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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코뿔소

갑옷은 어떤 의미일까? 내게 갑옷이란?

by 별총총하늘

「모모」, 「마법의 설탕 두 조각」을 쓴 미하엘 엔데의 작품입니다. 각 동물의 특성에 맞는 이름을 보는 재미, 그들의 말과 행동에 초점을 맞춘다면 연령에 상관없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그림책치고는 글밥이 제법 많은 데다 결말 부분의 묵직한 메시지가 저학년 어린이에겐 다소 어려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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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초원에 사는 코뿔소 코로바나는 욕심이 많고 사나운 데다 난폭하기로 유명합니다. 게다가 자기 생각만 옳다고 주장하는 고집쟁이였죠. 코로바나는 물웅덩이를 독차지하고 다른 동물들이 얼씬도 못하게 합니다. 코로바나의 만행을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동물들은 회의를 여는데요.




사자 사나우나, 흑멧돼지 우둘두둘, 코끼리 코로가마, 횡설수설 황새 교수, 하이에나 힐끔핼끔, 다람쥐 두리반짝, 영양 야실야실까지 모두 모여 코로바나에 대항할 방법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의견이 서로 달라 뾰족한 방법을 찾아내지 못해요. 코로바나는 다른 동물들이 자기를 몰아낼 궁리를 한다는 걸 알아채고 더 난폭하게 행동하지요. 결국, 동물들은 코로바나가 없는 곳으로 모두 떠나버립니다.




홀로 남겨진 코로바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요? 독불장군처럼 굴다 혼자 남겨졌으니 반성하고 뉘우치며 용서를 빌까요? 작가는 유일하게 코로바나를 무서워하지 않는 존재를 등장시킵니다. 바로 동물들의 등에 앉아 기생충을 잡아먹는 조그만 새 '쪼아쪼아'입니다. 쪼아쪼아는 동물들이 모두 떠나버리자 더 이상 먹이를 구할 수가 없게 되었어요. 어쩌면 동물들을 달아나게 만든 코로바나에게 화가 난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쪼아쪼아는 코로바나의 허영심을 자극합니다. 다른 동물들을 몰아내고 왕이 된 인물이라면 동상이 있어야 한다며 동상을 만들라고 하지요. 그런데 알다시피 마을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어요. 그러니, 코로바나 스스로 동상이 되는 건 어떠냐고 해요. 커다란 바위 위로 올라가 뒷다리를 들고 고개를 쳐들어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는 코로바나는 기분이 으쓱해졌어요. 하지만 배가 고파도 먹을 것을 구하러 내려올 수 없었어요.




왕의 동상을 밀어내는 자는 반역자인데 코로바나가 코로바나를 밀어낸다면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쪼아쪼아의 말 때문이었죠. 참 어리석지만 이미 스스로 만든 우상에 도취되어 버린 코로바나는 결코 동상을 밀어낼 생각이 없습니다. 오랫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해 마르고 허약해진 코로바나는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어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아요.




그 순간, 코로바나의 철갑옷은 그대로 있고 조그맣고 벌거숭이인 코로바나가 스스로 빠져나오지요. 코로바나의 내면에는 작고 나약한 존재가 숨어 있었어요. 코로바나는 동상을 보고 깜짝 놀라며 아무도 없는 곳으로 떠나버려요. 코로바나가 사라지자 다른 동물들이 마을로 돌아왔어요. 하지만 코로바나의 동상을 그대로 남겨두기로 했어요. 앞으로 올 세대들이 보고 배우길 바라면서요.




이 책의 핵심은 코로바나가 동상이 되어 가는 과정과 동상에서 빠져나온 작고 약한 존재가 우뚝 선 동상과 대면하는 장면입니다. 이 부분은 언어의 유희를 보듯 평범한 독자를 헷갈리게 만들어요.




혁명이 일어났을 때 동상을 밀어내면 왕은 밀어낸 자를 사형에 처해. 네가 여기서 내려가면 네 동상을 밀어내는 거고, 왕인 너는 너를 사형에 처해야 돼.

벌거벗은 코뿔소






무엇이 코로바나를 동상이 되게 했을까? 생각해 봅니다. 저라면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슬쩍 슬쩍 내려와 휴식을 취하고 먹을 것을 실컷 먹고 다시 자세를 취할 것 같은데... 어찌 보면 코로바나는 자기 자신을 속이는 코뿔소는 아닌 것 같아요. 코로바나의 못된 행동을 옹호하려는 건 아닙니다. 자기 생각만 옳다고 고집하는 태도와 힘으로 다른 동물들을 지배하고 짓밟으려 한 점은 비난받아 마땅하지요. 고집불통인 성격은 안타까울 정도로 미련해 보였어요.




그런데도 코로바나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여리고 약한 존재에 주목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누구나 마음속에 감춘 것들이 있지요. 코로바나의 외면은 커다랗고 무시무시한 뿔, 두꺼운 갑옷으로 무장한 강한 몸을 자랑하지만 내면에 그토록 여린 존재가 숨어 있을지 어떻게 알았겠어요.




나에게 갑옷은 무엇일까? 질문을 던져 봅니다. 갑옷은 나를 강하게 보이게 하는 동시에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얼핏 달라 보이는 두 가지가 사실은 하나로 통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겉으로 보여주고 싶고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그것이 무엇일지 곰곰이 생각해 보지만 아직 저에게는 갑옷이 없는 것 같습니다. 퍼뜩 떠오른 단어는 '고집스러움'이었는데요. 누군가는 '가르치는 행위'라고 하더군요.




'벌거벗은 임금님'을 떠올리게 하는 '벌거벗은 코뿔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그림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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