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판타즈마고리아-3

by 한운후


죽음의 침대에 드러눕기 전 피로를 풀기 위해 신음을 내며 온몸을 뻗는 멍청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걷는 것도 더는 피곤하지 않다. 아내에 대한 걱정도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져 간다. 내가 순응해야 할 유일한 건 나를 휴가철 짐짝처럼 앞으로 끌고 나아가는 이 손이 전부일테다.

천천히 생각을 되짚어보면 이건 말도 안 되게 웃기는 상황이다. 전 세계 사람들이 얼굴의 절반을 마스크로 가려져 있던 시기에 그 일이 터졌으니, 오늘은 내가 5년 만에 처음으로 외출을 한 날이었다. 서울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한 주말에 찾는 평범한 놀이공원으로 아내와 함께한 평범한 데이트.

다시 앞을 본다. 그리고 눈을 감는다. 두꺼운 연기가 얼굴 위로 쏟아지는 걸 검은 곰의 털로 여겨도 무리가 없는 시간이다.





이런 부드러운 적막은 언제부터 이어졌을까. 아마도 어둠이 편안하고, 더는 숨어야 할 필요가 없어서겠지.

그래서 손에 익숙한 자동차 키처럼 뾰족하고 둥그스름한 시간의 모퉁이들을 잠자코 맛볼 수 있었나 보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 아내와 줄을 서서 올려다본 빨간색 커다란 네온 간판을 기억한다.

Phantasmagoria

어린 소년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아내의 손을 꼭 잡고, 계속 뒤와 옆을 살피려 눈을 굴렸다. 군중 속에서 듣는 십 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심장을 쪼그라들게 만들 만큼 날카로울 수 있는 걸 모르고 있었다. 말발굽처럼 웅성이는 소리에 내 온 신경은 깨진 유리 파편들처럼 진동했다. '세계 최초 3D 홀로그램 호러 체험'이란 광고 문구를 서른 번을 족히 넘게 듣던 중 하늘에서 처절한 비명이 날아들었다. 알록달록한 스키틀즈를 닮은 롤러코스터 열차가 가장 높은 굽이에서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곡선 위를 물처럼 흐르는 유연한 무쇠 열차만큼 그 위에 올라탄 사람들도 나를 매료시켰다. 몇 차례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반드시 어떤 순간에 취해야 할 몸짓을 똑같이 교육받은 것처럼, 그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오른 팔만 하늘로 뻗고 있었다. 똑같은 동작, 똑같은 표정, 똑같은 크기의 입구멍을 통해 뿜어져 나오는 똑같은 양의 공기. 그들의 단조로운 고성은 3~4초간 하늘을 소유할 자격이 있는 것처럼 특별했다.

흥미로운 쪽은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판타즈마고리아 입구에 줄을 선 수 백 명의 사람들은 책 없는 도서관에 온 것처럼 숨을 죽인 채 야단스럽게 진동하는 롤러코스터 레일만 바라보고 있었다. 열차가 비명과 함께 성탑 뒤로 모습을 감추고 나서야 그들은 다시 전원이 켜진 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락을 받은 것처럼 말을 하고, 웃기 시작했다. 그 장소가 고요했던 적이 한 번도 없던 것처럼 단어와 단어 사이에 스스로를 파묻었다.

"괜찮을 거야, 여보."

미하의 손이 따듯했다. 내 귀와 목 뒤를 어루만졌다.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게 좋은지 나쁜지 모르겠어. 그냥 주변만 걸어 다닐까?"

"걱정하지 마. 여기도, 저기에도 당신처럼 검은 모자 눌러쓴 사람들이 많잖아. 그리고 조금 더 있으면 우리 차례야. 내가 옆에 있을 테니까 같이 가자."

그녀는 내가 더는 모자챙을 만지작댈 수 없이 두 손을 잡았다. 사회로부터 은둔하는 남편이 남들에게 짓밟혀 질식하지 않도록. 그녀에게 그런 힘들은 어디서 났을까. 하얀 유령 가면을 쓰고 하늘거리는 반투명한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사신이 초승달 모양의 커다란 낫으로 사람들의 머리 위 허공을 천천히 가르자, 비명과 환호가 이어졌다. 사신이 내게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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