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는 게 정말 싫다. 어릴 적에 지고 오면 부모님께 크게 혼나는 환경이었고, 나 역시 질 때마다 패배라는 낙인을 머릿속에서 떨쳐내기 힘들었다. 그 낙인은 보이지 않는 계급장처럼 나의 존재를 정의하고 통제하는 것만 같았다. 항상 무언가를 해서 성과를 내야만 그 계급장이 한 단계씩 올라가는 것 같았고, 나는 어릴 적부터 태권도, 검도, 수영, 배드민턴, 피아노, 미술, 올림피아드 수학, 로봇, 소프트웨어 등등의 학원을 다니며 성과를 만들어야만 했다. 내가 하고 있지만 그 속에 나는 없었다. 계급장이 나를 대체한다. 물을 끝없이 마셔대고 있는 것 같은 착각 속에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고 내 속만 타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자존감이 높지 않다. 오뚝이처럼 계속 일어나기는 한다만 가랑비에 옷 젖듯이 사소한 것에도 내 자존감은 무겁게 내려앉아 버린다. 운동을 하다가도 힘이 들어 잠시 쉴 때면 '그러면 그렇지. 한심한 몸뚱이.' 하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하고, 공부를 하다가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난 이 정도인가?' 싶은 마음이 위장을 비틀어 버리는 듯하다. 가끔은 뭘 위해 이러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내가 하던 것들을 놓아버리고는 한다.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나면 드는 생각은 '이제 뭘 해야 하지?', '하면 다른 결과가 있으려나?' 하는 또 다른 가랑비가 내 자존감을 적신다. 가라앉은 자존감은 고개를 들어도 저 어두운 아래에서 미로에 갇힌 미노타우루스처럼 같은 길을 되돌아간다. 내 자존감은 미로 속에서 실존한다.
이러한 부분들이 나에게 가져온 단적인 결과는 게임으로 예를 들 수 있다. 나는 항상 이기고 싶어서 게임을 하고, 이기면 자존감을 회복한다. 내 실력에 자부심을 가진다. 그 자부심으로 나는 나를 입증하기 위해 랭크게임을 돌리지만, 항상 이길수만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로 인해 나는 내 알량한 자부심을 지키기 위해 한 번의 승리 후에 게임을 끈다. 그리고 한 번의 승리를 위해 많은 패배를 목도하는 순간, 나의 자부심은 어린아이의 투정 같은 추레한 자존심이 되어버린다. 길바닥에서 울어버리듯이 분노를 표출하고 자조 섞인 원망을 담아 타인과의 공생을 거부한다. 사회적 자살을 택해버리는 것이다.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성공의 꿈을 안고 대학을 다니고, 직장을 다니고, 학원을 다닌다. 그 속에서 일어나는 작은 성과들은 나의 자부심이 되고,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더 좋은 대우를 찾는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 늘 순탄치 않은 과정들이 섞이게 되고 그 과정을 이겨내지 못하면 사회적 자살을 택하게 되는 것이다.
강산도 십 년이면 변하는데 한국의 경쟁 사회는 수십 년을 뿌리 박힌 체 굳건하다. 무엇을 위한 경쟁이냐고 물으면 대답이 항상 다르다. 어릴 적에는 '다른 애들도 하니까', 고등학교 때는 '좋은 학벌을 얻으려고', 대학 때는 '대기업 직장을 얻으려고', 직장 때는 '더 많은 대우를 받으려고'. 장황한 경쟁의 길 속에 늘 성공만 있다면 좋겠지만 이 길은 소수의 성공만을 남긴다. 끊임없이 걸러지고 솎아내진 사람들은 맹목적인 경쟁 속에서 앞만 보고 달리는 것 외에는 배운 것이 없기 때문에 도태당했음을 이겨내지 못하고 사회적 자살을 택하게 된다.
이러한 부담 속에 한국에서 나이를 먹는 것은 항상 반갑지 않다. 사회가 정한 기준이 레이저 절단기처럼 다가오는 기분이다. 점점 무언가를 해내야 하는 조급함과 조금이라도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탐욕심을 자극한다. 이러한 것들은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 미래의 나는 같은 사람인데도 다른 사람이어야 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한국 나이로 30살인 것도 최근에야 알았다. 만 나이가 정식 나이가 되고, 20대 중후반인 것에 취해 있는 동안 일반적인 사회의 기준에 도달한 것도 모르고 있었다. 프랑스에 떠나는 나의 정신을 레이저 절단기가 썰어버리는 기분이 든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통감하는 중이다. 뭔가 새로운 것을 하려고 하면 사회가 감시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이게 옳은 사회인가 싶다.
이 사회의 경쟁은 누구를 위한 경쟁인가? 누구를 위한 승리인가? 누구를 위하는 것은 맞나?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의 흐름에 한국의 경쟁은 제 살 파먹기가 따로 없다. 앞만 보고 달리는 한국은 앞을 만드는 외국에게 도태당하게 될 것이다. 일제강점기를 다시 되풀이하고 싶은 것인지 하는 짓이 그때와 다를 것이 없다. '하나를 위한 모든 것'을 지향하는 한국은 '모든 것을 위한 하나'와 '그 하나들의 모든 것'에 이길 수 없다. 부품을 찍어내는 공장은 공장을 만들 수 있는 사람과 그 사람들의 집단에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다. 또한 부품이 되어버린 것만 같은 나의 모습이 참 우스운 일이다. 한국을 벋어나 세상을 구르다 보면 부품 같은 모습에서 깨지고 마모되어 조금은 제멋대로인 모습으로 바뀔 수 있을지 호기심이 동한다.
출발 4일 전이다. 여전히 프랑스어는 어렵지만 나름대로 문장을 만들며 말하는 나를 보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있다는 느낌에 가슴이 뛴다. 스마트폰 어플로 외국인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교류를 하고 있으면 한국의 경쟁에서 벋어난 것 같은 편안함을 느낀다. 짐을 싸는 과정들 하나하나가 나에게 나를 돌아보는 과정처럼 느껴진다. 이기고 지고의 흑백논리에서 벋어나 나를 돌아보면서 참 많은 것을 경험했구나 싶기도 하다. 떠나기 전이되니 참 다양한 생각들이 나를 채운다. 생각을 정리해야겠다는 마음은 생기지 않는다. 글을 쓰면서 머릿속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니, 오히려 마구잡이로 떠오르는 생각들이 달갑게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구나 하고 나를 알게 되는 것이 즐거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