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잔의 레드 와인은 혈액 순환에 좋고 심장병을 예방한다?
위의 말은 나 같은 와인 애호가들에게 일종의 면죄부다.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몸에 좋은 '약'을 먹는다는 기분. 덕분에 우리는 죄책감 없이 코르크를 따고, "건배!(Santé, 건강을 위하여)"를 외친다.
하지만 냉정하게 따지고 보면 세계보건기구(WHO)의 기준엔, 와인은 ‘적당히 마시면 괜찮은 술’이 아니라 그냥 1군 발암 물질이다.
물론 와인을 한 잔 마신다고 당장 암에 걸리는 건 아니다. 하지만 WHO의 입장은 단호하다. "알코올 섭취에 있어 안전한 기준(Safe Level)은 없다." 위험은 마시는 양과 빈도에 비례해 누적될 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1군 발암 물질이 '장수의 비결'이자 '건강식품'으로 둔갑했을까? 이 거대한 아이러니 뒤에는 1990년대, 과학적 관찰을 마케팅으로 폭발시킨 사건이 있었다. 바로 '프렌치 패러독스(French Paradox)'다.
1. 1991년 11월 17일, 방송이 만든 기적
미국 와인 소비 역사는 이 날짜 전과 후로 나뉜다.
당시 미국 CBS 시사 프로그램 <60분(60 Minutes)>은 "프렌치 패러독스"라는 제목의 방송을 내보냈다. 내용은 이랬다.
"프랑스인은 미국인보다 담배도 많이 피우고, 버터나 치즈 같은 고지방식을 즐기는데도 심장병 사망률이 미국인의 절반 수준이다. 그 비결은 식사 때마다 마시는 레드 와인이다."
이것은 당시 의학계의 흥미로운 관찰 결과였다. 하지만 미디어와 와인 업계는 이 '가설'을 '확정된 진실'인 양 퍼뜨렸다. 반응은 폭발적이었고 방송 직후 미국 내 레드 와인 판매량은 방송 후 몇 주 만에 약 40%나 폭등했다. 건강을 걱정하던 사람들은 비타민 대신 와인을 샀고 와인 업계는 웃었다. "술은 몸에 나쁘다"는 인식을 깨고, 와인에 '건강'이라는 프리미엄 이미지를 입히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2. 통계의 함정: 부자라서 오래 사는 것이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역학자들은 이 신화를 냉정하게 다시 분석하기 시작했다. 과연 그들이 와인 때문에 오래 사는 걸까? 여기서 '상관관계'와 '인과관계'의 혼동이 드러난다.
당시 와인을 매일 즐기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대체로 소득 수준이 높고, 여유가 있으며, 정기 검진을 받고, 야채와 올리브유를 곁들인 좋은 식사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즉, 그들이 건강한 건 와인 성분 때문이라기보다, '와인을 마실 정도의 경제력과 전반적인 생활환경' 덕분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 통계는 이런 사회경제적 변수를 간과하고, 오직 "와인을 마시니 건강하다"는 달콤한 결론만 부각한 것이다.
3. 'J커브'의 배신: 안전한 술은 없다
"그래도 적당히 마시는 사람이 아예 안 마시는 사람보다 사망률이 낮다는 데이터(J커브)는 사실 아닌가?"
이것 역시 '아픈 금주자(Sick Quitter)' 오류로 반박되었다. 술을 아예 안 마시는 그룹 중 상당수는 '원래 몸이 약해서 못 마시는 사람'이거나 '이미 병이 나서 의사가 술을 끊으라고 한 환자'들이었다.
건강한 음주자와, 이미 아픈 비음주자를 비교하니 당연히 술 마시는 사람이 더 건강해 보일 수밖에 없다.
이 오류를 제외하고 다시 분석한 최신 연구들의 결론은 냉정하다. 2018년 의학 저널 <랜싯(The Lancet)>은 전 세계 195개국 데이터를 분석한 뒤 이렇게 발표했다.
"건강 손실을 최소화하는 알코올 소비량은 0이다.."
4. 레스베라트롤의 진실: 쥐는 되고 인간은 안 된다
프렌치 패러독스의 근거로 가장 많이 쓰인 단어가 '레스베라트롤(Resveratrol)'이다. 포도 껍질에 있는 항산화 물질이 심장을 튼튼하게 한다는 논리인데 물론 성분 자체는 좋은 기능을 할 수 있다.
문제는 '양(Dose)'이다. 레스베라트롤이 사람 몸에서 유의미한 치료 효과를 내려면 하루에 얼마나 마셔야 할까? 연구에 따르면, 와인 수백 잔에서 천 잔 이상을 매일 마셔야 한다.
심장병 예방하겠다고 하루에 와인 수백 잔을 마신다면, 심장마비보다 알코올 중독이나 간 경변으로 먼저 죽을 것이다. 와인 한 잔에 들어있는 레스베라트롤은 생물학적으로 미미한 수준이다. 항산화 효과를 원한다면 알코올 리스크를 감수하며 와인을 마실 게 아니라, 차라리 포도 주스를 마시거나 영양제를 먹는 게 훨씬 합리적이다.
5. 알코올은 알코올일 뿐
인정할 건 인정하자. 와인은 '신비의 명약'이 아니라 '향기로운 알코올'이다.
알코올이 몸에 들어오면 아세트알데히드라는 독성 물질로 분해된다. 이것은 DNA를 손상시키고 세포 변형을 유발한다. 물론 개인의 유전적 해독 능력이나 생활 습관에 따라 위험도는 다르겠지만, 아무리 비싼 와인이라도 그 본질이 에탄올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와인은 심장에 좋다"는 말은 "다크초콜릿은 당뇨에 좋다"거나 "담배는 스트레스 해소에 좋다"는 말과 비슷하다. 아주 작은 이득(심혈관 이완 등)이 있을 순 있어도, 전체적인 해로움(발암 위험, 간 손상)을 덮을 수는 없다.
6. 결론: 약이 아니라 '쾌락'으로 마시자
그렇다면 와인을 마시지 말라는 건가? 아니다. 나 역시 와인을 가끔(?) 즐긴다.
다만, 자신을 속이지는 말자는 것이다.
우리가 와인을 마시는 진짜 이유는 혈관 청소를 위해서가 아니라 취기가 좋아서, 음식 맛을 돋워줘서, 분위기가 좋아서 마시는 것이다. 즉, 건강이 아니라 즐거움(Pleasure)을 위해 마시는 것이다.
와인은 훌륭한 기호식품이지만, 약국에서 파는 약은 아니다. "건강을 위하여"라고 건배를 외치되, 속으로는 "오늘의 즐거움을 위하여"라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정직한 태도다.
본 연재글은 향후 도서 출판을 목적으로 기획/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