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어떻게
나는 1월 중순부터 유럽여행을 시작했다. 프랑스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았기에 여차하면 프랑스에 남을 수도 있었겠지만, 언제부터인가 나는 생각하는 것보다는 행동하는 것을 우선시하고 있었다.
서른 살, 이립而立. 논어에 이르기를
"나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志學, 지학), 서른에 자립하였으며(而立, 이립), 마흔에는 미혹되지 않았고(不惑, 불혹), 쉰에는 하늘의 뜻을 알았으며(知天命, 지천명), 예순에는 귀가 순해졌고(耳順, 이순), 일흔에는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았다(從心所欲, 종심소욕)."
라고 하였다. 나는 이를 이립이 스스로 뜻을 세우는 시기라 이해했다.
나는 글을 쓰면서 단 한 번뿐인 인생에 베가본더로서의 삶을 살아가겠다는 뜻을 세웠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체 그저 살아가는 어리석은 중생일 뿐이나, 그저 살아가는 것은 오로지 나만의 것이었으면 했다.
워킹홀리데이에서 유럽여행으로 변경하고 현재 위치는 스위스. 어느덧 한국을 떠난 지는 16일째. 되지도 않는 영어와 프랑스어를 보디랭귀지와 함께 사용하며 피르스트까지 왔다. 여기까지 참 용케도 왔다. 감사한 일이다.
나는 혼자서 안갯속에 파묻힌 알프스를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이 숨 막히는 적막과 씁쓸한 고요 속에 침전되는 기분을 느꼈다. 주변을 바라보니, 가족, 연인, 친구, 동료들과 함께 온 사람들이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테라스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다. 혼자 온 것은 나뿐이었다. 아름다운 풍경이라도 나를 반겨주려니 싶었지만 무심하게도 안개만이 나를 반겼다. 눈썰매를 타고 안갯속을 내달려 눈 속에 파묻히고 싶은 충동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혼자 나서 혼자 가는 것이 삶이라는 것인데, 어찌 이리도 지독한 고독감이 찾아왔는고. 나약함일까. 열등감일까. 비트겐슈타인이 말하길, '어떤 것에 이름을 붙이면 그에 따라 기능한다'라고 하였는데 어쩌면 내가 이를 고독하다고 생각을 해서 그것에 기능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것도 말장난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문득 내 고독함에 이유를 찾으면서 더 침전되는 마음을 느꼈다. 항상 의문을 품고 호기심을 가지며 행동으로 탐구하던 내 행동원리가 나를 더 약해지게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왜'라는 말을 되뇌니 오히려 나의 존재에 대한 의심까지 발전해 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최대한 말을 할 상대를 찾았다. 한국인이 보이면 무조건 말을 걸었다. 기차에서 마주 보고 있는 사람이 한국 사람인 것 같으면 여행을 잘 즐기고 있냐고 적극적으로 물었다. 옆에서 한국 말이 들리면 한 마디라도 소통을 해서 고립감을 떨쳐내려고 했다. 외국인에게도 잘 못하는 영어를 써가며 열심히 말을 걸었다. 레스토랑 직원에게 궁금하지도 않은 것을 물어보고, 배고프지도 않지만 음식에 대하여 물어보았다. 도미토리 방에서 같은 방을 쓰는 사람들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오늘은 무엇을 했느냐고, 만족스러운 하루였냐고 열심히 물어보았다.
'왜'를 '어떻게'로 바꾸니까 나는 그제야 생산적으로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짧게라도 대화를 하면서 이제야 고독이라는 생각 속에서 빠져나오는 기분이 들었다. 안갯속에서 가려진 것은 알프스가 아니라 내 마음이었다.
'좀 더 계획적으로 움직였어야지', '언어 공부를 더 열심히 했어야지' 같은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이랬더라면 저랬더라면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결국 지금의 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닌가? 그저 나는 내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를 하는 것이 오히려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들은 내가 통제할 수 없다. 할 수 없는 것에 얽매이기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해야 하는 것에 더 집중을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