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너만 모르는 세계

5화. 붕괴의 기원

by ASTER

“돌아갈 수 없어.”


그 말이 끝나자마자, 붉은 절단선은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대신, 멈춘 채로 미세하게 진동했다. 마치 누군가 그 선을 쥐고 있는 듯한, 어떤 의도가 개입된 정지였다. 너는 그제야 깨닫는다. 이 세계의 움직임들, 네 눈앞의 형체와 진동, 이 모든 것이 자동으로 작동하는 시스템이 아님을. 누군가가 지금도 너를 ‘지켜보고’ 있다.

은줄은 가슴 깊은 곳에서 시작되어 네 앞에 선 다른 너의 심장 부근으로 이어져 있었다. 방금 전까지도 희미하던 그의 얼굴은 점점 또렷해지고 있었고, 그 표정은 이상하리만치 평온했다. 네가 느끼는 공포나 불안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안정감. 그는 이미 결론을 알고 있는 존재처럼 보였다.


붉은 선이 다시 갑자기 속도를 높인다. 찰나의 순간, 휙- 은줄이 잘린다.

그러나 끊어지는 소리는 나지 않는다. 대신 섬세하고 깔끔하게 잘리지 못한 전선처럼 엉성한 단면 사이, 은빛의 섬유 다발 안쪽에서부터 어두운 점이 번져 나오기 시작한다. 끊어져 너덜너덜해진 단면은 이제, 살아있는 손가락 마디처럼 분화되고 벌어지며 서로를 끌어당긴다.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넷이 되고... 완전한 단절이 아니다. 은줄에서 나온 또 다른 은줄. 오염된 접속.


그 순간, 공간이 흔들린다. 중간계는 그 이름처럼 모든 것이 안정적이지 않았다. 빛의 움직임에 따라 사물이나 형체의 표면이 시시각각 변화되었고, 지금 너의 발 아래쪽 바닥도 픽셀들이 깨진 듯 분해되어 흔들린다. 세계의 프로그램은 여전히 오류를 바로잡지 못하고 렌더링 되는 듯하다. 저 멀리서 네가 보는 또 다른 ‘너’들의 실루엣이 겹쳐지며 번진다.


둘, 셋, 넷, 다섯—


한 명이 아니다! 동일한 얼굴을 한 존재들이 겹겹이 중첩되며 나타난다. 각자의 표정은 미묘하게 다르다. 어떤 너는 두려워하고, 어떤 너는 냉소하고, 어떤 너는 이미 모든 걸 포기한 듯 고개를 숙이고 있다. 여러 버전의 네가 임시로 겹쳐지는 교차지점. 그들 모두가, 이제 같은 은줄을 가슴에 달고 있다. 모양은 같지만 묘하게 색이 조금씩 다르다. 어떤 것은 희고, 어떤 것은 탁하며, 어떤 것은 거의 검게 썩어 있다.

붉은 절단선이 다시 움직인다. 붉은 절단선도 이번에는 한 줄이 아니다. 수십 개로 분열되어 각자의 은줄을 향해 뻗어간다. 마치 기준을 벗어난 개체들, 프로그램을 파괴하는 바이러스를 제거하는 청소 프로그램처럼.


"지금부터는 네 선택이 아니야."

그때, 너의 가장 가까운 곳에 서 있던 ‘다른 너’가 네 쪽으로 손을 뻗는다.

그의 길쭉한 손이 네 가슴을 통과한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다. 신기한 건 아프지도 않다, 대신 네 안의 어떤 '데이터'가 이동하는 감각이 있다. 기억들이 갑자기 역류한다. 평균의 세상에서 네가 느꼈던 모든 위화감.
숫자로 환산되던 감정, 결국 타인의 것이었던 욕망, ‘바람직함’이라는 단어에 눌려왔던 충동들.

그것들이 찰나의 순간, 하나의 압축 파일처럼 열리며 네 안으로 흘러 들어온다.


이 세계의 중첩이 가속된다. 눈앞의 공간이 절반으로 접히고, 그 사이로 거대한 그림자가 일어난다. 얼굴은 보이지 않고 형태도 명확하지 않다. 그림자는 점차 커져서 이제는 공간을 뒤덮고 모두를 한꺼번에 내려다보고 있다. 지금 네가 있는 곳이 공연장의 무대라면, 그는 무대나 관객석이 아닌 그 보다 훨씬 큰 바깥 공간, 즉 세계 경계를 너머 더 크고 넓은 어떤 영역에서 너를 관찰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 않으며 완전한 지능이나 의식을 가진 기계도 아니다. 차라리 차갑고 균질한 '의식의 덩어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수많은 선택지에서 가장 안정적인 평균값을 계산해 내는 상위 구조. 네가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세계의 값들을 평균하여 너에게 최상의 상황을 인식하게 하는 존재.


은줄은 단순한 연결이 아니었다. 그것은 네가 평균의 세계와 동기화되어 있다는 증표였다. 네 은줄이 절단으로 오염된 순간, '관측자'는 드디어 깨어난 것이다. 세계에는 갑자기 암흑이 내린다. 네가 서있는 무대도, 네가 바라보는 객석도, 그리고 그 너머 크고 넓은 바깥세계도 영원처럼 긴 정적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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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이 모든 건 꿈인가?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몇 번을 잠들고 깨어난 걸까? 희미하게 웃는 또 다른 너의 얼굴을 바라보는 너, 그리고 위에서는 너의 은줄을 끊기 위해 붉은 절단선이 여전히 네 쪽으로 곧게 내려온다. 꿈속의 장면과 똑같다! 아니면.. 데자뷔?

너는 도망치려 하지만, 이동이라는 개념이 사라진 공간에서 방향이나 움직임은 의미를 잃는다. 대신 네 안쪽에서 무언가가 반응하고 거기에 맞춰 네 은줄이 움찔거리며 스스로를 재구성하려 한다. 그리고 너는 그것을 바라본다. (이것을 네가 본다고 하는 것이 맞을지 여전히 의심스럽지만) 은줄의 내부에서 아주 미세하게 비치는 작은 흑점을. 완벽한 평균의 세계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작은 결점. 오차. 그 오차가 점점 커져서 은줄이 터지려고 하고 있다.


오염된 연결.


붉은 절단선은 그 오점을 제거하려 한다. 하지만 언제 나타났는지 동시에 주변의 여러 다른 ‘너’들의 은줄 몇 개가 갑자기 붉은 선에 닿는다. 은줄이 잘린 그들의 형상이 순식간에 1차원 평면 위의 점들처럼 둥글고 평평해진다. 입체감이 사라져 납작해지다가는 금세 종이처럼 얇아져서는 사라진다.

데이터 삭제.


'꿈이 아니었어...'


남은 너희들은 서로를 바라본다. 이제 누가 먼저 제거될지 모른다는 위기를 느낀 듯, 서로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때, 네 가슴의 은줄이 팽팽하게 단단해진다. 너의 은줄은 다른 은줄과 달리 미세하게 붉은빛이 감돌고, 그 안에서 관측자의 계산, 관측자의 오점과는 다른 종류와 방향의 파동이 발생한다.


이건 탈락이 아니다. 이건 예외다. 시스템이 완벽히 처리하지 못한 예외.


관측자의 시선이 정확히 너를 조준하고 공간이 침묵에 잠긴다. 다른 버전의 너들은 동시에 숨을 멈춘다. 붉은 절단선은 이제 너의 목 앞까지 와있고 너는 눈을 질끈 감는다.


'나도 곧 삭제될 거야. 사라지겠지.'


아주 느리게, 네 안쪽에서는 작지만 또렷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제부터는 네가 관측해.'


'뭐라고?'


그 목소리는 네 것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누구지? 이제부터 내가 관측하라고? 그게 대체 무슨 뜻이야?'


네가 네 안의 목소리를 되새기는 사이 중간계의 균열이 시작된다. 이번엔 바깥도 안쪽도 아닌 세계 전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6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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