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무설性無說-흑백논리를 넘어서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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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선하게 태어날까, 아니면 악하게 태어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인류는 수천 년간 논쟁을 벌여왔다. 맹자는 성선설로, 순자는 성악설로 각각 답했다. 하지만 과연 이분법적인 시선만으로 인간의 복잡하고 다층적인 본성을 온전히 설명할 수 있을까?

갓 태어난 아기를 떠올려보자. 그 작은 생명체 앞에서 "이 아이는 선한가, 악한가?"라고 묻는다면 어떤 답이 나올까? 아마도 대부분은 그런 질문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느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여기서 **성무설(性無說)**이라는 새로운 관점을 제안한다. 인간의 본성에는 애초에 선악이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가 선하거나 악하다고 판단하는 모든 특성들은 태어난 후 사회적 환경 속에서 학습되고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백지론의 반복이 아니라, 도덕적 가치라는 렌즈를 통해 인간을 바라보는 완전히 새로운 시각이다.


아기가 엄마를 보고 미소 짓는 순간, 그 미소는 선함의 표현일까? 아니다. 이는 생존을 위한 진화적 프로그래밍일 뿐이다. 배고플 때 우는 것, 아플 때 신호를 보내는 것, 따뜻함을 추구하고 위험을 피하는 것 - 이 모든 것은 생물학적 본능의 영역에 속한다. 마치 철새가 계절에 따라 이동하는 것처럼, 이는 선악과는 무관한 생존 본능이다.

그렇다면 진짜 '선악'은 언제부터 시작될까? 바로 이 본능적 반응을 넘어서는 순간부터다. 다른 아이의 장난감을 빼앗는 것이 나쁘다고 배우는 순간, 할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좋다고 학습하는 순간, 거짓말보다는 진실이 옳다고 인식하는 순간 -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사회적 학습의 영역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경계선이 명확하다는 점이다. 본능은 종족 보존을 위한 생물학적 메커니즘이고, 그 외의 모든 가치판단과 도덕적 행동양식은 후천적으로 습득된다. 실제로 발달심리학자 장 피아제의 연구에 따르면, 아동의 도덕적 판단 능력은 인지 발달과 함께 단계적으로 형성된다. 로렌스 콜버그 역시 도덕 발달 이론을 통해 인간의 윤리의식이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 점진적으로 발달한다는 것을 입증했다. 이렇게 구분하고 나면 인간의 본성을 둘러싼 오래된 미스터리가 훨씬 명쾌해진다.


존 로크의 백지론(Tabula Rasa)은 성무설과 맥을 같이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로크의 백지론이 감각 경험을 통한 지식의 획득에 중점을 둔다면, 성무설은 특별히 도덕적 가치와 선악 판단의 형성에 특화되어 있다.

로크에게 있어 백지는 주로 인식론적 개념이었다. 그는 인간이 어떻게 세상을 알아가는지, 어떻게 개념을 형성하는지에 관심을 가졌다. 반면 성무설은 존재론적이면서 동시에 윤리학적 개념이다. 단순히 '아는 것'을 넘어서, 인간이 어떻게 '선악을 구별하고 도덕적 행위자가 되는가'라는 본질적 문제를 다룬다.

즉, 로크의 백지가 지식으로 채워지는 것이라면, 성무설에서의 백지는 가치관과 도덕적 신념으로 채워진다. 인간이 태어날 때는 도덕적으로 완전한 중립 상태이며, 이후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 비로소 도덕적 행위자로 성장한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인생은 마치 백지 위에 그림을 그려가는 과정과 같다. 부모가 처음으로 "고마워"라는 말을 가르쳐주는 순간, 학교에서 "함께 나누는 것"의 가치를 배우는 순간, 친구들과의 갈등을 통해 '공정함'을 깨닫는 순간 - 이 모든 경험들이 우리 마음의 백지 위에 도덕적 가치들을 하나씩 새겨넣는다.

여기서 희망적인 것은, 잘못 그려진 그림도 언제든지 수정하고 다시 그릴 수 있다는 점이다. 폭력적인 환경에서 자란 사람도 새로운 관계와 경험을 통해 다른 방식의 소통을 배울 수 있고, 반대로 좋은 환경에서 자란 사람도 지속적인 노력 없이는 그 선함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백지 위에 그려지는 내용은 무엇으로 결정될까? 바로 우리가 속한 사회와 문화다. 이는 단순한 개인적 경험을 넘어서, 거대한 집단적 학습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에는 부모에 대한 절대적 복종이 최고의 덕목이었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는 개인의 자율성과 독립적 사고가 더 중요한 가치로 여겨진다. 19세기 서구 사회에서는 개인의 성취와 경쟁이 미덕이었지만, 일부 북유럽 국가들은 공동체의 복지와 협력을 더 강조한다.

이러한 차이는 어디서 오는가? 인간의 본성이 시대나 지역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일까? 아니다. 인간의 본성은 동일하지만, 그 위에 입혀지는 사회적 학습의 내용이 다를 뿐이다. 마치 같은 캔버스 위에 서로 다른 그림이 그려지는 것처럼 말이다.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독일의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질서와 정확성'을 배운다. 이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동서독 분단이라는 역사적 혼란을 겪으며 안정성과 예측가능성을 절실히 필요로 했던 사회적 맥락에서 비롯되었다. 반면 브라질의 아이들은 '축제와 자유로운 표현'을 자연스럽게 익히는데, 이는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어우러진 환경에서 창의성과 포용성이 생존과 발전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일본 아이들이 '집단의 화합'을 중시하게 되는 것은 좁은 섬나라에서 제한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개인보다 공동체의 이익이 우선되어야 했던 지리적·역사적 필연성 때문이다. 미국 아이들이 '개인의 주장'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이민자들이 새로운 땅에서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야 했던 개척 정신과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다문화 사회의 특성이 반영된 것이다.

이처럼 각 문화의 가치관은 그 사회가 직면했던 현실적 과제들에 대한 적응 전략이었으며, 어느 쪽이 옳고 그른 문제가 아니라 서로 다른 환경에서 발전한 사회적 학습의 결과일 뿐이다. 신경과학에서 발견된 거울뉴런의 존재는 이러한 사회적 학습이 뇌 차원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타인의 행동을 관찰하고 모방하며 자연스럽게 그 사회의 가치관을 내재화한다.


"그렇다면 도덕적 혼란이 오지 않을까?"

이런 우려를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성무설은 결코 도덕적 상대주의나 무정부주의를 옹호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큰 책임감을 요구한다. 인간이 선악의 기준을 사회로부터 배운다면, 우리 각자는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지에 대해 더욱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타고난 성향이나 기질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물론 사람마다 타고난 기질의 차이는 있다. 어떤 아이는 활발하고 어떤 아이는 조용하다. 하지만 이러한 기질적 차이와 도덕적 선악은 별개의 문제다. 활발한 성격이 선하거나 악한 것이 아니듯이, 내향적인 성향도 마찬가지다. 성무설은 이러한 개인차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가치판단이 기질과는 독립적으로 학습된다는 점을 강조할 뿐이다.

"환경 결정론으로 빠질 위험은 없는가?"

성무설이 환경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같은 환경에서도 개인의 선택과 해석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 사르트르가 말했듯이,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은" 존재다. 우리는 주어진 환경 속에서도 끊임없이 선택하고, 그 선택을 통해 자신을 만들어간다. 성무설은 이러한 선택의 자유와 그에 따르는 책임을 더욱 명확히 한다.


성무설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들이 다르게 보인다.


형사정책과 교육 영역에서의 변화

범죄자를 단순히 '악한 인간'으로 낙인찍고 격리하는 것보다는, 그들이 어떤 사회적 학습 과정을 거쳐 그런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 이해하고 재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된다. 북유럽 국가들의 교화중심 형사정책이 높은 사회복귀율을 보이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교육 현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에게 단순히 "착해라", "나쁜 짓 하지 마라"고 말하는 대신, 어떤 환경과 경험이 그들을 더 나은 시민으로 성장시킬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벌칙보다는 모델링이, 강요보다는 자연스러운 학습 기회가 더 효과적일 것이다.

기업과 조직 문화에서의 적용

기업에서도 성무설의 관점을 적용할 수 있다. 직원의 '나쁜 태도'를 타고난 성격 탓으로 돌리기보다는, 어떤 조직 문화와 시스템이 그런 행동을 유발하는지 살펴보고 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구글이나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회사들이 심리적 안전감을 중시하는 조직문화를 만드는 것도 이런 원리에 기반한다.

미디어와 정치 영역에서의 함의

미디어가 어떤 가치를 전파하는가, 정치인들이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가 하는 것도 사회 전체의 도덕적 학습에 큰 영향을 미친다. 성무설의 관점에서 보면, 이들은 단순한 정보 전달자나 권력자가 아니라 사회적 교육자로서의 책임을 갖는다.

가정에서의 양육 방식도 달라질 수 있다. 부모는 아이의 '타고난 성향'을 탓하거나 포기하는 대신, 자신이 어떤 모델을 보여주고 있는지, 어떤 가치를 전달하고 있는지 돌아볼 수 있게 된다.


성무설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희망이다.

만약 인간이 태생적으로 악하다면, 우리는 평생 자신의 본성과 싸워야 하는 비극적 존재가 된다. 반대로 태생적으로 선하다면, 세상의 악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지만 성무설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언제든지 변화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다.

70세에 자원봉사를 시작한 사람, 범죄자에서 사회복지사가 된 사람, 이기적이던 청소년이 타인을 배려하는 어른이 된 경우들 - 이 모든 것들이 성무설이 옳다는 증거다. 인간의 본성이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든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

동시에 이는 경고이기도 하다. 좋은 환경에서 자란 사람도 안주하고 노력을 게을리한다면 그 선함을 잃을 수 있다. 지속적인 자기성찰과 노력 없이는 아무도 도덕적 완성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성무설은 우리에게 두 가지 상반된 것처럼 보이는 선물을 동시에 준다: 자유와 책임.

자유는 우리가 타고난 본성의 포로가 아니라는 데서 온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는 변명에서 벗어나, 언제든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자유 말이다. 과거의 상처나 잘못된 학습이 현재의 우리를 완전히 규정하지는 않는다.

책임은 우리 각자가 자신의 행동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데서 온다. 우리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다른 사람의 '백지' 위에 무엇인가를 새겨넣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와 책임의 변증법은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질문하게 만든다: "내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가치는 무엇인가?", "내가 만들어가는 사회는 어떤 인간들을 길러낼 것인가?", "나는 오늘 누군가의 백지 위에 어떤 그림을 그려주었는가?"


인간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인간은 그저 가능성이다.

생물학적 본능이라는 기본 하드웨어 위에 사회적 학습이라는 소프트웨어가 설치되어 만들어진 존재가 바로 우리다. 이 소프트웨어는 언제든지 업데이트되고 수정될 수 있다. 어떤 버전을 설치할 것인지는 우리 자신과 우리가 만드는 사회의 선택에 달려 있다.

성무설은 단순한 철학적 사변을 넘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실천적 지침을 제공한다. 이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매일매일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창조자가 될 수 있다.

오늘 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아직 채워지지 않은 백지가 있다. 그리고 당신 역시 계속해서 새로운 페이지를 펼쳐가고 있다. 그 위에 무엇을 그려넣을지는 우리 모두의 선택이다.

인간의 본성에 선악이 없다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무한한 변화의 가능성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이미지 출처 http://www.gjon.com/news/articleView.html?idxno=58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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