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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이 좋다.

by 레옹

누군가의 추천으로 발렌시아에 왔다. 나는 바르셀로나에서 무리를 한 탓에 심한 감기몸살을 달고 온 상태였다.

야경을 찍겠다고 겨울바람을 산 위에서 4시간이나 맞으며 날이 저물기를 기다렸고, 우산을 깜빡한 나머지 거센 비바람을 얻어맞으며 돌아다녔으며, 동행들과의 술자리를 매일 같이 새벽 2시까지 달렸다. 프랑스와 스위스에서도 이에 못지않게 무리를 하고 다녔으니 어쩌면 감기몸살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다행히 발렌시아는 휴식을 취하기에 적당한 도시라는 이야기를 들었고, 나는 3박 4일의 발렌시아 일정 동안 적어도 2일은 쉬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인생은 뜻대로 되는 일이 드물다고 하더니, 과연 방에서 쉬려고 하니까 방이 너무 추웠다. 에어비앤비로 잡은 나의 숙소는 1년 내내 추위가 없는 기후 특성상 난방 시설이 없이 동굴처럼 매우 서늘한 상태를 유지하는 방이었다. 이불을 둘러싸고 쉬면서 감기몸살을 치유하려고 했더니, 방에 있으면 오히려 악화되는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아픈 몸을 이끌고 방을 나서서 관광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방을 나서자 마주한 발렌시아의 하늘은 정말 경이로웠다. 구름 하나 없는 하늘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한국은 황사니 장마니 하늘이 조용할 틈이 없었는데, 이곳의 하늘은 이러한 모습이 평균이라고 한다. 이 부러운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니 삼천리 화려강산 어쩌고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날씨 좋은 게 깡패다.

구름 하나 없는 하늘이라 그런지 날은 매우 더웠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나는 지경으로 방과의 온도 차이가 도시의 일교차를 능가하는 듯했다. 경이로운 방교차가 아닐 수 없었다...



숙소 근처에 가장 가까운 관광 거리를 찾아보니 시장이 있었다. 생각보다 규모가 매우 큰 시장으로, 온 세상의 산해진미가 모여있는 것처럼 다양한 물산들이 나를 반겼다. 바르셀로나의 보케리아 시장을 열심히 구경하고 온 상태인 데도 비교가 되지 않는 이곳의 북적임과 소음은 감기몸살로 죽어가던 나의 탠션을 끌어올리기 충분했다.



이름은 모르지만 달달함이 당뇨를 부르는 과자들과 스페인을 오면 반드시 먹어야 한다는 굴(사진으로 보면 알겠지만 사람 손바닥만 한 크기의 굴은 정말 살면서 먹어본 굴 중 단연코 최고라 할 수 있었다). 해산물 가게 청년들에게 영업 당해 먹은 우니. 빠에야의 원조인 발렌시아 빠에야까지. 정말 거를 타선이 없는 막강한 타순이 아닐 수 없었다.

아픈 것도 잊고 신이 나서 이것저것 열심히 먹으며 구경하니 그래도 좀 몸이 회복되는 기분이 들었고, 그제야 나는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그런데 왜인지 사람들이 단체로 약속이라도 한 듯 우르르 밖으로 몰려나가는 것이 아닌가. 수상함을 느낀 나는 그들을 따라 시장 밖으로 자리를 옮겼다.



맙소사, 내가 현 스페인 국왕 펠리페 6세를 영접하는 날이 오다니. 아파서 쉬려고 했다가 방이 나를 더 아프게 해서 뛰쳐나왔더니, 사람들을 따라 우연히 마주하게 된 진풍경에 나는 나의 운을 여기서 느끼게 되었다. 아, 나는 산에서 굴러도 산삼을 움켜쥘 놈이구나 싶었다. 아픈 것조차도 불행이 아니라 행운이 되어 돌아오는 것을, 내가 될 놈이 아닐 수가 있는가?



국왕께서는 잠시간의 시간을 군중들에게 허락하고 시선에서 사라지셨다. 듣자 하니 발렌타인 행사차 방문하신 거라고 하던데, 고된 여행 중에 나는 그날이 발렌타인 데이인줄도 모르고 있었다. (허허)

깊은 여운을 남기고 시장을 좀 더 구경하다가 적당히 마무리하고 시장 밖으로 나오니 여전히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운이 나를 따른다고 생각을 하니 하늘만 봐도 그저 기분이 좋아서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듯했다. 분명 발렌시아에 막 도착했을 때에는 몸살 때문에 죽을 것 같아서 내 업보니 어쩌니 이러면서 풀이 죽어 있었는데, 한번 긍정적이 기운이 들어오니 어떤 상황이라도 즐겁게 헤쳐나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실 어쩌면 별 의미 부여할 필요가 없는 일들일 수도 있다. 그저 사람을 만난 것이다. 흔한 감기몸살이고, 그동안 고생을 한 것도 맞다. 시장 음식이야 원래도 좋아하던 것들이니 상황이 우연히 겹쳤을 뿐 잘 살펴보면 이러한 것들은 별 시답잖은 일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것을 받아들이는 나의 태도이다.

누군가는 냉소적으로 '입헌군주제에서 왕이 뭐 별거냐' 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고, 누군가는 감기몸살을 자신의 나약함으로 치부하고 자학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런 태도들이 모이고 모여 냉소적이고 자존감이 없는 사람을 만들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 그런 세상을 만들겠지.

나는 항상 아이처럼 살고 싶다. 호기심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작은 나비의 날갯짓에도 크게 웃으면서 살아가고 싶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세상의 모든 것은 재밌고 활기찬 것이 된다. 나는 그런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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