나는 살아 있었다.
나는 공부한 지식과 필기를 나누고 뭔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행위를 할 때만 살아있고 가치있는 존재같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가만히 있는 나, 무능력한 나는 쓸모없는 존재같아서 아등바등 바삐 움직이곤 했었다.
변화와 성장은 항상 내가 추구하는 가치 키워드였다.
난 머리가 좋진 않지만 아등바등으로 성적은 상위권이어서 장학금을 받곤 했고 알바몬이 되어 여러 알바들을 섭렵할 때도 일머리가 좋단 얘길듣곤 했다. 그때 난 인정과 칭찬에 꽤나 목말랐다.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이고 싶었다.
난 다른 사람의 힘든 삶을 들어주고 싶단 생각을 했고 걱정인형같은 존재가 되어주고 싶었다. 사실은 내가 걱정이 많고 고민이 많아서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어쥤으면 했다.하지만 힘든 이야기들을 쉽사리 터놓을 수 없었고 무서웠다. 다 그렇게 사는건데..나약하고 강하지 못한 내가 미웠었다.
난 공감을 잘 하는 사람이고 싶었지만 선택적 공감을 했고 다른 사람을 정의내리는 사람이었고 유능한 도움이 되는 사람이고 싶어했으며 가르칠 줄 만 알았지 마음으로 대화를 못하고 논쟁을 했으니 말센스는 영 꽝이었다. 지금은 표현예술치료를 통해 나의 이야기를 토해내며 어떤 게 마음으로 하는 대화인지 감정을 찾아보며 경청을 배우며조금씩 여유를 찾아가게 된 것 같다.
혼자 사는 언니가 아프다고 했을 때도 내가 혼자 살면서 부를 사람없이 아프고 서러워서 하염없이 울었던 기억이 있다보니 내 일은 제쳐두고 찾아가게 됐던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작은 말로 상처를 잘 받다보니 타인도 상처받을 것 같은 갈등 상황이 오면 냅다 얼음이 되어 몸이 굳어버려서 아무것도 못하고 전전긍긍하며 속앓이를 해야했다.속에서 자책으로 빠져 울고 있었을텐데 겉으로 '괜찮다 ' 말은 하지만 얼굴은 괜찮지 않은게 뻔히 보였다. 난 숨긴다고 숨겼는데 숨기는 것도 잘 못하고 티가 나곤 했다. 겉으로는 약간 화나보였을지도 모르는데 속으론 울고 있었다.
그럴때면 내 존재가 빌런같아서 미안했다. 내가 이 사람에게 필요한 존재가 아닌 것 같고 미안한 마음에거리감이 생기며서서히 멀어졌다. 마음과 다른 이상한 행동들을 하는 그런 내 모습을 마주함이 벅차고 괴로웠다.가족일로 마음이 벅차 여유가 없을 땐 항상 관계에서 문제가 생기곤 했다.
가족일이 터졌을 때 내 근본 뿌리에서부터 문제가 있단 생각에 메스컴에서 가족 문제 있는 사람은 걸러야 될 사람이란 말들이 가슴을 욱씬거리게 후벼 팠었다.
지금은 말하고 싸우며 드러내보일 자신이 있는데 그땐 나의 치부와 힘듦을 전부 다 드러내면 지쳐서 내게서 떠나버릴까봐 실망할까봐. 불편해지거나 버려질 것이 무서워서 먼저 상대가 끊어내기 전에 내가 먼저 관계를 끊고 일부로 싫어할 짓을 하며 도망을 가곤 했었다.
나는 나를 돌보지 않았고 나에게 공간을 내어주지 않았다. 재능없는 나를 미워하며 부단히도 노력했다. 막다른 골목처럼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는 거,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것, 실패하면 기회가 없다는 생각은 강한 동력이 되어주곤 했었다. 독하게 일하고 아껴서 1년반만에 목표했던 전세금을 전부 갚았다.하지만 나에게 틈을 주지 않은 결과 내 주변 사람에게도 공간을 내어 줄 여유가 없었고좋아하는 사람들을 잃었다.
어릴적 절규를 들을 땐 그냥 엄마의 마음이 안 아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엄마의 절규가 메아리치듯머릿 속을 헤집어놓으며복잡해질 때면 흰색 종이에 연필로 무언가를 끄적끄적 가득 채워놓고는 했다. 그렇게 뭔가를 잔뜩 끄적거리고 그리다 보면 내 머릿 속은 점점 고요해지는 듯 했다.그렇게 해야 살 것만 같았다.
난 고요한 침묵을 사랑했다. 그래서 이따금 새벽 2~3시 가량의 고요하고 차가운 밤공기와 시계의 일정하게 똑딱거리는 초침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모두가 잠든 고요한 시간을 온전히 나를 위해 누렸다. 이따금 친척들한테 건내받은 낡은 이면지 뭉치와 연필을 친구 삼아 이것저것 여러 낙서들을 끄적거리곤 했다.
난 집 앞에 가까운 도서관이 있어서 스스로가 꽤나 운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했다.여름엔 시원했고 겨울엔 따뜻한 도서관에 있기에 고요함 속에 흠씬 파묻혀 집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내겐 너무 멋진 탈출구였다.
이따금 즐거운 나의 집이란 노래나 또래 친구들이 학교에서 '집가고 싶다'라는 말이 내겐 이해할 수 없는 외계어처럼 느껴지곤 했다. 친구들이 학원을 가버리면 집이 즐겁지 않아서 이곳저곳을 혼자 쏘다니곤 했다.
집이 어떻게 좋은 곳일지 그냥 신기하고 좀 궁금했다. 집을 나오면 내게 모든 공간이 행복한 공간이 되곤 했었다. 집에 있으면 회색 빛깔이었는데 집을 나오면 온 세상이 다채로운 색깔로 덧입혀져 있고 모든 것이 신기하고 재밌었다.
특히 학교에선 선생님들이 공부를 잘 한다고 이것저것 다재다능하다며 팔방미인이라며 칭찬을 해주셨는데 그 말들이 내겐 무척 달콤했고 기분이 좋았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선생님께서 식물을 그리는 나를 보며 관찰력이 뛰어나고 섬세하다며 칭찬을 해주셨는데.. 그냥 그런 따스한 칭찬이 너무 고마워서 혼자 집 가는 길에 아무도 없는 골목길에서 숨을 죽이며 조용히 울었다.
매 학기마다 학교에서 사생대회가 열리고 시상을 할 때면 매번 강당 앞에서 최우수 상장을 받곤 했다. 상장 받는 것보다 옆에서 내 그림을 직접 보며 툭 던져 준 선생님의 "관찰력이 뛰어나다." 는 칭찬 한마디가 무엇보다 가슴에 콕 와닿아서 너무 고마웠고 더 열심히 그렸었다.
난 자연을 보는게 좋아서 나무를 그리곤 했는데..
마지막 잎새를 지닌 앙상한 가지를 가진 깊은 뿌리를 내린 작지만 단단한 겨울 나무를 그렸다.엄마와 목사님은 내 그림에 악한 영이 느껴진다고 하고 말도 없이 내 그림을 버렸었는데..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가뭄에 단비처럼 따뜻한 말 한마디가 가슴 속에 깊이 남아서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되곤 했다. 그래서 나도 따뜻하게 칭찬 한마디를 건내줄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었다. 특히 나의 느림에 대해 섬세하다며 '대기만성'이라고 표현해줬던 선생님의 한마디에 나는 엉엉 울곤 했다.
그 말이 넘 소중하고 간직하고 싶어서 수첩 속에 '대기만성' 그 말 한마디를 적어놓고 반추하며 기억하고자 했다. 내게 작은 말 한마디는 큰 힘이었다. 헬렌켈러를 살린 설리반 선생님처럼 나도 누군가의 진가를 알아볼 수 있는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낼 수 있는 그런 어른이 되고 싶었다.
난 쉬는시간보다 사실 수업 시간을 더 좋아했다. 선생님이 던지는 농담 한마디, 명언 한마디도 다 놓치지 않고 다 받아적으려고 노력을 하곤 했다. 그래서 누군가 필기 빌려달라고 하면 기분이 좋았고 시험기간에 친구를 앉혀놓고 쪽집개 풀이해주고 친구가 같이 좋은 성적을 받을 때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친구가 들어준 덕에 나도 머릿 속에 잘 들어와서 들어줬던 친구가 고마웠다.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른데 조금이라도 예쁜 말을 건내주고 싶어했지만 마음이 여유치 않을 땐 내게도 예쁘고 사랑스러운 말을 할 힘이 없었다. 나의 편협한 사고로 타인을 '특이하다.'며 판단하기도 했었다. 사실 난 내 스스로가 특이하다고 생각했었는데 타인을 투사한 걸 뒤늦게 깨닫고 엄청 후회했었다. 그땐 가족의 일이 터졌을 때'괜찮다'고 말을하곤 했지만 사실 슬픔으로 스스로를 챙기기도 벅차서 괜찮지 않았던것 같다.
난 또래 친구들처럼 용돈을 받은 적도 없었고 친척들한테 받았던 새뱃돈도 부모님이 항상 돈이 없어서 힘들다고 하셔서 항상 안쓰러워서 빌려 드리곤 했다. 돈을 좀 모아놓으면 동생이 2~3차례 다 훔쳐가서 포켓몬 딱지나 군것질을 잔뜩 하고는 해서 빈털터리가 되곤 했는데 나는 이에 대해 속상하고 억울함을 느끼곤 했다.
내가 엄마에게 "억울해요."라는 말을 내비추면 엄마는 오히려 동생을 용서하지 못하는 나를 나무라며 화를 내셨다.
되려 부정적인 의견을 내비추는 내가 잘못 됐다며 야구 방망이를 붓 삼아서 다리를 도화지 삼아서 보랗빛 색깔로 군데 군데 물이 들도록 다리에 여백들을 채워놓곤 하셨다.
그럴 때 엄마는 항상 "왼 뺨을 맞으면 오른 뺨을 내밀어야지.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해야지. "라고 성경을 인용하며 억울한 감정을 내비치는 내가 잘못됐다며 무조건적인 용서를 하고 참아낼 것을 명령했다. 엄마의 사랑법이었다.
그 당시 어린 내게 엄마의 말은 절대적이었고 되려 용서하지 못하는 내가 미안하단 사과를 해야했다. 그렇게 동생과 악수를 하고 포옹을 하며 찝찝한 화해를 해야 했다.
그냥 이런 일에 익숙하다보니.. 체념하듯 입을 꾹 다물고 불편한 상황 자체에 대응을 못하고 하고 싶은 말이 한가득이어도 꾹꾹 담아두고 내 권리를 못 찾고 휘둘리곤 했다. 마음과 다른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곤 했다. 한번은 미술시간에 아이들이 그림 그려달라는 말을 했는데 헤헤 웃으며 거절을 못 하고 친구들 그림을 다 그려주느라 정작 내 그림을 못 그려서 방과후까지 남아서 그림을 다 그리고 가곤 했었다.
나는 혹여 어떤 상대에게 미운 마음을 품었다면 그런 나에게 양심이 찔려서 스스로에게 화살을 돌렸다. 안절부절.. 결국 고민만 주구장창하다가 갈등이 싸움이 싫어서 평화롭고 싶어서 불편한 상황에 말을 못하고 회피하는 습관이 생겼다.
말이 번복되거나 불안하게 하는 상대에게는 상대가 떠나기 전에 먼저 도망갔었다.
계속 상대방은 상처입지 않을까 고민만 주구장창하다가 결국 말도 못 하고 타이밍도 놓치며 관계가 이상해졌다. 내 마음이 원하는데로못하고 행동에 제약이 걸렸다.
핸들을 우회전을 돌렸는데 차는 좌회전 방향으로 이동하듯제멋대로였다. 몸과 마음, 생각이 모두 따로 놀곤 했다.
되려 내 불행과 부정적인 감정들이 타인에게 더 많이 옮기고 피해가 될 것 같단 생각이 드니 그럴바엔 오해하는 상황이 생기더라도 남들에거 더 피해주지 않게 혼자인게 편했었다.
그냥 내가 말에 민감하다보니 뭔가 불편한 걸 얘기한 것만으로 상대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까 괜히 염려되고 불안했고 갈등 상황을 피하고 모면하기 위해 오해를 받더라도 넘기고 손해보는 선택들도 종종 하고는 했었다.
난 동생이 내게 한 잘못에 대해 속상한 마음을 가지게 되면 동생을 품어주지 못하는 좁은 마음을 가진 나를 자책했었고 자책이 일종의습관이 되었다.
그래서 훗날 연기를 해서 바람을 핀 상대에게 화를 내야될 상황인데.. 상대가 밉고 화가 나기보단 그냥 그 상황이 너무 슬펐고 내가 뭔가 매력이 없고 잘 못해서 상대가 바람을 핀 것 같다며 되려 스스로에게 화살을 돌렸다. 오히려 상대에게 매달리며 우는 연기를 표현했었다.
나는 상대를 미워하는 나를 보는 것이 괴로워서 차라리 편하게 나를 미워하곤 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도 쉽게 못 하고 견디기 어려웠나보다.
연기 선생님은 그런 나의 분석이 일반적이지 않고 이해할 수 없고 이상하다고 했었다.
남이 나쁜 사람이라면 나는 그게 더 감당하기 힘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얘기하는게 내겐 더 힘듦이라서 차라리 내가 못된 사람, 나쁜 사람이 되는게 그냥 억울하지만 오해받는게 차라리 더 마음이 편했었다.
미워하면 되려 왜 나는 사람을 미워하는 좁은 마음 그릇을 가졌을까? 내가 뭐라고 남을 판단할까? 오히려 내 마음이 더 괴로워져서 마음껏 미워하고 화를 못냈고 이게 쌓이다보면 그냥 종종 숨쉬기가 어려웠다.
나도 미워할 것에 미워하지 못하고 화를 내지 못하고 분명 마음 속 분노가 존재하는데 혼자 가슴이 답답해서 길바닥에 쓰러져버리고 때론 무력감에 아무것도 못 하고 모든 것으로 부터 회피하게 되는 내 스스로가 이상한 것 같단 생각이 들곤 했다. 사실 화를 못 내서 화내고 싶어서 혼자 알바를 하며 연기를 했는데 화를 못 내고 일반적인 분석을 하지 못하는 자신때문에 꽤나 괴로운 시간을 보내야했다.
어릴적 세뱃돈으로 문제집이나 정말 갖고 싶던 미술 도록집을 사는 것 외에는 어릴 적 돈을 써본 경험도 별로 없었다. 아끼는게 습관이었고 돈에 대해 궁색했다.
어린 내게 또래 친구들이 가는 pc방이나 쇼핑, 학교 앞 분식집, 노래방 등이 내겐 전부 부담이었고 급식비, 우유값을 못 내서 눈을 질끈 감고 손을 들어야만 하는 날이면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 익어버리곤 했어서 별명이 토마토가 되었다.
난 유독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잘 느꼈다. 어릴 땐 상대방과 정면으로 눈도 못 마주치고 나에게 인사를 건내는 친구가 있으면 "에이.. 나에게 인사할리 없어." 하고 쌩하니 무시하며 지나가곤 했다. 마음 속으론 밝게 손을 흔들고 인사하고 싶은데.. 나에게 인사하는게 아닐까봐 괜히 손을 흔들고 창피 당할게 두려워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곤 했다.
그러곤 손을 흔들고 반갑게 표현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계속 아쉬움에 고맙다고 반갑다고 하고 싶은 말도 맘 속에 잔뜩 꾹꾹 담아두고 해서 후회하고 기억 속 잔상으로 남아 여러사람에게 미안했다.
학원을 가서 새롭게 이것저것을 배우는 친구들이 호기심이 많았던 내겐 무척 부러웠다. 돈에 대한 자격지심, 열등감은 친구들과의 자리가 부담이 되고 눈치를 보며 피하게 되곤 했다. 사람을 좋아하고 친해지고 싶었는데 어딘가 이상하고 부정적인 감정을 지닌 내 존재 자체가 민폐가 될까 싶어서 스리슬쩍 자리를 피해 혼자 공원을 가거나 도서관을 찾아갔다. 불행도 전염된다고 그냥 내가 너무 힘들땐 가족들의 일로 힘들어하고 불행한 나와 함께 있으면 타인도 불행해질거라며 상처를 주고 받기 싫어 혼자가 됐다. 혼자가 익숙하니편했다.
남들을 돕고 싶어하는데 정작 나는 기대거나 도움을 요청하는게 어려워서 혼자 끙끙거리곤 했었다. 한 번은 도움을 요청하는 내가 너무 의존하거나 의지해서 힘들게 하는게 아닐까 싶어 멀어졌던 경험도 더러 있었다.
태양이 타들어가듯 더운 여름날 매미를 만나러 가기로 정한 날. 집에 매미채가 없어서 집앞 교회 도서관에서 물을 마시고 살짝 챙겨왔던 종이컵 하나를 든든한 친구 삼아서 열심히 안양천 일대를 돌아다녔다.
매미를 너무 귀여워했지만 쫄보였던 나는 직접 손으로 만지기엔 매미는 너무 무서운 존재였기에 종이컵이라는 든든한 친구가 필요했다.
도서관에 곤충 일지에서 봤던 매미는 넘 반질반질 귀여웠는데 특히 눈이 매력적이었다. 밤하늘에 박힌 은하수처럼 티없이 맑고 아름다웠다.
집을 팔고 반지하로 이사가기 전에는 창문을 열면 앞마당에 심어져 있는 감나무가 보였다. 무더운 여름밤에는 감나무에서 나는 청량한 매미소리를 자장가 삼아서 잠들 수 있었다. 난 종종 꿈 속에서 귀신을 보고 가위에 눌리며 식음땀을 흘리곤 했었다. 집안의 끊임없이 이어지는 시끄러운 전쟁 소리로 인해 마음이 쓰리고 답답할 때 종종 움찔거리고 눈치를 보며 놀라곤 했는데 매미 소리는 그 잡음을 가려주는 듯 해서 난 매미에게 무척 고마웠고 위로가 되었다.
시끄러운 잡음들이 머릿 속에 맴돌아 잠 못 이루며 배개에 축축한 두개의 찌그러진 동그라미를 그리는 날이면 여름 밤 매미 소리는 축축한 동그라미를만들며 흐느끼는 소리를 이불처럼 포근히 감춰주곤 했다.
그래서 나는 고마웠던 매미의 실체를 직접 마주하고 싶었다.
책에서 보여지는 죽어있는 매미가 아닌 진짜 살아서 숨쉬며 자신의 자신의 목소리를 시원하게 내지르는 매미의 실체가 궁금했고 매미를 찾아다니는 길은 설렘이었다. 난 내 목소리 하나 잘 못내는 부끄러움 많고 소심한 아이였는데 그런 내게 매미는 궁금증을 자아내는 귀여움과 다채로운 매력을 가진 멋진 존재였다.
나도 매미처럼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이고 싶었다. 삶 속에서 싸우며 화를 낼 수 없지만 희곡 속에서는 싸울 수 있었고 사회의 부조리한 그림자에 소외된 소수의 이야기들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동아시아사를 배우면서 억울하게 고통받고 그들의 아픔을 외면하고 없었던 일로 만들어버리는 이기적인 사람들에 분노하며위안부와 같은 억울한 사람들, 외면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뭔가를 해달라는게 아니라 그 아픔을 잊지말고 기억해주고 그 슬픔을 지켜봐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고 생각했다. 세상을 변화시키긴 어렵지만 문화가 주는 힘을 통해 개인의 의식이 변화한다면 나비효과처럼 이들이 조금이라도 덜 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정치는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어떤 정권이 들어와도 달라질 거 없단 생각이 들었고 그냥 소수와 약자가 모두 선한 건 아니지만 이런 억울한 사연도 있다며 그냥 공감하고 내 몸으로서 목소리로 이야기를 내며 같이 위로를 해주고 울고 싶었나보다. 10명의 관객 중 따뜻한 마음으로 변화하는 1명이 있다면 그 이야기는 가치있는 후회없는 일이라고 그 한명이 새로운 변화를 만들거라고 생각했었다.
책을 보며 매미를 따라 그려도 보고 매미 소릴 따라 내보기도 했다. 스으으위이 스으으위이 입술을 우~~~이 우~~~이를 내며 오뼝(오. 노란 옷을 좋아해서 병아리)이란 애칭을 만들어 부르는 내 친구들한테 개인기로 매미 소릴 들려줘야지 상상하며 매미 소릴 열심히 입으로 연습하곤 했다.
분명 또 헛소리한다고 이상한 취급 당하고 퇴자를 맞을게 분명했지만 매미의 매력적인 목소리를 내가 사랑하는 친구에게도 이 작고 소중한 존재의 매력을 마음껏 알려주고 싶었다.
난 매미의 초롱초롱한 귀여운 눈동자에 매료됐었다. 밤하늘 별처럼 반질반질거리는 조그맣고 귀여운 녀석. 바람이 새나가는 소리를 우렁차게 내고 있는 작고 귀여운 생물체가 어디있는지 찾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설렘이었다. 매미란 친구는 어디에 숨어 있을까? 난 그냥 매미가 고마웠다.
그냥 곁을 떠나지 않고 작디작은 존재가 자신의 소리를 힘차게 내어준다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힘이 되었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나에게 매미는 소중했고 넘 멋진 존재였다. 그냥 존재 자체만으로도 위로가 되었고 나는 매미가 사랑스러웠다.
일에 제약이 걸려 원치 않게 일을 쉬면서 날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돌아보니 난 그런 점에서 매미한테도 주변의 좋은 사람한테도 꽤나 사랑을 많이 받고 살았다. 아무것도 없는 모질이, 찌질이 이따금 빌런 짓을 하는 부족하고 불완전한 존재지만 그래도 떠나지 않고 마음을 내어줬던 사람들이 참 고맙고 살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야기 좀 해. 돈 때문에 오는거 아니잖아.'나는 원래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는데..나를 자각시켜준 고마운 말.
'너 자신만을 위해 살아. 너의 가족이 되어줄게. ' 가족을 위해 죄책감을 짊어질 필요도 없고 나를 해방시켜준 참 따뜻한 말.
'특이하다는 말이 기분나쁘단 말''아람 특이한데' 특이하다는 말이 기분나쁜 것일 수 있단 걸 자각시켜줬고 현실을 보며 정해진 틀에 보편적 기준에맞추려고 아등바등했고 평범함이 목표였는데 그냥 내 마음이 원하는데로 하고싶은 걸 하며 자유롭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준 말.
난 특이하니까 그냥 특이하게 살아야겠다.
'그건 특이하고 이상한게 아니라 고귀한거야.' 나의 꿈과 이상적인 생각들을 응원하고 지지해줘서 너무 고마웠고 나를 울렸던 소중한 말.
'삐뚤빼뚤해도 괜찮아' 완벽해야 된다는 강박을 내려놓게 해준 말. 그 자유로움이 틀이 없음이 오히려 내가 하고 싶은 모든 시도를 해볼 수 있는 것이란 걸 자각시켜준 해방의 말.
난 자기계발서를 읽으며 그 틀에 나를 우겨놓고자 부단히 노력했지만..거긴 나의 행복이 없었다.
부의 성공은 풍족함을 주지만 거기에 완전한 행복이 없음을 그냥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야지. 행복하다.
일과 운동에 중독을 느끼며 내 감정을 외면하고 도망갔다.
난 현실을 살아야 되니까.
괜찮은 줄 알았지만 괜찮지 않았고 외로운 줄 몰랐지만 꽤나 외로운 사람이었다.
그 밖에도 여러 소중한 말들 감사한 말들이 내 마음을 움직여서 날 살게 해줬다.
내가 바삐 움직여 감각하지 못했을 뿐 햇살은 항상 한없이 따스한 빛을 온 몸을 감싸며 자연은 한없는 사랑을 내게 주고 있었다. 자연이 주는 무한한 조건없는 사랑과 아름다움은 복잡한 머릿 속을 시원한 바람으로 시원한 공기로 비워주었다.
자연만큼 무한히 품어주는 사랑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고요한 공원이나 산, 바다를 유유자적하는게좋다.
자연으로부터 가족으로부터 결핍된 사랑을 많은사람들로부터받았다.그러니 난 꽤나 운이 좋은 편이다.
예전에 짧게 이야길 나눈 분이지만 그 분이 세월호 사건 때문에 아이들을 구하고 싶어서 수영을 배웠다는 말을 들으며 마음이 참예쁘단 생각이 들었었다. 존재 자체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만큼 영감이 되는 멋진 분이 있었다.내가 물어봐놓고 그 분이 살아온 삶을 들으니 꽤나 대견하고 기특해서 그 당시 나도 모르게 혼자 생각이 나고 이유없이 눈물이 났었다. 그때 난 부족한 나를 채우기 급급해서 많은 사람들과 멀어졌는데 몇년이 지났는데도 이유없이 문득 떠오르는 거보면 정말 인상깊었나보다.
그땐 그 분의 말을 이해 못 했는데..
나이가 들고나니 이제서야 이해하게 된 것 같다.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단 말도 사랑하고 싶단 말도 타인을 돕고 싶단 말도 난 그때 사람과 세상을 믿지 못해서 나를 알아야된다며 나를 고치려 들었었는데 지금은 그 말들이 공감이 되고 이해가 된다.우리가 사는 이유는 많은 것들을 사랑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
희곡과 문학들이 사랑을 얘기해도 그때의 나는 쓸데없는 것 취급을 했고 여유가 없었다. 사랑은 사치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자연스럽게 모든 것에 녹아져있단 걸 어릴 땐 알지 못했다.
그래서 어떻게 사는지 그 분은 어떤 생각들로 변했을지 조금 궁금했던 것 같다. 그때 편협했던 사고로 말을 했던게 조금은 미안해서 후회가 됐다. 나도 누군가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그런 사람이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본다.
난 내 안에 결핍감이 많아 많은 사람에게 그냥 다 연결감을 느끼고 싶어하다 보니 경계없이 다가간 탓에 휘둘리고 혼자 기대하고 쉽게 상처받아 세상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며 한없이 고립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결국에 사람때문에 또 치유되고 믿을 수 있게 되었고 삶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그러니 그때의 결핍감 덕에 나는 남들보다 작은 것에 더 큰 행복감을 느낄 수 있게 됐으니 내 삶은 꽤나 불안하지만 그래도 만족스럽다.
'인생은 아름다워. '영화 속의 주인공은 포로 수용소 속에서 아이의 순수함을 지켜주며 긍정적인 태도를 잃지 않았다.
아..사람은 누군가 지켜야 될 존재가 있을 때 강해지는구나.
그럼 난 내가 지키고 사랑할 것들을 많이 만들어야겠다.
내가 좋아하는 움직임, 그림과 예술들을 자연을 친구와 관계를 맺는 여러 사람들을 그리고 나를 사랑하고 지켜기 위해 단단하고 강해져야겠다.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다가오는 일이 많았다. 가족의 개인회생, 엄마의 퍽치기 사고. 아버지의 특발성 폐섬유화증, 동생의 정신병, 돈이 없는 나는 무쓸모가 된듯 그렇게 먼저 나를 끊어냈던 부모님의일들.
그냥 어쩔 수 없이 되어지는 일이 있음을 참 인간은 나약한 연약한 존재임을 느끼며 삶에 겸손해지게 된다.
모든 사건들을 겪을 때마다 그냥 항상 '괜찮다.' 며 억지 웃음지으면서 머릿 속으로 빠르게 정리하며 대수롭지 않게 남 일처럼 넘긴 듯 했지만 난 사실 괜찮지 않았다.
머리와 입은 '괜찮아'를 외쳤지만 딱딱하게 굳은 내 복장뼈라인은 괜찮지 않다며 아우성을 쳤고 몸은 솔직했다.
1년에 1번씩은 미주신경성실신으로 쓰러져 응급실에 가야했다. 어릴 때 아프면 내가 자기관리를 못한다며 스스로에게 모진 말을 했고 네 멘탈이 약하다며 나를 학대했었고 아픈 상처를 칼로 더 깊게 찌르곤 했다.
지금은 괜찮지 않았고 모지리같고 빌런짓을 하는 슬픔을 품은 나도 그냥 '아름답다'며 아무말없이 느끼고 안아주기를 해본다.나의 슬픔을 애도한다. 슬픈건 슬픈거잖아.
다른 사람 손가락 하나 아픈 것도 아픈거라며 얘기해놓고 넌 너를 왜 그렇게 미워했니. 정의내리기 바쁜 사회에서 너부터 널 안아줘야지. 왜 그렇게 넌 외면하고 무시하며 일에 빠져 살았니. 넌 그냥 있는 그대로 아름다운 존재야.
태양은 한번도 같은 움직임을 만들어내지 않고 매 순간 우리는 다른 빛을 받고 살아간다. 그러니 그 빛을 받고 영향을 받는 우린 매 순간 달라질 수 밖에 없다.
그때의 모지리가 영원히 모지리인 건 아니다.
물론 과거가 후회되며 무수히 울지만 후회한다는 건 과거의 내가 변했다는 증거이다.
선을 추구하더라도 모르고서 악한 짓을 하고 남에게 상처를 입히는 별로인 존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서서 반복하지 않으려 넘어지지만 다시 시도해본다.
또 비슷하게 반복되는 패턴을 마주하면 그게 너무 괴로워 죽을 것 같지만 미련하게 반복하고 버티는 건 자신있으니 밤새 소리를 내는 매미처럼 조금 미련하게 그렇게 살아보려고시도 해본다. 난 내 삶을 사랑하니까 조금은 느리고 미련하게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
나를 그냥 받아들이고 안아주기를 해본다.
내가 지금 불안정회피의 혼합형 유형이라 혼란하다면 뭐 어때? 이게 나인데..
공감력 만땅의 획득형 안정이 되기 위해 스스로를 먼저 사랑하고 돌아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면 되는거다. 물론 힘들고 잘 안되지만 그만큼 힘들었던만큼 획득한다면 누구보다 더 큰 행복감을 누릴 수 있는 기회인 것 같다.
어둠이 있어서 빛이 밝게 빛나듯이 결핍이 있기에 삶은 더 행복하다.그렇게 나를 조금씩 사랑하며 내게 공간감을 내어준다.
남들 보지 말고 걱정하지 말고 '너나 잘 하세요.'를 시전했던 선생님의 말을 생각하며 내 몸의 호흡과 감각들을 느껴본다.
변화와 성장을 가치로 둔 건 내 스스로를 바꾸고 싶어한 탓이었다. 얼핏 보면 멋진 말이었지만 그때 일에 미쳐있던 나는 정상이 아니었다.
이젠 매일 햇볕에 따라 변하는 나를 받아들여본다.과거에는 남을 돕고 싶고 다른 사람 이야길 해주고 싶어서 연기를 했다면 살풀이를 하듯 나를 위한 예술작업을 해보고 싶다.내가 진짜 치유되고 정화되어 회복한다면 거기서부터 진짜 자연스레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수용해줄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사람이길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