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지금 이 글을 읽기로 '선택'했다. 정말 그럴까?
오늘 아침 당신이 마신 커피, 출근길에 확인한 스마트폰 알림, 점심 메뉴 선택, 퇴근 후 넷플릭스에서 본 영상. 이 모든 것이 당신의 자유로운 의지의 결과라고 믿는가? 우리는 매 순간 선택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선택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현대인은 역사상 가장 많은 자유를 누린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가장 정교한 지배 메커니즘 속에서 살아간다. 통제와 억압, 그리고 유혹. 이 세 가지 힘은 서로 다른 얼굴로 우리의 의식과 행동을 조종한다. 그 차이를 구별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자유를 외치면서도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혀 지낼 것이다.
새벽 4시, 응급실에서 생사의 갈림길에 선 환자를 살리는 의료진을 상상해보자. 그들의 손놀림은 철저히 통제되어 있다. 수술 프로토콜, 투약 지침, 감염 예방 수칙. 의학의 엄격한 규칙들이 그들의 모든 행동을 규정한다. 이것이 억압인가? 아니다. 이는 생명을 구원하기 위한 통제다.
통제의 본질은 목적의 명확성에 있다. 비행기 조종사가 관제탑의 지시를 따르는 것, 오케스트라 연주자가 지휘자의 박자에 맞추는 것, 축구 선수가 팀 전술을 실행하는 것. 모두 더 큰 목표 달성을 위한 자발적 통제의 사례다.
건전한 통제는 투명하다. 왜 그런 규칙이 필요한지 그 이유가 명확하다. 상호적이다. 통제하는 자와 통제받는 자 모두가 그 규칙의 적용을 받는다. 한시적이다. 목적이 달성되면 통제는 해제된다. 최소한이다. 목적 달성에 필요한 최소한의 제약만을 가한다.
하지만 통제는 언제나 타락의 유혹에 직면한다. 코로나19 초기, 각국 정부가 시행한 이동 제한 조치를 보라. 처음에는 공중보건이라는 명확한 목적을 위한 통제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일부 권력자들은 이를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려 했다. 통제가 억압으로 변모하는 순간이었다.
2019년 홍콩의 거리를 메운 시위대를 기억하는가? "Be Water"라는 구호 아래 물처럼 흘러다니며 저항했던 그들이 맞선 것은 바로 억압이었다. 억압은 통제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드러나는 권력의 날것이다.
억압의 첫 번째 특징은 일방성이다. 지배하는 자의 의지만이 존재하고, 지배받는 자의 목소리는 철저히 무시된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시민들이 외쳤던 "우리도 인간이다"라는 절규가 바로 이 일방성에 대한 저항이었다.
두 번째는 총체성이다. 억압은 삶의 한 영역에 머무르지 않는다. 사상, 표현, 이동, 결사, 심지어 사랑까지 모든 것을 통제하려 한다. 세 번째는 무목적성이다. 억압의 진정한 목적은 공익이 아니라 권력 자체의 유지다.
현대의 억압은 정교하다. 먼저 개인을 공동체로부터 분리시킨다. 다음으로 저항 능력을 제거한 후, 생존 자체를 지배자에게 의존하게 만든다. 마침내 피억압자로 하여금 자신의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만든다. "원래 세상은 이런 거야"라며 체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21세기의 지배 메커니즘은 더욱 교묘해졌다. 이제는 강제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이 스스로 원하게 만들면 되기 때문이다.
페이스북의 창립자 마크 저커버그가 2004년 하버드 기숙사에서 "The Facebook"을 만들 때, 그는 단순히 친구들과 연결되는 플랫폼을 상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그 플랫폼은 30억 명의 사용자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하여 그들의 행동을 예측하고 조작하는 거대한 기계가 되었다.
유혹의 혁명적 측면은 그것이 '동의'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이다. 아무도 당신에게 인스타그램을 보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아무도 아마존에서 물건을 사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당신이 '원해서' 하는 일이다. 하지만 그 '원함'은 과연 당신 것일까?
현대의 유혹은 인간의 뇌과학적 메커니즘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이용한다. 스마트폰의 푸시 알림은 불규칙한 간격으로 오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는 카지노의 슬롯머신과 같은 원리다. 예측 불가능한 보상이 가장 강력한 중독성을 만들어낸다.
인스타그램의 '좋아요' 수, 틱톡의 조회수, 링크드인의 '축하합니다' 메시지. 이 모든 것은 인간의 근본적 욕구인 '타인의 인정'을 미끼로 사용한다. AI 알고리즘은 당신의 과거 행동 패턴을 분석하여 당신이 클릭할 확률이 가장 높은 콘텐츠를 정확히 예측한다. 넷플릭스가 당신에게 추천하는 영화는 우연이 아니다. 수천 가지 변수를 계산한 결과다.
더 무서운 것은 유혹이 단독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광고업계는 당신의 무의식적 욕구를 자극한다. 소셜미디어는 당신의 관심사와 성향을 수집한다. 전자상거래는 '원클릭 구매', '무료배송', '한정판매' 등의 기법으로 충동구매를 유도한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시즌제', '클리프행어' 등으로 지속적인 관심을 유지시킨다.
현실에서 이 세 메커니즘은 따로 놀지 않는다. 중국의 사회신용시스템을 보라. 법적 테두리 내에서 시민의 행동을 점수화하고(통제), 낮은 점수를 받은 시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며(억압), 높은 점수를 받으면 할인 혜택 등의 이익을 제공한다(유혹). 결과적으로 시민들은 스스로 '모범적' 행동을 하게 되고, 이는 다시 체제를 강화하는 순환구조를 만든다.
한국의 교육 현실도 마찬가지다. 교육과정과 입시제도라는 합법적 틀(통제), 다양성을 무시한 획일화와 경쟁 강요(억압), "좋은 대학 = 성공한 인생"이라는 신화(유혹). 학생과 학부모는 이 시스템을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그 안에서 성공하기를 원한다.
미셸 푸코가 예언한 '감시 사회'는 이제 현실이 되었다. 하지만 그 모습은 조지 오웰이 상상했던 것과는 다르다. 빅브라더가 텔레스크린으로 시민을 감시할 필요가 없다. 시민들이 스스로 스마트폰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기록하고 공유하기 때문이다.
구글은 당신이 내일 뭘 검색할지 안다. 아마존은 당신이 언제 뭘 살지 안다. 넷플릭스는 당신이 어떤 기분일 때 어떤 영화를 볼지 안다. 이들은 당신보다 당신을 더 잘 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삼중 구속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첫 번째 단계는 인식이다. 물고기는 물의 존재를 모른다고 했던가. 우리를 둘러싼 보이지 않는 힘들을 의식하는 순간, 저항이 시작된다.
통제에 대해서는 질문하라. 이 규칙이 정말 필요한가? 누구를 위한 규칙인가? 더 나은 대안은 없는가? 억압에 대해서는 침묵을 거부하라. 연대하라. 대안을 창조하라. 유혹에 대해서는 성찰하라. 나는 지금 정말로 이것을 원하는가? 이 욕구는 어디서 왔는가?
구체적인 실천도 필요하다. 스마트폰 없는 시간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라. 정보를 수동적으로 소비하지 말고 능동적으로 분석하라. 소비는 투표다. 당신이 돈을 쓰는 곳이 당신이 지지하는 세상이다. 원자화된 개인은 쉽게 조작당한다. 진정한 인간적 관계와 공동체를 만들어라.
가장 근본적인 해법은 교육의 변화다. 지식을 주입하는 교육이 아니라 비판적 사고를 기르는 교육, 순응을 요구하는 교육이 아니라 창의성을 계발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핀란드가 세계 최고의 교육 선진국이 된 비결은 학생을 신뢰하고, 교사를 존중하며, 다양성을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교육 혁명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 당신 자신부터 평생 학습자가 되라. 끊임없이 질문하고, 가정을 의심하며, 새로운 관점을 탐구하라.
우리는 지금 인류사에서 가장 특별한 시점에 서 있다. 과거 어느 때보다 강력한 지배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동시에, 그에 맞설 수 있는 도구들도 우리 손에 들려 있다.
인터넷은 감시의 도구가 될 수도, 해방의 무기가 될 수도 있다. AI는 조작의 수단이 될 수도, 창조의 파트너가 될 수도 있다. 글로벌 경제는 착취의 시스템일 수도, 연대의 플랫폼일 수도 있다. 결정하는 것은 우리다.
통제와 억압, 그리고 유혹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것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진정한 자유로 향하는 지도를 그리기 위함이다. 자유는 제약의 부재가 아니라 의식적 선택의 능력이다. 타인의 조종이 아닌 자신의 의지로 살아가는 것이다.
당신은 지금도 선택하고 있다. 이 글을 끝까지 읽을 것인가, 중간에 그만둘 것인가. 여기서 읽은 내용을 그냥 넘길 것인가, 실천의 시작점으로 삼을 것인가. 기존의 삶을 그대로 유지할 것인가, 변화를 위한 첫걸음을 내딛을 것인가.
이번만큼은, 정말로 당신의 선택이다. 자유는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매일매일, 매 순간순간 쟁취해야 하는 것이다. 그 쟁취의 과정에서 우리는 비로소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