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때 김현승 시인의 ‘눈물’을 읽고 나서 나는 소위 말하는 ‘문학소녀’가 되었다. 눈물을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라고 표현할 수 있다니, 그때부터 시인들은 나의 우상이었다.
대학생일 때 한 동아리에서 책을 읽고 토론을 했다. 80년대 학번의 대학생들에게는 다양한 책들을 읽고 사고를 넓힐 수 있는 자유가 없었다. 음지에서 어둠의 경로로 입수한 책들을 읽던 운동권 학생들의 책 목록과는 또 달랐지만 우리들에게는 ‘어둠의 자식들’,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등의 사회적 부조리가 주제인 책들이 필독서였다.
어느 날 나는 김승옥 작가의 ‘무진기행’과 ‘서울, 1964년 겨울’을 읽었다. 그 감수성, 그 표현력, 그 문체라니. 난 김승옥 작가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김현승 작가와 김승옥 작가 때문에 정작 나는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안간힘을 써서 몇 줄을 끄적거려 보면 유치한 문장들만 남을 뿐이었다. 그들처럼 쓸 수 없는데 글을 쓰는 건 세상에 쓰레기를 더하는 행위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글을 써볼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용기를 얻게 된 것은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흐른 후에 한 웹소설을 읽고 나서였다. 그 단순하고 유치한 표현, 그 과장된 전개, 그 진부한 클리셰라니. 혀를 끌끌 차며 읽다가 말았는데 그게 베스트셀러라고 했다. ‘왜 이렇게 가벼운 세상이 된 거야!’라며 꼰대 세대다운 한탄을 하는 중에 나의 내면에서 은근한 희망이 싹트고 있는 걸 느꼈다.
내가 글을 쓴다면 그것의 주제는 단연코 ‘달리기’여야 했다. 영어선생으로 살아온 세월이 짧지 않으니 영어 학습에 관련된 이야기 또는 두 아이를 키우며 겪은 국내와 미국의 입시에 관련된 이야기가 더 전문성이 있을 텐데 왜 나는 달리기를 이야기하고 싶을까? 20~30년 이상의 경력을 갖고 국내외의 유명마라톤 대회에서 풀코스를 수십 차례 완주해 낸 마라토너들도 침묵하고 있는데 풀코스는커녕 10킬로미터 부문에 딱 1번 참가했을 뿐인 초초보 러너주제인 내가 무슨 객기로 달리기 이야기를 하겠다는 걸까?
‘가벼운 세상’이 내게 용기를 준 것 같다. 프로여야만, 적어도 프로에 근접한 사람만이 얘기할 자격이 주어지는 세상이 더 이상 아닌 것 같다. 사람들은 어설픈 아마추어들에게도 박수를 보내는 것 같다. 그 아마추어들이 뜨거운 가슴으로 진짜 이야기만 하고 있다면.
내 자신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왜 달리고 있는지, 왜 계속 달리고 싶은지를.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아직까지 알지 못한다. 누가 달려야 한다고 등 떠민 적이 없다. 달리기를 안하면 생계가 곤란한 것도 아니고 건강에 큰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달리기가 즐거움만을 주는 것도 아니다. 고통스럽게 느낀 순간도 많았고 두려움이 몰려들 때도 자주 있었다.
“Because it is there” (산이 거기 있으니까’) 산에 왜 오르는지에 대한 질문에 영국의 한 유명 산악인이 이렇게 대답했다. 왜 달리냐는 질문에 나도 이런 식으로 밖에는 답할 수가 없다. ‘달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달린다.’ 무심코 트레드밀 위에서 걸어봤고, 어쩌다 보니 30분 동안 달릴 수 있는 훈련을 해내게 되었고, 한강변에 달릴 수 있는 길이 있었고, 아침이면 버릇처럼 러닝화의 줄을 묶고 있었고, 5킬로미터 달리기를 끝낸 내 모습이 대견스러울 뿐이었고, 달리지 않는 미래의 내 모습은 상상하기 싫을 뿐이었다. ‘내 한계를 시험한다, 도전 정신을 기른다, 인생을 바꾸겠다’ 따위의 거대한 의도는 결단코 없었다.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한 가지 단서는 있다. 얼마 전에 ‘행복’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행복이란 실체가 없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정의될 수 있고 정답도 있다’라는 것이 강의의 핵심이었다. ‘행복’은 관념적인 생각이나 가치가 아닌 구체적인 ‘pleasure, 쾌의 합’이라는 것이다. 소소한 pleasure (쾌)를 자주 느끼는게 행복이란다. 그리고 이 pleasure를 느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변수는 ‘외향성’ 이라고 한다.
성격유형검사(MBTI)의 결과로 판단하면 나는 내향적인 인간이다. 행복해 질 수 있는 가장 큰 변수를 잃었으니 나는 행복해지는데 아주 불리한 입장이다. 작더라도 많은 행복변수들을 찾는 노력을 할 수밖에 없다. 5킬로미터 달리기의 끝은 성취감이고, 그 성취감이 주는 pleasure는 작지 않아서 상쾌한 기분을 하루 종일 유지시켜준다. 그 pleasure를 일주일에 3~4일은 느끼고 있으니 나에게 꽤 큰 행복의 변수를 선물해주고 있는 셈이다.
‘달리기’라는 단어를 연상하자마자 내 머리 속에서 수많은 생각들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오며 발화시켜 달라고 아우성을 친다. 얼른 카테고리를 만들어 그 생각들을 각각의 방에다 분류시켜 놓고 나니 많은 재물을 창고 속에 쌓아놓고 자물쇠를 채워놓은 것 같이 든든하다. 방을 하나씩 열어 아무렇게나 쌓여있는 단어와 문장들을 이리 저리 엮어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이 작업이 나에겐 많은 의미와 pleasure를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