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달과 5펜스가 사랑하는 허연 시인과 함께 하는 낭독회
* 제8회 반달과 5펜스가 사랑한 허연 시인과 함께 하는 낭독회 : 2023년 9월 9일 (토요일)
2023년 두 번째로 열리는 8차 “반달과 5펜스가 사랑한 시인들” 시낭독회는 허연 시인과 함께 했다. 반달과 5펜스 필사모임에서는 그동안 허연 시인의 여섯 권 시집에서 발췌한 시 31편을 필사를 해왔는데, 내게는 그 뜻을 알듯 모를 듯 긴가 민가 한 시가 많았으므로, 이번 시낭독회를 통해 좀 더 이해할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슬픔에 슬픔을 보탰다」와 「나는 빛을 피해 걸어간다」 시가 인쇄된 현수막 아래, 그리고 허연 시인의 시집과 에세이 등 여러 종류의 책이 놓인 테이블 앞에 자리 잡은 허연 시인은, 차분하고 깊이 고뇌하는 이지적인 시인이라는 이미지에 냉철함이 살짝 가미된 듯 보였다. 그 이미지는 시인의 또 다른 직업 매일경제신문 문화부 기자로서의 정체성에서 나오는 것인가 싶었는데, 늦둥이 딸을 언급하실 때 안경 너머 날카로운 눈매가 부드러워지고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기도 하셔서 다양한 스펙트럼의 감정을 소유하신 시인이라고 생각했다. 이후 2024년 가족의 달 5월에 “반달과5펜스”에서 허연 시인의 동시집 『내가 고생이 많네』의 동시를 필사하기도 하여 시인의 다채로운 시세계에 감탄을 했던 기억이 난다.
앞서 언급한 또 다른 직업인 기자활동을 여전히 병행하고 있는지 궁금해 검색을 해보았는데, 2024년 초 매경출판 대표이사로 취임하였다는 소식이 검색 결과창에 떴다. 허연 시인에게 실례가 될 수도 있겠지만, 경제와 경영 분야를 다루는 출판사의 대표가 시인이라니, 동시집을 쓴 것 못지않은 의외의 변신으로 다가왔기에, 매경출판사 홈페이지에 들어가 이것저것 둘러보다 ‘2024년 신임 허연 대표 신년 인사’를 읽어보았다. (해당 신년 인사는 매경출판사 홈페이지가 옮겨지면서 찾을 수는 없어 참고자료로 추가할 수 없었다.)
... 시,라는 문학과 경제경영의 조합이 다소 생소한 듯하면서도
결국 책은, 그리고 책이 담고 있는 세상은 한 가지 길로 만나는 것 같습니다.
…’
시와 경제경영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한 가지 길을 향하는 책들. 그 책들이 가는 길의 풍경이 궁금해 매경출판에서 출판하는 책들을 관심 있게 볼 것 같다.
허연 시인은 「슬픔에 슬픔을 보탰다」로 본격적인 시낭독회를 시작하였다.
집안 내력으로 사제가 되고 싶었으나, 이미 세속의 단어를 너무 많이 알아버린 시정잡배가 되어버렸으므로, 사제가 되는 것을 포기했다고 하는 시인의 말이 시어가 되었다. 사제가 되는 대신 고통스러운 삶의 방식을 택한 시인은 세 가지를 결심하였다고 했는데, 첫 번째는 읽고 쓰고 공부하는 것을 나를 위해 하지 않을 것, 두 번째는 수입의 일부를 다른 사람을 위해 기부할 것, 세 번째는 밥벌이가 되지 않는 시를 쓰겠다는 결심이었다.
자신의 이익을 앞세우기보다 옆을 살피며 함께 사는 삶을 살겠다는 마음. 신문사 기자라는 직업을 갖게 된 이유가 이 마음과 통하면서 세 번째 결심과 직접적으로 부합하였기 때문이었을 것 같다. 또 기자가 되었지만 시만 생각하며 살았다고 말하는 시인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기자의 일은 그 일대로 많은 시간과 커다란 에너지가 들어가는 일임에도 시만 생각했다고 말한다는 건, 시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무척 크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시는 대신 울어주는 것이고 부적 같은 것이라 정의하고, 머리로 시를 생각하다가 머릿속에서 시가 완성되면 비로소 시를 작성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범상치 않게 들려 인상적이었다.
또 시는 원래 노래이기도 해서 낭독할 때 듣기 좋아야 하며, 만약 낭독할 때 엉킨다면 그 시는 좋은 시가 아니라는 말도 기억에 남는데, 비단 시뿐만 아니라 글도 읽었을 때 어색하게 들리지 않아야 한다고 한다. 글이 어색하다는 것을 판단할 정도가 되려면 좋은 글을 많이 보는 것이 필요조건. 좋은 글을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매개체는 뭐니 뭐니 해도 책이다. 작가가 심혈을 기울여 글을 쓰고 검토하고, 출판사의 편집자와 작가와 무수히 의견을 주고받으며 편집과 교정을 함으로써 태어나는 한 권의 책은 그야말로 좋은 글의 정수가 담긴 그릇이라 할만하다. 책 읽는 재미와 의미의 한 갈래가 여기에 있다.
「슬픈 버릇」 시를 낭독한 후, 살면서 시가 되는 순간이 있다며, 시는 진심이 담긴 글로서 모두 벗어버린 말, 외치는 말을 사용해야 한다고 허연 시인은 말했다.
‘가끔씩 그리워 심장에 손을 얹으면 그 심장은 이미 없지.
이제 다른 심장으로 살아야 하지.
…’
그래서 시 도입부에서 유추할 수 있는, 사랑하는 이가 떠났을 때가 「슬픈 버릇」 시가 되었다.
내게 있어 시가 되는 순간은 어떤 순간들이었을까? 기쁘고, 슬프고, 놀라고, 화났던 몇 가지 순간들이 방울방울 떠오른다. 그중 하나로 반갑고 놀랐던 순간을 말한다면, 졸업과 동시에 연락이 끊겼던 같은 과 친구를 6년 전 20년 만에 다시 만난 뜻밖의 재회를 이야기할 수 있겠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아들의 학년 초 학부모총회가 있던 날, 강당에서의 전체 학부모총회를 마치고 학부모들은 각가 자녀의 교실로 이동한 후 자녀의 이름이 써진 책상에 앉은 그때, 옆자리에 앉은 그녀가 낯이 익다 싶었다. 그 순간, 그녀도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는데 대뜸 반말로 “우리 서로 알지 않냐?”라고 먼저 말을 걸어왔다. 이십 대 중반 겨울, 졸업식을 끝으로 보지 못했던 친구를 사십 대에 각자의 아들 딸을 매개로 우연히 만난 다는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이십 년 동안 서로의 삶을 전혀 모른 채 다시 만났건만, 이질적인 느낌 전혀 없이 마치 어제 보고 오늘 만난 느낌이 들어 기분이 묘했다. 시공간이 휘어져 이십 년 전 졸업식이 있던 시공간을 이룬 한 점이, 그날 학부모총회가 있던 시공간을 이룬 점의 옆에 있어 바로 이어 만난 듯했다.
그 뒤로 지금까지 종종 만나는 동네친구가 되어, 함께 저녁을 먹고 만나 산책을 하기도 하고 차를 마시기도 하는데 나도 그 친구도 서로 마냥 신기하다. 지금 살고 있는 이곳은 그 친구도 나도 전혀 살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한 동네였기 때문에, 서로에게 의외의 장소였다. 이런 종류의 삶이 주는 의외성을 시로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조금씩 써볼까 하는 마음이 생긴다.
「슬픈 버릇」도 그렇지만 허연 시인의 시에는 직접 밝히듯 사랑 시 (연시)가 많다. 허연 시인의 에세이 『너에게 시시한 기분은 없다』 중 ‘사랑시’에 보면 사랑시를 쓰기로 작정하고 쓰는 것은 아니며, 시를 쓰고 났는데 다시 읽어 보니 ‘사랑시’가 되어 있는 것으로, 허연 시인이 흘러 결국 도달하는 곳에 사랑이 있음을 말한다. 시낭독회에서 함께 한 사랑시는 「시월」, 「천호동-장마7」, 「북회귀선에서 온 소포」였고, 그중 「북회귀선에서 온 소포」 은 특히 가슴에 남는 시가 되었다.
계획해서 쓴 시가 아니라 흘러나온 시라고 소개한 「북회귀선에서 온 소포」는 북회귀선을 지나는 지역에 살고 있는 옛 애인이 보내온 소포를 소재로 쓴 시라고 한다. 그 소포의 정체는 허연 시인이 연애했을 때 썼던 망친 시를 모아둔 것이었다고……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이런 순간이 앞서 허연 시인이 말했던 시가 되는 순간인가 보다. …
모든 걸 가장 먼저 알아채는 건 눈물이라고
난 소포를 뜯기도 전에
눈물을 흘렸다
소포엔 재난처럼 가버린 추억이
적혀 있었다
…’
소포를 받고 발송자를 알게 되었을 때, 심장은 얼마나 큰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을지, 소포 내용물이 자신의 망친 시라는 것을 확인하고 어떤 느낌이었을지 상상해 본다. 지난 연인이 자신의 망친 시를 주워 모으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까? 몰랐을까? 왜 그녀는 이 시들을 다시 돌려준 것일까? 내가 버린 과거의 망친 시를 다시 받아 망각으로부터 소환된 추억의 물성은 어떤 종류의 것이었을까? 꼬리를 물고 올라오는 질문에 대답을 생각해 보기도 하고, 그냥 던져진 질문을 그대로 두기도 하며 시 읽기를 즐긴다.
많은 젊은 시인 지망생들이 영향을 받은 시인으로 허연 시인을 언급한다는 기사를 보았는데, 과연 이를 뒷받침하듯 ‘반달과 5펜스’ 시낭독회는 멀리 여수에서 오신 분을 비롯해 많은 사람이 함께 한 시낭독회였다. 허연 시인의 노련함과 청중들의 호응으로 강물이 흐르듯 자연스러웠던 시낭독회는 마무리가 되었고, 노래가 되는 시, 시가 되는 순간이 남았다.
*참고 자료
1. 『오십 미터』 허연, 2016, 문학과지성사
2.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허연, 2020, 문학과지성사
3. 『너에게 시시한 기분은 없다』 허연, 2022, 민음사
4. 반달서림 블로그의 허연 시인 시낭독회 안내문 (https://blog.naver.com/bandalseorim/223194052979)
5. 반달서림 카페의 허연 시인 시낭독회 안내문 (https://cafe.naver.com/bandalseorim/9448)
6. 반달서림 블로그의 허연 시인 시낭독회 후기 (https://blog.naver.com/bandalseorim/223207893435)
7. IZM 인터뷰 [시인과 음악] #1 허연 (https://www.izm.co.kr/posts?id=31895)
8. 월간 쿨트라 [쿨트라AWARDS] 사람들은 다 노래가 되기 위해 살아요 그 노래를 받아 적고 싶었어요 : 허연 「가여운 거리」 (https://blog.naver.com/cultura2006/2226630004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