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5일 6시 반, 파리에 도착했다. 빛의 도시라는 이명과 다르게 샤를 드 골 공항과 파리 시내는 어둡기 그지없었다. 겨울의 흐린 날씨와 빠른 일몰의 영향도 고려해야 하지만 기대와는 다른 흐름에 당황스러움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허둥댈 시간은 없었다. 15시간의 비행으로 인해 나의 컨디션은 땅을 치고 있었고 그로 인해 파리의 지하철을 이용해 숙소로 가겠다는 계획은 안중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나는 히든카드인 우버를 불러 숙소인 나씨옹 광장의 더 피플 파리 네이션 호텔로 향했다.(56유로 나왔다.)
다행스럽게도 숙소의 첫인상은 좋았다. 도미토리지만 깔끔한 분위기의 2층 침대, 푹신하고 따듯한 침구류, 프라이버시를 위한 침대 커튼, 침대와 일체형인 코드와 조명까지. 박 당 5만 원 이하인 방인데도 굉장히 뛰어난 퀼리티에 파리에서의 여행이 매우 즐거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빠르게 짐을 풀고 난 후, 나는 장시간의 비행으로 인한 피로와 무너진 신체리듬을 회복하기 위해 따듯한 샤워를 했다. 기대 이상으로 따듯한 물이 잘 나오고 깔끔한 시설을 보유하고 있어서 내려간 텐션은 평소의 수준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짐 정리, 시설 체크, 샤워 등 모든 정리를 빠르게 마무리하고 나니, 어느새 시간은 9시였다. 한국시간으로 15일 아침 7시에 깨서 파리 시간으로 저녁 9시까지 장장 22시간 동안 깨어있는 상황. 15시간의 비행 동안 시끄러운 기내와 통로 자리로서 수문장 역할, 기내식과 간식 섭취, 기내 기압에의 적응 등 다양한 걸림돌로 인해 잠을 아예 잘 수 없었던 터라 나는 간만의 신체 리듬 부조화를 마주하여 심한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다만 민감한 수면 습관으로 나는 타지에서는 잠을 쉽게 자지 못하는 편이었고, 심한 졸림과 피로를 마주함에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위기다'
착륙한 지 몇 시간 지나지도 않았는데 마주한 위기는 나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앞으로 수개월의 여행을 지속해야 하는데 수면 환경에 민감한 성격이라니, 자충수도 이런 자충수가 없었다. 이런 식이면 내일의 여행에도 지장이 간다는 생각과 함께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직 내가 덜 힘들구나?'
인간은 극한의 환경에 빠르게 적응하는 생물이다. 고난의 역치를 빠르게 자기표준화시킨다고나 할까. 어지간한 고통과 피로는 인간에게 역치를 늘려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나는 지금 내가 역치를 늘려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틸 수 없게 되면 몸이 먼저 잠에 들 것이다. 결국 나의 정신과 나의 몸 간에 괴리로 인해 나는 초라함을 느끼고 있었다. 몸이 버틸만해서 가만히 있는데 피곤하다고 아우성치는 정신이라니, 우스운 일일 따름. 결과적으로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잠에 들었다.
문득 정신과 몸의 관계에 의문이 생긴다. 몸이 정신보다 우위에 있는 것인가?
나는 흔한 정신만능론자 중 하나다. 정신력이 강한 사람은 멈추지 않는다. 아무리 강대한 고난을 마주하더라도 의식이 끊어질 때까지 자신을 조종한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 상황에도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려고 노력하고 최종적으로 의식이 끊어지고 나서야 노력을 멈춘다.
그렇다면 몸이 강한 사람은 어떨까 몸이 강한 사람은 극심한 피로와 고통에 대한 저항성이 높다. 엄밀히 말하면 방어력이 높거나 체력이 방대해서 적은 피해를 입게 된다고나 할까. 이런 몸에 정신이 따라오지 못하는 경우, 정신은 피폐해져서 내구도 자체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몸과 정신이 따로 놀기 시작하는 것이다.
정신이 무너지면 몸은 움직일 수는 있지만 의지를 잃는다. 그러나 몸이 무너지면 정신은 의식이 끊어진다. 즉, 정신은 몸이 쓰러지면 함께 쓰러지지만, 몸은 일단 동작은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지가 없는 행동은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저 소리 없는 아우성이 아닌가?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 사실 나는 그것이 그 자체로도 의미가 아닌가 싶다. 침묵은 그 자체로 힘을 가질 때가 있듯이, 아우성도 소리가 없음에도 그 힘을 가질 때가 있고, 의지가 없는 행동도 의미를 가질 때가 있다. 결국 뭘 할지 모르더라도, 뭐라도 해야 뭐라도 된다는 것이다.
먼 타지에 오고 나니 나는 나의 초라함을 피부로 알게 된다. 때로는 자신을 어려운 환경에 두어야 잊고 살았던 자신의 민낯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나'라는 또 다른 일면임을. 소크라테스는 이런 것을 두고 말하지 않았을까?
"너 자신을 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