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부여는 환상인가?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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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3시, 세상이 가장 조용해지는 시간이다. 이때 우리는 문득 깨닫는다.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겨왔던 모든 것들에 대해 의문이 든다는 것을. 가족을 위해 산다고 말하지만, 그 가족이라는 것이 과연 절대적 의미를 가지는가? 사랑이 삶의 이유라고 하지만, 그 사랑이 정말 영원하고 숭고한 것일까? 성공을 위해 노력하지만, 성공이란 무엇이며 왜 추구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들은 불편하다. 하지만 피할 수 없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마주하게 되는 실존적 의문들이다. 어쩌면 이 질문들 자체가 인간이라는 존재의 핵심에 닿아있을지 모른다.

교회 첫째 줄에 앉은 80세 할머니가 있다. 60년 넘게 매주 일요일마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기도를 한다. 그녀의 눈에는 깊은 확신이 담겨있다. 아니, 정확히는 확신하려는 간절함이 담겨있다. 그녀가 살아온 80년 동안 전쟁도 있었고, 가난도 있었고,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도 있었다. 기도가 기적을 일으킨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매주 그 자리에 앉는다.

왜일까?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신이 없다면 그녀의 80년이 완전한 무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고난도 무의미, 선행도 무의미, 사랑도 무의미. 그녀는 이 진실을 견딜 수 없다. 그래서 믿으려 노력한다. 매주 일요일마다.

이것이 종교가 가진 힘이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정교한 의미 부여 시스템. 하지만 동시에 가장 검증하기 어려운 체계이기도 하다. 천국도, 지옥도, 윤회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 그럼에도 수십억 명이 이를 삶의 근거로 삼는다. 이것이 집단적 자기기만일까, 아니면 인간이 발견한 깊은 지혜일까?


"당신 없이는 살 수 없어요." 연인들이 속삭이는 이 말을 과학은 다르게 해석한다. 도파민, 세로토닌, 옥시토신이라는 화학물질들의 복합적 작용. 진화적으로 번식과 양육에 유리하도록 설계된 생물학적 메커니즘. 상대방이 특별해 보이는 것도, 영혼의 교감을 느끼는 것도, 영원한 행복을 꿈꾸는 것도 모두 뇌의 화학작용으로 설명된다.

더 흥미로운 것은 사랑의 시간적 한계다. 연구에 따르면 열정적 사랑의 평균 지속 기간은 18개월에서 3년이다. 그 후에는 열정이 식고 애착이 남는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 "영원한 사랑"을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사랑이 일시적 화학작용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인간관계의 많은 아름다움이 퇴색되기 때문이다.


성공이라는 개념도 마찬가지다. 현대 사회는 성공을 새로운 종교로 만들어냈다. 돈을 많이 벌고, 높은 지위에 오르고, 사회적 인정을 받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되었다. 하지만 이런 성공의 기준은 과연 누가 정한 것일까? 부의 축적이 인간 존재의 본질적 목적일까? 아니면 특정 사회 시스템이 개인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만들어낸 가치일까?

흥미롭게도 성공한 사람들의 행복도가 일반인보다 특별히 높지 않다는 연구 결과들이 있다. 오히려 정상에 오른 후 더 큰 공허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성공이라고 믿었던 모든 것이 도달해보니 예상과 달랐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의 경우는 어떨까? 화가가 캔버스 앞에서 느끼는 창조의 충동, 음악가가 선율에 몰입하는 순간, 작가가 완벽한 문장을 찾았을 때의 희열. 이런 경험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예술가들은 종종 자신의 작업이 "소명"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과연 우주 어딘가에서 그들을 부르는 목소리가 있을까? 아니면 이것 역시 뇌가 만들어내는 착각에 불과할까?

반 고흐는 생전에 단 한 점의 그림밖에 팔지 못했다. 객관적으로 보면 그의 예술적 노력은 무의미했다. 하지만 그가 느꼈던 창조의 기쁨과 고통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그 순간들이 그에게는 분명히 의미가 있었다. 그것이 주관적 환상이었다고 해서 가치없는 것일까?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도 비슷한 질문을 던진다. 올림픽에서 자국 선수가 금메달을 딸 때 느끼는 자부심, 모교가 승리했을 때의 기쁨,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 이런 감정들의 근거는 무엇일까? 국가도, 학교도, 고향도 결국 인간이 만든 인위적 구분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런 소속감에서 깊은 의미를 찾는다.

더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어떨까? 정원을 가꾸는 할아버지, 스탬프를 수집하는 아이, 마라톤을 완주하려는 직장인. 이런 개인적 열정들이 가진 의미는 무엇일까?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세상을 바꾸지도 않는 이런 작은 의미들. 그것들이 단순한 시간 때우기에 불과할까?


이런 관찰들은 우리를 더 큰 질문으로 이끈다. 우주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존재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허블 우주망원경이 보여주는 광활한 우주에서 지구는 먼지보다 작은 점이다. 우리 은하계에만 2천억 개의 별이 있고, 관측 가능한 우주에는 2조 개의 은하가 존재한다.

시간의 규모도 마찬가지다. 우주의 나이는 138억 년이고, 인류의 역사는 30만 년에 불과하다. 개인의 수명은 평균 80년 남짓이다. 만약 우주의 역사를 1년으로 축약한다면, 인류의 등장은 12월 31일 밤 11시 52분이고, 개인의 인생은 1초도 채 되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들이 우주적으로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솔직히 말해서,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죽음이라는 사실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소크라테스도 죽었고, 예수도 죽었고, 석가모니도 죽었다. 뉴턴도, 아인슈타인도, 간디도 죽었다. 그들이 남긴 사상과 업적이 있지만, 그것도 언젠가는 사라진다. 인류가 멸종하면 그들을 기억할 존재도 없다.

더 당황스러운 것은 죽음의 무작위성이다. 선한 사람이 일찍 죽고, 악한 사람이 천수를 누리기도 한다. 천재가 어린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평범한 사람이 백 세까지 살기도 한다. 여기에 무슨 의미나 정의가 있을까?

죽음은 우리의 철학을 묻지 않고, 우리의 선행을 고려하지 않는다. 죽음 앞에서 모든 의미는 무력하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죽는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만약 의미가 단순히 주관적 구성물에 불과하다면, 왜 인간은 보편적으로 정의, 아름다움, 진리와 같은 가치를 추구하는가? 문화와 시대를 초월하여 나타나는 이런 보편적 가치들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칸트는 이에 대해 흥미로운 답을 제시했다. 인간의 이성 구조 자체가 이런 보편적 가치들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도덕법칙이 하늘의 별만큼이나 경이롭다고 말한 그의 통찰은 여전히 유효하다. 비록 그 법칙이 인간 이성의 산물일지라도, 그것이 인간 존재에게 미치는 영향은 실재한다.

더 나아가, 인간이 의미를 추구한다는 사실 자체가 진화적으로 어떤 기능을 했을 것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의미 없는 존재들이 생존과 번식에 유리했다면, 의미를 추구하는 성향은 진화 과정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그런데 의미 추구 성향이 남아있다는 것은,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생존에 도움이 되었다는 의미가 아닐까?

집단 협력을 위해서도 공유된 의미는 필수적이다. 아무런 공통분모가 없는 개인들이 모여서 복잡한 사회를 구성할 수는 없다. 종교, 이념, 문화라는 공유된 의미 체계가 있어야 대규모 협력이 가능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의미는 단순한 환상을 넘어서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 실용적 도구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 더욱 흥미로운 일이 벌어진다.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오히려 더 깊은 의미가 생겨나기도 한다. 빅터 프랑클의 경험이 그 예다. 나치 수용소에서 모든 것을 잃었지만, 바로 그 극한 상황에서 인간 정신의 가장 깊은 자유를 발견했다. "상황을 선택할 수는 없지만, 그 상황에 대한 태도는 선택할 수 있다"는 통찰을 얻었다.

이것이 역설이다. 의미가 주어지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는 의미를 창조할 수 있다. 절대적 의미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상대적이지만 개인적으로는 깊이 있는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스의 이야기를 새롭게 해석했다. 시지프스는 바위를 산 위로 굴려 올리지만, 바위는 다시 굴러떨어진다. 영원히 반복되는 무의미한 노동. 하지만 카뮈는 "시지프스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고 말했다. 시지프스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 무의미함 자체를 자신의 영역으로 만들 때 가능한 일이다.

이것이 부조리에 대한 인간의 창조적 반응이다. 의미를 억지로 찾으려 하지도 않고, 의미 없음에 절망하지도 않고, 단지 그 상황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의식적인 의미 창조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사랑이 화학작용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연인을 소중히 여기고, 성공이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종교가 인간의 창작물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웃을 돕는 것 말이다.

이것은 자기기만이 아니다. 이것은 창조다. 화가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릴 때, 그 그림이 객관적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 그림은 분명히 존재하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 우리가 삶에 부여하는 의미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의미 부여의 핵심은 "잠정성"에 있다. "이것이 절대 진리다"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나에게는 이것이 의미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우리를 독단에서 해방시킨다. 자신의 의미가 절대적이라고 믿을 때 우리는 타인의 의미를 부정하게 된다. 하지만 모든 의미가 인간의 창조물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다양성을 포용할 수 있다.

종교전쟁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각자의 신이 유일한 진짜 신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종교가 인간의 의미 추구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갈등의 필요가 줄어든다. 각자의 방식으로 실존적 불안을 달래고 있을 뿐이다.

더 깊은 차원에서 보면, 의미를 창조하는 능력 자체가 하나의 의미가 될 수 있다. 인간은 무의미한 우주에서 의미를 창조해내는 독특한 존재다. 돌은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식물도 의미를 추구하지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왜?"라고 묻고, 답을 찾으려 하고, 답이 없으면 스스로 만들어낸다.

이 능력 자체가 경이롭지 않은가? 설령 우리가 만드는 모든 의미가 주관적 구성물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창조해내는 능력은 실재한다. 그리고 그 능력을 통해 우리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


의미는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다. 타인과의 연결을 통해 증폭되고 풍성해진다. 당신이 창조한 의미가 다른 사람에게 위로가 될 때, 그 의미는 더 견고해진다. 당신의 사랑이 상대방을 행복하게 만들 때, 그 사랑은 단순한 화학작용을 넘어선 무엇이 된다. 당신의 노력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때, 그 노력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선다.

결국 "의미 부여는 환상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엄밀한 과학적 관점에서 보면 의미는 뇌가 만들어내는 주관적 경험에 불과할 수 있다. 하지만 체험적 관점에서 보면 의미는 삶을 살 만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실재다.

중요한 것은 이 딜레마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의미가 절대적 진리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우리 삶에 가져다주는 가치를 부정하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가장 지혜로운 태도는 의미 부여를 하나의 예술로 보는 것일지 모른다. 음악이 공기의 진동에 불과하지만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주듯이, 의미도 신경세포의 활동에 불과할 수 있지만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준다.

그렇다면 "의미 부여는 환상인가?"라는 질문보다 "어떤 의미를 창조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더 생산적일 수 있다. 환상이든 실재든, 우리는 의미와 함께 살아간다. 그렇다면 그 의미를 의식적으로, 창조적으로, 그리고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

세상은 여전히 무의미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무의미한 세상에서 의미를 창조해내는 인간의 능력은 그 자체로 경이로운 일이다. 그것이 주관적 구성이든 객관적 실재든,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인간인 이유가 아닐까?


(이미지 출처 https://kr.pinterest.com/pin/43136108911125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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