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16일, 304명의 생명을 앗아간 세월호 참사. 2016년 최순실 게이트로 드러난 국정농단. 2018년 미투 운동이 폭로한 권력형 성범죄들. 이 모든 사건들에서 우리는 한 가지 공통된 절망을 목격했다. 진실을 외치는 목소리는 있었지만 그 목소리는 너무나 작았고, 정의를 갈망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그 마음은 너무나 무력했다.
"정의는 힘이 없으면 무력하고, 힘은 정의가 없으면 폭력적이다." 350여 년 전 파스칼이 던진 이 통찰은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예언한 듯 생생하다. 왜 정의는 이토록 힘없어 보이는가? 그리고 이 절망적 현실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정의가 힘없어 보이는 근본적 이유는 그 본질 자체에 숨어 있다. 정의는 태생적으로 신중하다. 모든 사람의 입장을 고려해야 하고, 장기적 결과를 예측해야 하며, 보편적 원칙과의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이는 마치 정밀한 수술을 하는 외과의사와 같다.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기에 모든 동작이 신중하고 느릴 수밖에 없다.
반면 불의는 단순하고 즉흥적이다. 부패는 오늘 당장의 이익을 가져다주고, 거짓말은 불편한 진실을 즉시 덮어버린다. 폭력은 저항을 순식간에 제압하고, 차별은 복잡한 경쟁을 간단한 배제로 해결한다. 불의는 마치 도끼와 같다. 거칠고 무식하지만 빠르고 효과적이다.
이러한 속도의 차이는 현대 사회에서 더욱 극명해진다. 24시간 뉴스 사이클, 실시간 SNS, 즉석 여론조사의 시대에서 사람들은 즉각적인 결과를 원한다. 하지만 정의는 여전히 토론하고, 검토하고, 합의하는 민주적 과정을 거쳐야 한다. 마치 고속도로에서 우마차를 타고 달리는 것과 같은 절망적 상황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들이 종종 정의의 발목을 잡는다. 2020년 라임펀드 사태를 보자. 수많은 서민 투자자들이 피해를 입었지만, 복잡한 금융 구조와 법적 책임 소재의 모호함으로 인해 진상규명과 처벌은 지지부진했다. 피해자들은 "법대로 하자"고 외쳤지만, 정작 그 법은 가해자들을 보호하는 방패막이 되어버렸다.
법조계에는 "악법도 법"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좋은 법도 돈"이라는 냉혹한 진실이 더 자주 목격된다. 변호사 수임료, 소송비용, 시간적 손실을 감당할 수 있는 자가 승리하는 게임. 이것이 우리가 목격하는 법정의 민낯이다.
더 복잡한 문제는 제도 설계 과정에서 발생하는 권력의 비대칭성이다. 법과 제도를 만드는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자원(시간, 돈, 전문지식, 네트워크)을 가진 집단과 그렇지 못한 집단 간의 격차가 존재한다. 그 결과 조세 피난처를 이용한 절세는 '합법적 세무전략'이 되지만 생계형 절도는 즉시 처벌받고, 복잡한 금융상품을 통한 이익은 '혁신'으로 평가받지만 단순한 생존 전략은 '편법'으로 규정되기도 한다. 물론 이는 의도된 차별이라기보다는 제도 설계 과정에서의 대표성 부족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악이 승리하는 데 필요한 유일한 조건은 선량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에드먼드 버크의 이 경고는 오늘날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한국 사회에서 정의가 힘을 잃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선량한 다수의 침묵이다.
직장에서 갑질을 목격해도 "내 일이 아니야"라고 생각하고, 부정부패를 알아도 "신고해봤자 달라질 게 없어"라고 체념한다. 온라인에서 혐오와 가짜뉴스가 확산되는 것을 보면서도 "귀찮아"라며 스크롤을 내린다. 이러한 개인적 합리성이 집단적으로는 정의의 고립을 만들어낸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방관자 효과'가 전 사회적으로 확산된 것이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하겠지"라는 생각이 모든 사람에게 있을 때, 결국 아무도 행동하지 않는다. 정의는 이런 침묵의 바다에서 홀로 외치는 목소리가 되어버린다.
특히 한국 사회의 "눈치 문화"와 "뒷담화 문화"는 이 문제를 더욱 악화시킨다. 공개적으로는 침묵하지만 사적으로는 불만을 표출하는 이중적 태도가 정의로운 연대를 가로막는다. 카카오톡 단체방에서는 분노하지만 회사 회의에서는 조용하고, 술자리에서는 비판하지만 공론장에서는 입을 다문다.
디지털 시대는 정의에게 새로운 도전을 던졌다. 정보의 민주화는 분명 긍정적이지만, 동시에 거짓 정보의 범람이라는 부작용을 낳았다. MIT의 한 연구에 따르면 트위터에서 거짓 정보가 진실보다 약 6배 빠르게 확산되는 경향을 보인다고 한다. 물론 이는 특정 플랫폼과 기간을 대상으로 한 연구로 모든 상황에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자극적인 정보가 신중한 정보보다 더 빠르게 퍼지는 현상 자체는 부인하기 어렵다.
2020년 총선과 2022년 대선을 거치면서 우리는 이를 생생히 목격했다. 팩트체크는 있었지만 이미 잘못된 정보는 바이러스처럼 퍼진 후였다. 정정보도는 있었지만 사람들은 이미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믿기로 결정한 후였다. 진실을 추구하는 정의는 마치 화살이 쏘아진 후에야 활을 드는 격이 되었다.
더욱 교묘한 것은 '반쪽 진실'을 이용한 조작이다. 완전한 거짓말은 쉽게 반박되지만, 사실에 해석을 섞고 맥락을 비트는 방식은 더욱 위험하다. 통계를 악용하고, 전후 사정을 생략하며, 감정에 호소하는 프레이밍으로 여론을 조작한다. 정의는 이런 정교한 조작술 앞에서 순진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정말 정의는 힘없는 존재일까? 역사는 정반대의 증거를 제시한다. 인류사의 모든 진보는 당시에는 "힘없던" 정의의 승리였다.
1955년 로자 파크스가 버스에서 자리를 양보하기를 거부했을 때, 그녀는 혼자였다. 하지만 그 작은 저항이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으로 이어졌고, 결국 미국 전체의 인종차별 철폐 운동을 촉발했다. 1960년 4.19 혁명도 마찬가지다. 마산의 한 고등학생 김주열의 죽음에서 시작된 분노가 전국적 민주화 운동으로 확산되어 독재 정권을 무너뜨렸다.
1987년 6월 항쟁 역시 그렇다.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는 시민들의 목소리는 처음에는 소수였다. 하지만 이연희의 죽음, 박종철의 고문치사 사건이 알려지면서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했고, 결국 민주화를 이뤄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의 물리적 힘은 압도적이었지만, 정의에 대한 시민들의 열망이 더 강했다.
물론 모든 역사적 변화가 정의의 승리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르완다 대학살 등은 불의가 압도적 힘을 발휘한 참혹한 사례들이다. 또한 정의로운 운동이 시작되었다가 중도에 좌절되거나 왜곡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장기적 추세다. 이런 참혹한 사건들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는 인권 의식이 확산되고 국제적 개입 메커니즘이 강화되며, 책임자 처벌을 위한 국제형사재판소 같은 제도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정의는 때로 후퇴하고 좌절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전진하는 방향성을 보여준다.
21세기 디지털 혁명은 정의에게 전례 없는 기회를 제공했다. 전통적으로 언론과 권력기관이 독점했던 정보 유통 채널이 민주화되었다. 이제 평범한 시민도 스마트폰 하나로 전 세계에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
2018년 미투 운동이 대표적 사례다. 서지현 검사의 용기 있는 폭로가 SNS를 통해 확산되면서, 수많은 피해자들이 침묵을 깨고 목소리를 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무고한 피해자가 발생하거나 성급한 단죄가 이루어지는 부작용도 있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그동안 침묵 속에 묻혀있던 성폭력 문제가 사회적 의제로 부상했고, 결국 법과 제도의 변화까지 이끌어냈다.
크라우드펀딩은 경제적 약자였던 정의로운 활동가들에게 독립적 재정 기반을 제공한다. 시민사회단체들이 정부나 기업의 후원에 의존하지 않고도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온라인 서명 운동은 개별적 의견을 집단적 힘으로 결집시키는 강력한 도구가 되었다.
블록체인 기술은 투명성과 추적가능성을 높여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 AI는 대량의 데이터에서 부정의 패턴을 찾아내고, 빅데이터 분석은 숨겨진 진실을 드러내는 데 도움을 준다. 이는 마치 정의에게 천리안과 순풍귀를 선사한 것과 같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정의의 힘을 키울 수 있을까?
첫째, 전략적 연대의 구축이다. 정의는 혼자서는 약하지만 함께하면 강하다. 중요한 것은 단순한 연대가 아닌 전략적 연대다. 2016년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가 큰 성과를 거둔 요인 중 하나는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각자의 역할을 하면서도 하나의 목표를 향해 조직적으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대규모 시민 운동이 항상 긍정적 결과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며, 집단 감정에 휩쓸려 성급한 판단을 내릴 위험도 있다.
노동조합, 시민단체, 종교단체, 전문가 집단들이 개별 이익을 넘어 정의로운 가치를 중심으로 연대할 때, 그 힘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중요한 것은 이런 연대가 일회성이 아닌 지속성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둘째, 제도적 개혁을 통한 정의의 구조화다. 개인의 선의에만 의존하는 정의는 한계가 있다. 정의가 일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필요하다. 공익신고자 보호법의 실효성 강화, 집단소송제 도입, 징벌적 손해배상 확대, 사법부의 독립성 보장 등이 그것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정보공개의 확대다. 정부와 공공기관의 모든 정보를 원칙적으로 공개하고, 예외적으로만 비공개하는 시스템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투명성이야말로 정의의 가장 강력한 무기기 때문이다.
셋째, 개인 차원의 도덕적 각성과 실천이다. 거대한 제도 변화도 결국 개인의 작은 선택에서 시작된다. 일상생활에서 마주치는 작은 불의에도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다른 사람의 어려움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마음, 당장의 손실을 감수하더라도 장기적 선을 추구하는 지혜가 축적될 때 정의는 더 큰 힘을 갖게 된다.
이는 거창한 영웅적 행동을 의미하지 않는다. 온라인에서 가짜뉴스를 공유하지 않는 것, 차별적 발언에 침묵하지 않는 것, 부당한 대우를 받는 동료를 외면하지 않는 것 같은 일상적 실천들이 모여 큰 변화를 만들어낸다.
정의가 힘없어 보이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정의의 시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의는 단거리 경주가 아닌 마라톤을 뛰고 있다. 단기적으로는 불의가 더 효과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정의가 더 지속가능한 성과를 만들어낸다.
물론 이것이 불의의 즉각적 해악을 간과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부정부패로 인한 피해, 폭력으로 인한 상처, 차별로 인한 고통은 지금 당장 실재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동시에 정의의 누적적 효과도 인정해야 한다. 불의로 얻은 이익이 때로는 오래 지속되기도 하지만, 정의로 이룬 성과는 더욱 견고한 토대 위에 서 있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민주주의, 인권, 법치주의,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는 모두 과거의 "힘없던" 정의가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룬 승리의 결과다. 18세기에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던 사람들은 소수였고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19세기에 여성 참정권을 요구하던 사람들은 급진적이라는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오늘날 이런 가치들은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 되었다.
현재 힘없어 보이는 정의들도 마찬가지다. 기후 정의, 동물권, 디지털 인권, 인공지능 윤리 같은 새로운 의제들이 지금은 소수의 관심사처럼 보이지만, 미래에는 보편적 가치가 될 것이다.
절망적으로 보이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인류 사회는 여러 지표에서 점진적 개선을 보이고 있다. 스티븐 핑커 같은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장기적으로 폭력은 감소하고 인권은 확산되는 추세다. 물론 이런 분석에 대해서는 서구 중심적 시각이라는 비판도 있고, 최근의 권위주의 확산이나 불평등 심화 같은 반대 증거들도 제시되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만 봐도 분명한 진전이 있었다. 50년 전과 비교하면 정치적 자유는 크게 확대되었고, 30년 전과 비교하면 사회적 차별은 상당히 줄어들었으며, 20년 전과 비교하면 소수자에 대한 포용도 늘어났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방향성은 분명하다.
물론 여전히 많은 문제가 있고, 새로운 형태의 불의도 등장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방향성이다. 세상은 더 투명해지고, 더 평등해지며, 더 포용적이 되어가고 있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다.
힘없는 정의에 대한 긴 고찰을 마무리하며, 우리는 하나의 중요한 진실을 마주한다. 정의는 결코 힘없지 않다. 다만 그 힘이 발현되는 방식과 시간이 우리의 성급한 기대와 다를 뿐이다.
정의는 즉각적 효과보다는 누적적 변화를 통해 힘을 발휘한다. 한 사람의 작은 용기가 다른 사람에게 영감을 주고, 그 영감이 또 다른 용기를 낳아 결국 사회 전체를 변화시키는 거대한 물결이 된다. 이는 마치 나무를 심는 것과 같다. 씨앗을 심는 순간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거대한 숲이 된다.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완벽한 정의를 한 번에 실현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내일의 정의를 위한 씨앗을 심는 것이다. 작은 연대를 만들고, 작은 제도를 개선하며, 작은 용기를 실천하는 것. 이런 작은 행동들이 모여 큰 변화를 만들어낸다.
역사는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정의는 패배하지 않는다. 때로는 지연되고, 때로는 굴절되지만, 결코 멈추지 않는다. 오늘 힘없어 보이는 정의가 내일은 세상을 바꾸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절망하지 말자. 대신 행동하자.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정의의 씨앗을 심어가자. 그 씨앗들이 모여 언젠가는 더 정의로운 세상이라는 거대한 숲을 이룰 것이다. 이것이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 숭고한 사명이자, 미래 세대에 대한 우리의 책임이다.
(이미지 출처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08071000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