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도 월대천 옆으로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고고하고 우아한 학들이 물가에서 한가로이 놀고 있었다. 그 순간, 고고하고 아름다우셨던 엄마 생각에 잠긴다. 나에게 있어서 ‘엄마’ 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학’과 ‘하얀 목련’이다. 소녀 같은 미소와 하얗고 뽀얀 피부, 예쁜 얼굴에 키도 크고 늘씬하셨다. 그런 엄마의 자태는 너무나 아름다우셨다. 특히, 한복을 입은 우아한 모습은 마치 한 마리 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농담으로 하셨던 말씀이 있다.
“느네도 곱주만, 어멍을 따라올 외모는 어쪄.(너희들도 예쁘지만, 엄마를 따라올 외모는 없는 것 같다) 아버지께서는 아내에게 표현을 하지 않는 성향이셨다. 그런데 엄마의 외모가 워낙 아름다우셨기에 가끔 웃으면서 말씀하시곤 했다.
고고하고 아름다우셨던 우리 엄마는 본인 삶보다 가족이 우선인 삶을 사셨다.
농사일, 집안일, 종가의 종부로서 쉴 틈이 거의 없었던 분이셨다. 손재주까지 좋았기에 더 바쁜 나날을 보내셨다. 뜨개질로 우리 형제들에게 예쁜 옷을 만들어 주셨고, 집에 있는 웬만한 물건들은 엄마 손이 닿은 재봉틀로 뚝딱 해결했다. 솜씨가 좋으신 엄마 딸로 태어난 나는 예쁜 나만의 옷으로 남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70년대 어린 시절, 겨울이면 우리 집은 만남과 회의의 장소였다.
문중회, 동네일, 제(친목 모임 종류) 등등 초겨울이 되면 겨울 준비로 며칠 동안 장작을 만들어 차곡차곡 쌓아 놓아야 했다. 오시는 손님들께 따뜻한 방과 음식을 제공해 주기 위한 겨울 준비였다. 엄마께서는 고팡(광)에 있는 술 항아리에 엄청난 술들을 만들어 준비해 두셨다. 쌀독마다 과일들을 보관하셨다. 방 한편에 있는 시루에는 콩나물을 키우셨다. 그리고 한 달에 두세 번 두부를 만드셨고, 뒤뜰 항아리마다 김장을 가득 준비해 두셨다. 우리 가족만 먹을 거라면 쉽게 끝날 일인데, 오시는 손님들 대접하기 위해 몇 날 며칠 노고를 아끼지 않으셨다. 주변 분들에게 대접하면서 즐거워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종부는 하늘이 내리시는 거라고 생각했다.
제사 때마다 친척 분들께서 오셔서 함께 제사 음식을 만들 정도로 많은 양의 음식을 해야 했기에, 며칠 전부터 준비하시는 모습을 보고 자랐다. 그래서인지 나 역시, 결혼 후 시댁에서 처음 맞는 제삿날, 제사 음식을 만드는데 시어머니께서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옛날 말에 종손 집 딸들은 아명 어신 집이라도 집에서 보고 배운 게 이시난 다르댄 말이 이선게 마는, 니 보난 알아지켜. 막둥이랜 손 하나 까딱 안 허멍 살아실 건디, 사돈님이 솜씨가 좋으난 이쁘게 잘도 만들엄신게” (“옛날 말에 종손 집 딸들은 아무리 없는 집이라도 집에서 보고 배운 게 있어서 다르다는 말이 있던데, 우리 며느리 보난 알 것 같다. 막내라고 손 하나 까딱 안하고 살아 왔을 텐데, 사돈님이 솜씨가 좋으시니 우리 며느리도 솜씨가 좋구나.”)라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해 주셨다.
또한 우리 집 고팡은 음식 보물 창고였다. 종갓집이라 제사도 많고, 차례 지낼 일도 많았기에 고팡에는 다양한 음식들이 많았는데, 그중에 언니랑 나랑은 몰래 먹어도 티가 덜 나는 품목인 감이랑 사과를 몰래몰래 꺼내먹는 재미가 쏠쏠했었다.
음식이 귀한 시절이었는데도 엄마께서 워낙 부지런하셨기에, 제철 과일은 늘 부족하지 않게 먹을 수 있었다. 과수원이 있어서 겨울에는 귀한 귤을 어렵지 않게 먹을 수 있었다. 오빠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 심어놓은 밤나무, 큰언니가 입학할 때 심어놓은 복숭아나무(황도), 작은언니가 입학할 때 심어 놓은 딸기, 내가 입학할 때 심어 놓은 복숭아나무(백도). 과수원 한편에 심어놓은 참외, 수박, 토마토, 물외(노각), 땅콩, 옥수수 등 덕분에 계절마다 부족함 없이 간식을 먹을 수 있었다. 마당 한쪽에 있는 닭장 속에서 닭들을 키웠기에 달걀은 빼놓을 수 없는 반찬거리였다. 부지런하시고 다정다감하신 부모님 덕분에 언제나 든든하고 행복하게 자랄 수 있었기에 감사한 마음이다.
철딱서니 없었던 나는 엄마에게 불효를 저지른 일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나는 엄청난 불효를 했다. 남편을 잃고 슬픔에 잠긴 엄마 생각은 못하고, 매일 울면서 엄마를 힘들게 만들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뱃속에 있는 애기 생각해서 정신 차리고 살라.”라며 나를 위로했었다. 그때는 내 삶에 의욕이 없었다. 일상생활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다. 매 순간순간 눈물이 앞을 가려 어떻게 지내왔는지 모른다. 내가 막내라서 부모님께 의존했던 부분도 많았기에 더더욱 힘들었다. 그런 막내를 다독이며 본인은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고 힘들었을까, 딸 앞에서 본인 감정을 숨기며 강해야 한다는 그때 엄마의 심정이 어땠을까 생각하지 못한 이기적이고 철없던 내가 너무 미웠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몇 달 후에야 나는 엄마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마냥 강한 줄만 알았던 엄마께서 남편의 없는 빈자리를 술 한 잔 마시며 잠을 청하고 계셨던 것이었다. 70 평생 술 한 모금 못 마시던 엄마였기에 충격이 너무나 컸다. 그때 비로소 나는, 내가 정신 차리고 엄마를 위로하며 살뜰히 챙겨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후 나는 엄마 앞에서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씩씩하게 행동했다. “5년 만에 낳은 귀한 주현이만 생각하라.”라고 말씀하셨던 엄마의 얘기를 생각하며 일상으로 서서히 돌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5년 후 엄마마저 하늘나라로 가셨다.
엄마를 잃은 슬픔에 또다시 힘겨운 시간들이 이어졌다. 정신을 차려보려 내 나름대로 살아갈 방법을 찾기로 했다. 육아에 정성을 기울였고, 독서와 운동을 하며 마음을 다잡으려 애썼다. 그 과정에서 나는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은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평생 가슴에 안고 가야 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부모님과의 소중한 시간들을 기억하며 이별의 아픔이 내 인생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
뭐가 그리 급하다고, 늘 주기만 하고 제대로 효도 한번 못 해드린 막내는 부모님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엄마에게 원망 어린 한마디를 했었다.
“엄마는 오래 살아서 막내 효도 제대로 받아 봐야지. 늘 주기만 허여 신디(했는데) 이렇게 아프면 어떵 헙니까(어떻게 합니까)?”
“그게 무슨 말이고 게. 느네 추룩 착헌 아이들이 어디시니. 느네 키우멍 얼마나 지꺼진 줄 알암시냐. 힘들당도 느네 보민 웃어져라. 어멍 어성 서러웡 허지 말곡, 귀하게 낳은 주현이 소현이 잘 키우곡, 어신 사람들 보이민 도와 주멍, 지금추록 재미지게 잘 살라이.”(그게 무슨 말이니 너희들처럼 착한 아이들이 어디있을까. 너희들 키우면서 얼마나 기뻤는지 알고 있을까. 힘들다가도 너희들 보면 웃고 지낼 수 있었다. 엄마 없다고 서럽다고 하지 말고 귀하게 낳은 주현이 소현이 잘 키우면서 없는 사람들 보이면 도와 주고, 지금처럼 재미있게 잘 살아야 한다.“) 본인보다 가족이 우선이셨고, 주변 분들에게 인정이 넘치셨던 우리 엄마!
중양절(음력 9월 9일, 극락전에 위패 모신 분들에게 지내는 절간 행사)에 친정 동네 절에 가면 동네 삼촌들이 우리 손을 잡고서 하셨던 말씀
“느네 보민 성님 보는 거 닮앙 막 반가운다 게.”
“성님께서 덕을 하영 쌓아 노난, 느네 형제들은 다 잘 되언, 얼마나 좋으냐 게. 성님이 오래 살아서 느네 사는 모습 봐시민 더 좋아실 건디.” (“너희들 보면 형님 보는 것 같아서 엄청 반갑게 느껴진다.” “성님께서 덕을 많이 쌓아 놓으난 너희 형제들은 다 잘되어서 얼마나 좋니. 성님이 오래 살아서 너희들 사는 모습 보았으면 더 좋았을텐데.”)
우리 형제들도 동네 삼촌들 보면서 부모님 생각나서 눈물이 나고 삼촌들도 덩달아 울곤 했었는데, 이제는 삼촌들도 몇 분 안 계셔서 안타까울 뿐이다. 사랑하는 엄마에 대해 글을 쓰다 보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 고마운 엄마에 대한 이야기는 책 몇 권을 써도 다 못 쓸 것 같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나의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