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즈마고리아-4
화가 유령. 깊고 차가운 해류를 타고 나타난 흰 형체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기쁜 표정과 울상을 번갈아 보인다. 최근에 해고당한 유원지의 피에로처럼 짧은 복도를 배회한다. 그가 옆구리에 끼고 있는 자화상이 내 눈길을 끈다. 그림 속 스스로는 그가 짓는 표정과 반대되는 것을 얼굴 위에 비친다. 웃음엔 슬픔을, 두려움엔 평안을. 화가가 낯익어서 주변이 다시 어둠에 둘러싸여도 기억을 더듬고, 또 더듬는다. 나를 어딘가로 부지런히 데려가고 있는 이 손, 아니, 이 존재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한 사람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바이오톡스-K의 연구 결과 조작을 언론에 제보한 이후로 나는 형진이라는 친구를 잃었다. 내가 그를 내버렸다 하는 게 더 정확할까. 지금 돌아보면 그에게서 온 이메일을 애초부터 열어보지도 말았어야 했다는 미련이 남는다. 삶 전체를 걸고 정성을 들여 만든 쿠키 상자를 상대가 뜯기만 하고, 입술조차 데지 않는 걸 바라보는 기분이란. 특히나 그 재료가 대부분 변명이나 자책이라면.
형진이에 대한 생각을 조금 더 해본다. 그에게 모욕된 신호탄에 불을 붙인 사람은 바로 나다. 또 그가 넘지 못하게 높은 울타리를 세운 것도 나다. 이야기를 들어볼 여지를 언론에 접촉했던 순간부터 내어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 즈음 진작에 아내의 손을 잡고 놀이공원의 주차장을 활보하고 있었을 것이다. 글쎄, 이런 무의미한 상상은 후회만 깊어지게 하는데. 더는 분노를 수렴할 의지조차 바닥이 난 모양이다. 아무리 생각을 반복해 봐도 내게 벌어진 일들은 결국에야 전부 타버릴 도화선들로 얽혀있었다. 그저 내가 고이 쥔 이 차가운 손을 뒤따라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