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중첩
"평균은 다수를 안정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다수의 안정은 결국 개별 가능성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
세계가 완전히 소거되기 직전, 네 가슴의 은줄이 수축을 멈추고 오히려 팽창했다. 그것은 외부의 당김에 저항하는 방식이 아니라, 스스로 밀도를 높이며 안쪽으로 통로를 여는 방식에 가까웠다. 빛에도 두께가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가늘어지지 않았고, 단일한 선이 아니라 미세한 결을 가진 다층 구조처럼 보였다. 실이 아니라 여러 개의 중첩된 섬유 다발, 하나로 이어진 연결이 아니라, 겹겹이 포개진 경로처럼.
새로운 세계로 들어온 너의 시야가 이중으로 겹쳐진다. 중간계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니면 새로운 차원으로의 회귀? 이곳에는 네가 처음 감각하는 생소한 곡면 구조가 존재했지만, 그 위로는 또 다른 공간의 윤곽들이 포개졌다. 직선과 곡선이 동시에 존재하는 기묘한 공간. 죽음 이후에나 갈 수 있을 거라고, 아니면 영영 상상 속에만 존재할 것이라고 짐작하던 그런 모습의 세계이다. 네가 발을 딛고 있는 곳은 비어 있었으나, 동시에 단단한 바닥의 감각도 전달되었다. 두 세계의 좌표, 두 차원의 감각이 동시에 활성화된 것이라면....
생각이나 의식은 더 또렷하고 오히려 명료해서 호흡의 감각도 여기저기서 동시에 일어나는 현상처럼 느껴졌다. 세계 전체가 너와 함께 숨을 쉬었다. 한 번은 여기에서, 또 한 번은 저기에서.
숨을 깊이 들이마실 때 공기는 차갑고 건조했다. 너의 몸을 거쳐 내쉴 때 공기는 데워졌지만 이내 다시 건조해졌다. 형광등의 불빛보다 조도가 낮은 빛이 너의 공간 즉, 천장이라고 생각되는 곳을 채우고 있었고 벽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공간 (진짜 네가 알고 있던 '벽'과는 형태가 달랐지만)에는 종이인지 아니면 천인지 알 수 없는 '평면'을 가진 같은 물질들이 빼곡히 붙어 있었다. 숫자도, 글자도, 점도 아닌 온갖 중첩과 연결을 보여주는 정체 모를 표식들이 그 위를 덮고 있었다.
너는 이제 그곳의 가운데 앉아 있는 그곳의 ‘너’를 보고 있다. (이것을 '본다'라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는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를 두드리고 있다. 너의 세계에서 키보드나 컴퓨터라고 불리던 것과 비슷하지만 기계와는 다른 물질이다. 오히려 '그것이 너를 두드리고 있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훨씬 적절할 것이다. 너의 얼굴 쪽은 캄캄하고 어둡다. 네가 보려고 가까이 다가갈수록 초점이 점점 흐려져서 뭉그러지는 형태를 지녔고 다가갈수록 왜인지 멀어지는 것처럼 거리나 공간이 왜곡되어 있었다. 이것이 네가 지금 '보는 것'의 실체이고 이것이 이 세계의 실체이다. 그러나 '몸'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형태와 그것의 자세, 즉 두드리는 팔이나 어깨의 기울기 등은 익숙할 정도로 규칙적이고 리드미컬하다.
'내가 선택하지 않았던 세계. 평균으로 회귀하지 않고, 이탈했을 가능성. 타인과 세계의 평가 밖으로 나가서, 보장도 안정도 없는 시간을 감수했을 세계. '
지금 이곳의 너에게도 은줄은 동일하게 뻗어 있었다. 그리고 그 선은 어딘가에서 너의 것과 맞닿아 있었다. 교차점은 보이지 않았지만, 진동을 통해 공유되고 있음을 느꼈다. 다른 존재의 감각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는데 오직 그것과만 연결되어 있었고, 그것을 네가 진동으로 알고 있다는 것이 너에게도 낯설 뿐이었다. 모든 감각 이전에 그저 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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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간이 지나가고 어느 순간 시야 한편에서 붉은 선이 나타나, 은줄의 교차 지점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마치 외부의 접속을 탐지하듯 공간 자체의 밀도가 다시 조정되었고, 두 세계 사이의 중첩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때, 눈앞에서 보이는 ‘네’가 고개를 들었다. 얼굴은 여전히 캄캄하고 어두웠지만, 시선의 방향만은 명확했다.
“돌아갈 수 없어.”
음성 신호가 아니라, 은줄을 통해 직접 전달되는 파동이었다. 언어가 아니어서 그 의미는 너의 의식 안으로 흘러들었고 너는 즉각 이해했다. 동시에 또 다른 파동들도 함께 흘러들었다.
- 맞고 틀린 것, 판단받고 판단하는 것 없음.
- 안정적인 상태, 과정, 제도와 시스템, 보상, 수입 없음.
- 사회, 체계도 없으며 역할, 갈등, 신뢰도 없음.
- 비교, 두려움, 좌절, 분노, 불안 없음.
- 네가 창조하지 않는 한 너 이외의 다른 것은 존재할 수 없음.
- 타인, 타자, 심지어 세계마저 네가 만들어낸 환영. 따라서 너의 얼굴과 존재, 의식은 매 순간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하고 사라짐.
- 자아 없음. 영원 없음. 존재 없음. 없음. 없음. 없음. 없음......
“회수 프로토콜을 실행합니다.”
세계의 구조가 급격히 수축하면서 붉은 선이 은줄을 향해 더 가까이 접근했다. 최후의 단절을 위해.
그 순간 네 안에서는 의문이 생겼다. 만약 이 연결이 단순한 꿈이나 환상이 아니라면, 만약 모든 이탈자가 각자의 다른 가능성과 은밀히 중첩되어 있다면, 이 시스템은 왜 그것들을 차단하려 하지?
평균은 다수를 안정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다수의 안정은 결국 개별 가능성의 희생과 축소를 전제로 한다. 은줄이 한 번 더 맥동하며 진폭을 키웠고 이 세계의 ‘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너는 알게 되었다. 은줄은 단일한 통로나 하나의 가능성, 하나의 자아만 연결된 것이 아니다. 무수한 선택 가능한 자아와 세계들이, 각자의 좌표에서 여전히 살아 움직이고 있다. 지금 네가 보고 있는 것은 그중 하나에 불과하다.
붉은 절단선이 이제 은줄의 바로 앞까지 도달했다. 연결을 끊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나는 이제 어디로 가게 되는 걸까? 어느 쪽이 현실이고 어느 쪽이 허구인지, 판단 기준은 더 이상 명확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네가 보는 네 얼굴의 윤곽이, 다시 또렷해지고 있었다. 이 변화가 회복의 징후인지, 완전한 이탈의 신호인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그때 저쪽에서 너의 얼굴이 아주 미세하게 웃었다.
(5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