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너의 세계는 렌더링 중
그날 아침, 출입 게이트 앞에 네가 멈춘 건 네 얼굴 때문이 아니었다. 몸 전체가 잠깐 멈칫했다.
0.3초.
뒤에 서 있던 남자의 어깨가 왜인지 너의 팔과 몸통을 통과했다가 다시 분리되어 제자리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너는 마치 투명인간이 된 것 같았다. 아무도 놀라지 않았는데, 너만 놀라 멈추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풍경이 끊임없이 지나갔다. 평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모든 것이 해상도가 낮아진 화면처럼 보였다.
영화에서 본 픽셀들, 반짝이는 빛의 점들.
너는 거울을 들여다본다. 눈동자는 더욱 움푹 파여서 검은 우물처럼 보이고 그 안쪽은 끝이 없다. 서로를 무한히 반사하고 있는 물체처럼 너는 그 안에서 길을 잃는다. 시각은 점점 예민해지는데 촉각은 점점 흐릿해져서 손끝에 감각이 없고, 무언가가 늦게 닿는다는 느낌이다. 도달해야 할 신경들이 어눌해져서 감각이 몸 밖에 있는지 몸 안에 있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어릴 때 가지고 놀던 납작한 종이 인형처럼, 너의 몸은 점점 얇아지고 있다.
'지금 나는 꿈속에 있다,
이 세계.. 낮인가? 밤인가?'
너는 낯선 세계 속에서 눈을 뜬다. 천장이 깨져있다. 아니, 깨진 것처럼 일그러져 보인다. 그 안에서 격자무늬 구조가 드러난다. 모눈종이 같이 펼쳐지는 촘촘한 좌표선. 세상이 점점 투명해진다.
(0,3) (0,2) (0,1)...
좌표 안에 그려진 사람들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모든 존재가 각자의 위치를 지니고 있다. 지나가는 얼굴들은 모두 어디선가 본 듯한데,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모르겠다. 데자뷔? 아니 분명 이건 너의 꿈속인데.
모두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운데 너 혼자만 자각이라도 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격자무늬 창문을 벌컥 열어젖힌다. 풍경 바깥에서 다시 다가오는 풍경, 그 속을 열면 또다시 다가오는 풍경... 아무리 힘껏 열어보고 다시 열어봐도 무한한 풍경이 너의 눈앞으로 펼쳐진다.
루프.
이건 꿈의 세계.
아니다. 분명 이건 자각몽이다. 너는 꿈을 밀어내려고 눈꺼풀을 닫았다 연다. 안간힘을 써보지만 결국, 너는 깨어나지 못하고 허우적거린다. 자각을 반복하는 너의 의식 안에서 생생했던 꿈의 세계가 일순간에 허물어진다. 풍경 속에, 풍경 속에, 풍경이 담긴 그 무한한 루프가 검은 우물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대체 어디로 사라지는 걸까?
이 많은 꿈들은.
이 많은 풍경들은.
“선배, 이거 봤냐니까요? 네? 선배!"
너는 눈을 뜨고 현실로 돌아온다.
“응? 뭐를.”
"아니 방금까지 선배가 물었잖아요. 이 기획안 디자인 컨펌 받았냐고.. 제대로 안나왔다니까요.
일정도 촉박한데 이거 완전 엉망으로 왔다고요..."
같은 팀 후배인 이오가 불평을 한다.
"아.. 그거..."
너는 숨기려 하지만 이미 너의 말투에는 어색함이 묻어난다. 너의 목소리가 이오의 그것보다 낯설다.
'어디까지 말하고 있었던 거지..? 나?'
이오는 계속해서 답답해 죽겠다는 얼굴로 디자인 기획안 출력물을 들고 네 곁으로 다가오고 있다.
"자.. 봐요. 여기. 어떻게 왔는지 한번 보시라고요.."
잔뜩 흥분한 이오의 손이 너의 책상에 닿는 순간, 네 눈앞에 푸른빛이 번쩍이고 이오의 손과 그가 들고 있는 출력물 꾸러미가 투명해진다. 너는 화들짝 놀라서 뒤로 물러난다.
“앗 따가, 선배! 왜 그래요? 정전기인가?"
뭔가 빛이 튀는 것을 이오도 느낀 것인지 자기 몸을 비비며 너를 본다. 너는 넋을 잃는다.
네 눈앞에서 이제 세계는 흐물거린다. 반은 물질, 반은 비물질인 상태다. 시공간이 마치 물결치는 스크린처럼 납작하게 펼쳐진다. 앞에서 떠들고 있는 이오의 몸도, 기획안 뭉치와 책상도, 이 모든 게 담긴 풍경과 공간들도 아직 켜지지 않은 상태다. 버퍼링 때문에 강제 종료한 컴퓨터가 리로딩 중인 상태처럼, 완벽하게 실행이 되지 않은 채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다.
꿈과 현실의 중간계.
모눈종이 격자선과 좌표값 위로 너의 세계가 펼쳐진다.
너는 이제 몸 안에 있지 않다. 방금 전까지 존재하다 사라진 세계와 마찬가지로 너의 육체는 점점 투명해지고 피부 아래에는 혈관 대신 빛의 선들이 보인다. 수많은 선이 연결되어 가슴에서 뻗어나가는 두툼한 은줄과 겹친다. 은줄은 가장 선명하다. 너는 이제 몸이 바깥인지 너의 의식이 바깥인지 감각적으로 알지 못한다.
여기.
존재하는 건 투사된 형상.
모두가 같은 광원으로부터 만들어진 이미지이다. 현실이 탄력 없는 막처럼 흔들리던 그때, 갑자기 알림 메시지가 울리고 너는 재난인가 싶어 깜짝 놀란다.
'연결 오류. 자기 인식 이상. 리-렌더링.'
다시 이건 너의 이야기다. 너는 계속해서 인식력을 잃어가고 있는 너를 생각한다. 날마다 변해가는 너의 얼굴과 몸. 네가 지니고 온, 하루하루 늙고 병들어 가는 뼈와 살, 그리고 피의 무게. 죽음으로 향하는 육체. 이제는 명확히 인식되지 않는 너의 세계를 생각한다. 이건 오롯이 너만의 오류일지도 모른다. 너만이 지니고 있는, 너만 홀로 있는 세계.
민지의 세계, 이오의 세계, 즉 타인의 세계. 그것은 너의 그것과 다를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를 지켜보는 당신의 세계와 나의 세계도 분명 그럴 것이다. 아직... 장담할 순 없지만.
자, 이제부터 너는 어떻게 해야 할까? 너는 어디에 있는 걸까? 이 모든 걸 지켜보고 있는 건 누구일까?
너는 세계의 한가운데 있다. 언제나 확실하게 머무르고 있다. 그러나 사실 너는 이 모든 게 정말 있다고는 믿지 않았다. 어딘가 다른 것이 있을 거라고. 그래서 너는 항상 벗어나고 싶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무엇이 진짜 너의 마음이고 믿음인지 너는 혼란스럽다. 이 세계의 무엇이 그토록 너를 붙잡고 있는 것일까? 이제 그 정답을 찾을 때가 온 것이다.
'탈락'
그래. 너에게는 그것이 필요하다. 문득 강렬한 희망이 비춘다. 그래. 너는 탈락되고 싶다. 세계가 온통 사라져서 그 속으로 끝없이 떨어지고 싶다. 텅 비어버린 세상. 모든 게 無로 돌아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 노력, 저항, 의지를 끌어내리고 마침내 이 세계를 한 점으로 만들 강렬한 힘이 필요하다. 그것은 구원. 그것은 새 빛.
너의 가슴에서 솟아난 은줄이 팽팽해진다. 가슴 깊숙이 단단하게 조여 온다. 위 아래, 안과 밖. 처음과 끝. 사방에서 잡아당기며 양극단의 세계가 작용하는 힘. 너는 최초로 희망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낀다.
'가장 반대의 것은 사실 가장 가까운 것이다.'
너는 그렇게 평균에서 벗어났다. 이 세계에서 탈락하고 있었다. 새로움이 다가오고 있었다.
(4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