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 여행의 최대 숙적은 늘 건강이다. 도보여행을 선호하기 때문에 도시에서의 관광도 항상 대중교통을 사용하지 않고 걸어 다니는 나의 특성상 족저근막염과 물집 등으로 발이 정말 고생을 한다. 또한 잠귀가 밝은 예민한 성격에 꼭 잠에서 깨서 화장실을 다녀오는 루틴이 있는 지라 항상 잠이 부족한 상태로 여행을 지속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한번 아프기 시작한 감기몸살은 장장 한 달을 달고 나를 괴롭혔다. 발렌시아에서 마드리드, 톨레도, 코르도바, 그라나다, 말라가에 이르기까지 흘린 콧물이 아마 5리터는 되지 않을까 싶다.
여행 중에 끝없이 쏟아지는 콧물과 재채기 때문에 공중화장실에서 휴지를 엄청 빼서 주머니를 고이 간직하고 다녀도 부족하여 숙소에서 제공해 주는 두루마리 휴지를 작은 휴대용 가방에 넣어 놓고 다니기를 거의 3주. 말라가에 당도하여도 나의 주머니에는 두루마리 휴지가 항상 자리하고 있다.
(여전히 감기 몸살에 아파 죽겠는데, 발렌시아에서의 경험 때문에 결국 나왔다.)
말라가의 성채가 그렇게 보존이 잘 되어 있다고 추천을 많이 받아서 아픈 몸을 이끌고 등산을 하다시피 했다.
1492년 그라나다의 알함브라가 함락되기 이전, 이베리아 이슬람 세력에서 손꼽히는 강력한 요새였다고 하는데, 과연 무어인들의 축성은 경이로운 것이었다. 제법 높은 동산 위에 성을 쌓아 두었는데 성첩이 두텁고 성곽이 삼중으로 되어있어 이미 그 자체로 난공불락의 요새라 할만했다.
또한 무어인들은 성 안에 굉장한 수준의 정원을 곳곳에 만들어 두었는데 가지각색의 꽃들이 피어있어 눈을 즐겁게 해 주었다. 한국은 겨울 한파로 꽃을 볼 수 없는데 이곳을 꽃 향기가 만발하여 폐가 정화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성 내부에 주점이 있는데 제법 높은 곳을 오르느냐고 지친 사람들을 위한 레몬 맥주가 5유로 정도에 판매되고 있었다.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들이키는 레몬 맛의 맥주라니 이 순간만큼은 감기고 나발이고 내 가슴이 뛰는 게 느껴졌다. 한 모금 들이키고 먼바다를 보며 바람을 느끼니 세상 고민이 사라지는 기분이랄까. 이젠 어찌 되어도 상관없을 것 같은 기분이랄까.
성을 내려와 해변을 걸으며 따사로운 햇빛을 느끼고 있자니, 다시 갈증이 맴도는 것 같아서 나에게 스페인의 명물이라 할 수 있는 샹그리아를 한 잔 허락했다. 달콤한 과일과 와인이 잘 어우러지고 동동 띄워 놓은 얼음이 음료를 더 시원하게 만들어 주어서 들이킬 때마다 혈기가 도는 것이 느껴졌다. 10분 정도 스치는 바람에 작은 땀방울들을 흘려보내니 다시 기운이 나서 항구의 잘 정돈된 길을 따라 바다 향수를 즐겼다.
길을 걷다 보니 샹그리아를 마시기 전에 끼니도 때웠고, 레몬 맥주와 샹그리아 때문인지 취기도 살짝 돌아서 누워서 햇빛을 맞으며 휴식을 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주변 벤치에 사람들이 앉아서 지인과 잡담이나 독서, 낮잠 등 다양한 휴양을 즐기고 있는 것을 보니 나도 그들의 분위기에 취해 근처 벤치에 눕게 되었다.
거의 1시간은 잔 것 같았다. 팔걸이에 머리를 대고 다른 팔걸이에 발을 올린 채로 햇빛을 맞으며 자는 것은 전에 없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동안의 피로가 얼마나 누적되어 있었는지, 항상 소매치기를 두려워하며 벤치에서 휴식을 할 때도 사주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았던 나였는데도 정신없이 곯아떨어져 버렸다. 일어나니 다행히도 누가 훔쳐간 것은 없었다. 하도 정신없이 잠을 자서 업어가도 몰랐을 텐데, 소매치기 녀석들은 좋은 기회를 놓쳤다.
부스스한 시야를 눈을 비비적 거리며 또렷하게 하고, 몸을 일으켜 세우니 놀랍게도 몸 상태가 완전히 호전되어 있었다. 아침에만 해도 콧물이 났는데 코가 뻥 뚫려서 맑은 공기를 느낄 수 있었고, 몸살 기운에 식은땀을 흘리고 손발이 차갑던 것도 완전히 치유되어 있었다. 이 놀라운 상태 변화에 이래서 스페인 사람들에게 시에스타라는 낮잠 문화가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냥 길거리 벤치에서 누워서 자기만 했는데 몸에 아픈 기색 하나 없이 활력이 돈다니, 낮잠의 대단함을 느낄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낮잠은커녕 잠을 줄여가며 공부와 일을 병행하다 보니 낮잠 문화에 대해 게으른 문화가 아닌가 하는 편견이 있었는데, 이 시에스타로 인해서 이들이 얻어가는 활력의 힘을 깨달음으로서 일상에 여유를 가지는 낮잠 문화가 아주 삶의 질을 향상하는 문화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