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조각: 오래된 공간이 주는 위안과 상실

낡은 건물이 주는 위로와 이야깃거리

by 혜온

어느 오후였을까요? 저는 재개발을 앞둔 한 동네의 오래된 카페에 앉아 있었습니다. 벽지는 곳곳이 들뜨고, 나무 바닥은 수많은 발걸음에 닳아 있었죠. 그런데 이상했어요. 이 모든 낡음이 불편하기는커녕 묘한 안정감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마치 오래된 스웨터가 주는 그런 포근함처럼 말이죠.


공간에 대해 생각하자면 저는 늘 새로움을 추구해 왔던 것 같습니다. 최신 트렌드, 혁신적인 소재, 완벽한 마감, 그런것들이 많은 오늘날의 세상이니까요. 하지만 그날 오후, 그 낡은 카페에서 저는 깨달았습니다. 시간의 감각이 만드는 묘한 텍스쳐야말로 가장 깊은 감정을 자극하는 디자인 요소라는 것을요.



시간이 새기는 공간의 서사

영화 <화양연화 : In the mood for love>에서 왕가위 감독이 보여준 1960년대 홍콩의 골목길을 기억하시나요? 좁은 계단, 벗겨진 페인트, 스며든 습기의 흔적들. 이 모든 것들이 단순한 배경 요소가 아닌, 인물들의 감정을 대변하는 또 다른 캐릭터가 되었죠. 공간은 그저 물리적인 틀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쌓인 무수한 이야기들의 집합체인 것입니다.

건축가 루이스 칸은 "건물에게 무엇이 되고 싶은지 물어보라"고 했지만, 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이 공간이 어떤 시간을 품고 있는지 들어보라"고요.


오래된 공간에는 독특한 리듬이 있습니다. 새벽 첫 번째 손님이 문을 열 때 나는 삐걱거림, 오후 햇살이 닳은 테이블 위에 만드는 그림자의 궤적, 밤이 되면 희미해지는 벽면의 얼룩들.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시간적 레이어를 형성하지요.



불완전함의 아름다움

일본의 와비사비(侘寂) 미학은 이런 시간의 흔적을 적극적으로 포용합니다. 균열, 얼룩, 변색 - 이런 것들은 결함이 아니라 그 공간만의 고유한 정체성인 것이죠. 공간기획에서 우리는 종종 이런 '불완전함'을 제거하려 하지만, 때로는 그것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감정적 연결고리가 된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해봅니다.


가령, 100년 된 한옥의 리노베이션 프로젝트가 있다면 어떨까요? 클라이언트가 모든 것을 새롭게 교체하기를 원한다면 저는 반대할 것 같습니다. 세월에 그을린 대들보, 손때 묻은 문짝, 비에 젖어 변색된 마루... 이것들이야말로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장 값진 디자인 요소니까요.


새로운 기능과 오래된 흔적이 조화를 이룬 그 공간에서 사람들은 말할지도 모릅니다. "왠지 할머니 집에 온 것 같다"라고요. 대부분은 그 한옥과 아무런 개인적 연관이 없었음에도,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공유하고 느끼는 그 시간적 가치는 무엇일까요?


기억의 공명

신경과학자들은 이를 '감정 기억'으로 설명합니다. 우리 뇌는 특정 공간의 질감, 냄새, 소리를 통해 과거의 경험을 소환하게끔 유도합니다. 그래서 오래된 공간이 주는 위안은 개인적 기억을 넘어, 인류 보편의 집단 기억과 연결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는 공간 설계에 중요한 시사점을 줍니다. 진정한 공간의 힘은 완벽함이 아닌 공명에서 나옵니다. 사람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감정의 현을 건드리는 것말이죠.


시간을 디자인하다

그렇다면 공간기획에서는 어떻게 이런 시간성을 의도적으로 설계할 수 있을까요?

먼저, 재료의 선택이 필요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름답게 변화하는 소재들이 있죠. 무늬목, 구리, 자연석, 이들은 사용할수록,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깊은 매력을 발산합니다.

둘째, 빛의 계획입니다. 하루 종일, 계절마다 변화하는 자연광이 어떻게 공간을 변화시킬지 예측하고 설계하는 것이죠. 빛은 공간에 시간의 리듬을 새겨넣는 가장 강력한 도구입니다.


셋째, 여백의 배치입니다. 완벽하게 채워진 공간보다는, 어딘가에 시간이 쌓일 수 있는 여유를 남겨두는 것. 그 여백에서 사용자들의 일상이 스며들고, 그들만의 이야기가 축적될 테지요.



상실과 그리움의 미학

하지만 오래된 공간이 주는 감정은 위안만이 아닙니다. 때때로 그곳엔 상실의 그림자도 함께 합니다.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 되돌릴 수 없는 시간에 대한 아쉬움. 이런 것들이 말이죠.

재개발을 앞둔 그 카페에서 제가 느낀 것도 바로 이런 감정이었습니다. 이 모든 흔적들이 곧 사라질 것이라는 아련함. 하지만 이 상실감 역시 그 공간이 주는 소중한 선물이었을까요? 진정한 아름다움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소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미래를 위한 과거

결국 공간기획의 역할은 단순히 기능적이고 아름다운 공간을 만드는 것을 넘어섭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람들의 감정이 머물 수 있는 그릇을 만드는 것이죠.

새로운 공간을 만날 때, 이제 이렇게 상상해보세요. 10년 후, 20년 후 이 공간은 어떤 모습일까? 어떤 이야기들이 쌓여있을까? 그리고 그때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어떤 감정을 느낄까?

오래된 공간이 주는 가르침은 명확합니다. 시간은 공간을 낡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욱 깊게 만드는 것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그 깊이야말로 진정한 건축의 시작이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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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오늘도 묻습니다.

이 공간이 10년 후에도 누군가에게 위안이 될 수 있을까요?


그 답은 바로 시간의 흔적을 두려워하지 않는 누군가의 용기에 있을 겁니다.






thumbnail's photo - cafe in Cartagena, Colombia _ National Geographic April 1989, O. Louis Mazzaten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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