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달과 5펜스가 사랑하는 한연희 시인과 함께 하는 낭독회
* 제10회 반달과 5펜스가 사랑한 한연희 시인과 함께 하는 낭독회 : 2023년 12월 9일 (토요일)
2023년에 네 번째로 열린 10차 “반달과 5펜스가 사랑한 시인들” 시낭독회 손님은 이웃 동네주민 한연희 시인. 반달과 5펜스 필사모임에서는 시낭독회 전 『희귀종 눈물귀신버섯』 시집에서 발췌한 시 5편을 필사했고, 이후 2024년 한연희 시인과 주민현 시인의 우정시집 『연희와 민현』에서 3편의 시를 더 필사하기도 했다.
「버섯 누아르」, 「사나운 가을 듣기」, 「12월」 세 편의 시가 각각 인쇄된 현수막 아래 탁자 위에 2주일 남짓 남은 크리스마스가 이미 와있다.
2016년 창비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한 한연희 시인은 표지에 청록색을 주된 색깔로 사용한 두 권의 시집을 출간하였는데, 아침달 출판사에서 출판된 『폭설이었다 그다음은』 시집과 문학동네 출판사에서 출판된 『희귀종 눈물귀신버섯』 시집이다.
『폭설이었다 그다음은』이 흰 바탕에 소나무 그림과 꼬마 유령 형상을 청록색으로 벽지 문양인 듯 번갈아 그린 귀여운 표지라면, 『희귀종 눈물귀신버섯』은 진한 청록색 표지에 분홍색으로 시집 제목과 시인의 이름을 인쇄한 세련된 표지였다. 서로 다른 출판사 각자 고유의 표지 디자인이 적용되어 출간된 시집이라 느낌은 다르지만 청록이라는 공통점이 있기에, 두 시집을 함께 보는 것만으로 다가오는 크리스마스를 실감하기 충분했다.
한편으로는 한연희라는 시인이 청록 사랑을 짐작할 수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희귀종 눈물귀신버섯』 시집에 떡하니 「청록색 연구」와 「녹색 활동」 제목의 시가 수록되기도 하였고, 흰 블라우스를 받쳐 입고 청록색 코트와 초록색 장신구를 착용한 그날 한연희 시인의 패션도 청록이었으니 의심할 여지는 없다.
두 시집과 함께, 멋진 촛대에 올려진 하얀색과 청록색 초와 청록색 성냥이 놓이고, 테이블 뒤 앉은 한연희 시인이 화룡정점으로 어우러져 크리스마스 감성의 시낭독회 준비가 완성되었는데, 한연희 시인은 또 참석한 인원수에 맞추어 준비한 너무나도 앙증맞은 오브제를 테이블 위 맨 앞 줄에 전시하는 것이었다. 목에 붉은 리본을 맨 작은 유리병 안 바닥에 흰색 또는 초록색의 알갱이를 깔고 그 위에 작은 버섯 피규어 2개를 놓은 후, 유리병 입구에 틸란드시아를 올린 오브제였는데, 한연희 시인이 하나하나 직접 제작하고 준비하였다는 설명을 듣고 한 해 동안 시를 많이 읽고 필사한 보상으로 시인 산타에게 크리스마스선물을 미리 받는 것 같아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한연희 시인은 틸란드시아를 키우는 방법을 소개하며 잘 키우면 꽃까지 피울 수 있는 식물이라며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말했지만, 사실 그 기대가 실현되기 어려울 거라 마음속으로 예상했다. 화분걸이를 이용하여 공중에 띄워놓고 최소한의 물로 키울 수 있는 식물이라는 정보를 듣고 잘 키워보려 몇 번 시도했으나, 시름시름 말라가더니 산 것인지 죽은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은 상태를 지속하기에 결국 폐기한 경험을 이미 가지고 있던 나였다. 다시는 키우지 않으리라 다짐했는데, 이런 식으로 또 틸란드시아를 키우게 될 줄이야……. 역시 우려했던 것처럼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른 듯 크기가 줄어들고 갈색의 잎이 보이면서 사망…. 내게는 너무 어려운 틸란이다.
한연희 시인은 참석자들이 모두 함께 참여하는 시낭독회를 계획하였다며, 참석자 개개인에게 분홍색 인쇄물을 한 장씩 나누어 주었다. 접힌 종이 표지에 큰 글씨의 제목으로
눈물귀신버섯 그 다음은 ( )
이라고 적혀있었다. 참석자가 각자 괄호 안에 단어를 넣어 제목을 정하고 한연희 시인의 여러 시에서 한 구절 씩 뽑아 연결하여 하나의 시를 만든 후 시낭독회 마지막에 차례차례 발표하여 함께 공유한다는 기획이었다. 그 내용을 소개하는 글도 어찌나 시 같은지, 역시 시인은 시인만이 갖는 반짝거림이 있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 반짝거림을 만들어 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연마를 했을지 짐작할 수는 없지만 ……
눈물귀신버섯 그다음은
( )
그 다음은… 당신의 버섯 이름을 만들어주세요.
당신만의 시의 제목이 될 테니까요.
***
이제 낭독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앞으로 시 낭독을 들으며 흩날리는 눈송이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을 받아주세요.
그리고 송이송이 눈송이 버섯 시를 차곡차곡 쌓아보세요.
이 시는 몇 조각의 우연과 당신의 기분과
*
오늘의 날씨와
* 우리의 만남이
상호작용을 일으켜
새로운 화학반응으로 재탄생될 거예요. 버섯의 환각 작용은 이로울 때가
있답니다.
그러니 *
* 서두르지 말고 *
천천히 저와 함께 *
이 세계 끝의 밤을
*
지나가 볼까요?
…….
지금껏 시를 읽고 필사를 하였지만, 여러 시에서 발췌한 구절로 새로운 하나의 시를 만든 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어서, 독특하고 즐거운 경험이 될 것 같은 예감과 함께, 제각기 완성해 낼 다른 사람들의 시에 기대감이 들었다.
시낭독회의 첫 시 「유령환각」은 헨리 제임스 소설 「나사의 회전」에서 영감을 받아 쓴 시로 어느 겨울날 어린이들이 사라지고 어린 유령들이 목격되는 장면을 연상하게 만드는 시였다. 미스터리 한 분위기에 호기심이 생겨, 과연 소설과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궁금해 소설을 읽어 보았는데, 역시 묘한 분위기에 알쏭달쏭한 부분이 많아 이 소설에 대해서도 독서 모임에서 함께 이야기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 시는 동시 제목의 느낌이 있는 「정답은 개구리」였는데, 혹시나 했지만 역시 어린이들이 읽기엔 조금 어둡고 무거운 시였다. “태어난 목적은 어떻게 죽을 것인지를 답하기 위해서입니다”라며 어떻게 죽을 것인지 묻는 질문은 어린이들에게는 물론 어른도 답하기 어려운 질문. 단지 죽음의 형태만을 의미하지 않는 어떻게 살다 죽을지를 묻는 것 같은 저 질문에 대한 각자의 답을 써서, 저마다의 답안지를 쓰고 고치는 일을 죽는 그날까지 지속하지 않을까 싶다. 자신이 채운 답을 삶에 적용하여 살다 그러다가 죽음을 맞닥뜨리는 그 순간에 원하는 것이 있다면, 샐리 티스데일이 쓴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에 많은 사람들이 말했듯 품위를 지켰으면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집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고요히 눈을 감는 죽음을 품위 있는 죽음이라 생각하고 바라지만,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죽음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옛날에 비해 가구 구성원의 수 자체가 현저하게 줄어든 요즘, 가정에서 죽음을 앞둔 사람을 보살피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며 가정에서 맞는 죽음이 품위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설명이 책에 있는데, 많은 부분 수긍이 된다. 실제로 이런 현상을 반영하듯 병원이나 전문 인력이 체계적으로 보살피는 요양병원이나 요양시설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점차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니 말이다. 보다 쾌적하고 편안한 요양시설에서 품위를 지키며 지내다가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을 만든다면 많은 사람들이 환영하지 않을까 싶다.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이는 없으니……
그다음으로 낭독한 시 역시 동시 제목으로 어울리는 「겨울방학」. 하지만 학생의 입장에서 보는 겨울방학이라기보다 어른이 보는 아이들의 겨울방학에 가깝다.
방학에는 얼마든지 늦잠을 자렴
잃어버린 걸 찾기 전에는 눈뜨지 말렴”
이 부분이 특히 부모로서 마음에 와닿았다. 방학 때 실컷 잠을 자고 잠을 자면서 꾸는 꿈에서 잃어버린 것뿐 아니라, 기왕 꾸는 꿈 자신의 앞으로 펼칠 꿈도 찾았으면 하는 바람 또한 슬그머니 얹게 된다. 그렇다면 방학 동안의 늦잠이 길어진들 부모로서 조급한 마음이 들지는 않을 텐데……
아이들을 키울 때 가장 힘든 점은 아이들이 나와 같지 않다는 점이다. 부모와 자식은 서로 다른 인격체라는 것을 머리로는 인정하지만 아이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과 생각을 받아들이기엔 내 마음에 모자람이 많다. 나는 내 생각 밖에 할 수 없어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알고 이해하기 위해 책도 읽고 음악도 듣고 미술 작품도 보는데, 말 수 없는 사춘기 아들의 생각을 알아내기는 역부족인 듯하다. SNS를 둘러보다 “자녀에게는 진심보다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어떤 책의 소개글을 보고 뜨끔한 마음에 책을 구매했다. 문제가 되는 나의 태도는 어떤 것일지 대충 짐작되니, 그 해결책이나 좀 알자 하는 이른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구입한 책인데, 지푸라기보다는 이왕이면 양육의 어려움에서 구원해 줄 튼튼한 동아줄이나, 정신 번쩍 들게 하는 죽비 같은 책이면 좋겠다.
『폭설이었다 그다음은』에 실린 시의 낭독을 마치고, 『희귀종 눈물귀신버섯』에 실린 「12월」와 「버섯 누아르」는 시를 낭독하기 앞서, 시집 제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꾸 제목을 “희귀종 눈물버섯귀신”이라고 읽게 된다고 고백하니, 한연희 시인은 예의 그 깔깔 웃음과 함께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고 발랄하게 답하며 충격적인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런데 눈물귀신버섯이라는 버섯은 없어요.
그물귀신버섯과 눈물버섯을 합쳐서 만들어 낸 이름이랍니다.”
없는 버섯도 만들어내는 시인의 상상력에 또다시 감탄할 따름이다.
버섯을 각별히 사랑하는 한연희 시인은 애나 로웬하웁트 칭의 『세계 끝의 버섯』을 강력추천했는데, 송이버섯을 통해 자본주의의를 말한다는 독특한 관점으로 쓰인 책이라 한다. 500페이지가 넘는 이른바 벽돌책 부류에 속하는 책으로, 송이버섯과 관련한 자본주의 이야기를 이렇게나 많이 할 수 있다는 것에 놀라는 한편, 그 깊이와 넓이에 대한 궁금증이 생긴다.
「12월」 와인에 말린 과일과 계피를 넣고 끓여 만든 뱅쇼를 따뜻하게 마시기 좋은 12월이건만,
여전히 아이들은 이른 죽음을 맞이하고
가볍고 작고 흰 손가락이 그렇게 무참히 얼어붙고 있"다.
한연희 시인이 추천한 쇼팽 에튀드 「Op.25-11 겨울바람」을 들으며 시를 읽으니 칼바람이 몰아치는 눈 쌓인 들판을 힘겹게 걷고 있는 아이들이 보인다.
가장 힘든 시기에 특히 힘겨워할 이들은 가장 약한 아이를 생각하는 한연희 시인의 마음은, 비단 이 시뿐 아니라 앞서 낭독한 「유령환각」에서도 보였는데, 청록색이 한연희 시인의 시 세계의 한 축이라면, 약한 존재로서의 아이에 대한 관심도 한연희 시인의 시 세계의 또 다른 한 축으로 지속될 것 같다는 생각이다.
「버섯 누아르」를 읽으며 예전 어렸을 적 보았던 만화 영화 「이상한 나라의 폴」이 생각났다. 이상한 나라에서 대마왕에게 납치된 니나를 구하기 위해 소년 폴이 곰돌이 인형 찌찌와 애완견 삐삐의 도움으로 니나를 구한다는 내용의 만화였는데, 그중 대마왕의 부하로 나온 버섯돌이가 떠올랐던 것이다. 그 만화영화에서도 버섯돌이는 일종의 악역으로 그의 무기는 머리로 표현된 갓 뒤의 주름살을 털어서 방출해 내는 포자였다. 통나무 조각을 타고 날아다니며 포자 공격으로 나쁜 짓을 하는 버섯돌이는 그 자체로도 인상적이었지만, 마지막에는 선한 캐릭터로 전환되어 더욱 기억에 남았다.
그래서 「버섯 누아르」는 버섯돌이 군단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사실 버섯만큼 요상한 것도 드물다.
어쩌면 버섯이 동물도 식물도 아닌 것처럼
나는 이도 저도 아닌 귀물이지 않을까요"
라고 했듯이 버섯은 동물도 식물도 아니고, 어떤 버섯은 식탁 위에 올라 일용할 양식으로도 귀한 음식으로도 대접되지만, 또 어떤 버섯은 한 입만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을 가진 요상한 존재. 독버섯과 식용버섯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아, 숲해설가에게 “산에서는 먹을 수 있는 버섯을 어떻게 구분하나요?”라고 물으면, “버섯은 시장에서 사서 드시고, 산에서는 절대로 그 어떤 버섯이라도 채취해서 먹지 마세요.”라는 답변을 듣기 일쑤다.
존재의 정체성도 불명확하고, 내게 먹혀 나의 피와 살이 되어줄지 또는 나를 해할 독이 되어 줄지 모르는 버섯이 가진 신기한 생명력을 해마다 여름철 화분에서 발견한다. 어느 여름날 베란다에서 키우는 화분에서 전날에는 없었던 버섯이 갑자기 발견되는데, 고층아파트까지 포자가 날아와 화분에 놓였다는 것도, 하루아침에 그렇게 크게 버섯이 자랄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다.
나의 화분은 너무나도 소중한 관계로, 버섯이 발견되는 족족 뽑아 버렸기 때문에, 그대로 버섯을 두었을 때 얼마나 생존하고, 어떻게 사라지는지 관찰하지는 않았지만, 운 좋게 버섯이 움트기 시작한 순간을 포착한다면, 버섯이 자라나는 속도를 눈으로 추적하는 것도 가능할까? 요즘엔 가정에서 키울 수 있는 식용 버섯 재배 키트를 판매하기도 하니 대체하여 관찰해 봄 직도 하겠다.
버섯 누아르
회색깔때기버섯을 먹고 싶어요
그 이름을 차근차근 발음하다 보면
어둡고 창백한 면을 보게 되지 않을까요
몸 바깥으로 나온 기다란 촉수를 잡아 뺐어요
어쩌면 버섯이 동물도 식물도 아닌 것처럼
나는 이도 저도 아닌 귀물이지 않을까요
눈에 띄지 않는 응달에서 눈에 띄려고 점점 새하얘져서는
갱스터가 됐군
머리 위로 총알이 날아다니는 걸 느끼면서
저 홀로 나무둥치에서
독을 품고 자라나는 둥근기둥의 버섯
힙사이지거스 마모레우스
프로클로로코쿠스 마리누스
다른 차원에서 유래한 것 같은 이름을
찾아내고 읽어보았어요
누군가는 미치광이버섯을 먹고 심장이 멎거나
탑 아래로 그저 온몸을 내던져 곤두박질치거나
그렇게 세계를 철저히 무너뜨리고 싶어서
새하얗고 투명한 원피스를 골라 입고
음악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춤을 추러 다녀요
전쟁이 났군
죽음의 천사로 불리는 독우산광대버섯은
걸어다니는 유령을 만든다고 해요
속살이 충실하고 질긴 놈일수록 잘못된 믿음을 퍼뜨리고
그들은
간혹 살아남은 자에게 총부리를 겨누고요
이런 이야기를 그에게서 듣는다
눈 밑에 멍이 든 그가 아무렇지 않게 웃는데
왜인지 분노가 사그라들지 않아요
죽은 자가 늘어나요
죽도록 미운 자가 생겨나요
때때로 버섯은 순하고 여린 치유자로서 식탁에 놓이지만
그런데도 생명은 너무 빨리 사그라들어요
그게 자연의 순리이니 뭐니 하면서
내버려두기만 할 순 없어서
버섯을 채취한 자에게 누가 벌을 내리지요?
총을 든 자를 누가 막아내지요?
왜 심연은 여길 들여다보지요?
독이 든 포자를 퍼뜨리려고 주름을 펼쳤어요
꼭꼭 숨겨둔 내면이 훤히 드러나 보여요
죽음을 끄집어내요
그렇게
나는 버섯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희귀종 눈물귀신버섯』 한연희, 2023, 문학동네
마지막 낭독시를 마치고, 참석자들은 각자 작성한 시를 돌아가며 낭독했다. 겹치는 구절도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동일하게 작성된 시는 없었다. 내가 작성한 시는 아래와 같은데, 저마다 다른 시에서 발췌한 탓에 다소 어색한 부분은 있지만, 묘하게 하나의 시로 어우러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 느낌은 다른 참석자들의 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눈물귀신버섯 그다음은
끈질긴 애정 이야기
사실 나는 하나도 미안하지 않아
언덕 위에 쌓이고 있는 것은 때론 너무 흔해서
이 끈질긴 애정으로 작은 것이라도 놓치지 않으려면
무슨 이야기든 듣고 말해야 한다.
나는 잠밖으로 나가지 않고 있습니다
어쩌면 버섯이 동물도 식물도 아닌 것처럼
나는 이도 저도 아닌 귀물이지 않을까요
방학에는 얼마든지 늦잠을 자렴
이 이야기가
부디
아무나 꽉 잡아주기를
아직 시집에 수록되지 않은 보너스 트랙 「일월 육일 어떠세요?」를 읽고 시낭독회를 마쳤다. 미리 준비한 『희귀종 눈물귀신버섯』 시집에 저자 서명을 받으려는데, 한연희 시인은 각양각색의 버섯이 그려진 스티커 무더기가 들어있는 주머니를 꺼내어 하나 고르라고 한다. 두 손에 버섯을 들고 있는 모양 스티커를 골라 한연희 시인에게 건네니, 시집 첫 페이지에 그 스티커를 붙이고 고양이가 나비를 쫓아 뛰어오르는 작은 도장을 찍어주며 서명을 해주었다.
저자 서명이 하나의 이벤트였는데, 다른 참가자가 내민 『폭설이었다 그다음은』 시집에는 눈송이 스티커와 별빛 스티커를 붙여주며 그와 함께, 고양이가 달려가는 작은 도장과 고양이 발자국 도장을 첫 페이지에 꾹꾹 찍어 주고 계신 것이 아닌가? 마치 흰 눈 위에 남겨진 듯 앙증맞은 고양이 발자국이 너무나도 탐이 나서, 서점에 진열된 『폭설이었다 그다음은』 시집 한 권을 냉큼 들고 저자 서명을 받았다. 시집의 주제와 잘 어울리게 승화시킨 저자서명 이벤트에 또다시 탄복했다. 나처럼 저자 서명에 반해서 예정에 없었던 시집을 구매한 참석자들도 많아 반달서림 대표가 무척 흐뭇했던 시낭독회가 아니었을까 싶다.
사실 한연희 시인으로 말하자면, 2024년부터 2025년 5월까지 반달서림 화요일 서점지기를 맡아 화요 시창작회를 운영하기도 하고, 2025년 2월에는 반달서림 겨울방학 프로그램으로 시 쓰기 놀이 원데이 클래스 4詩4色 를 진행하는 등 반달서림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던 소중한 시인. 한연희 시인과 함께하는 화요 시창작회는 아쉽게도 참여하지 못하였으나, 다행히 4詩4色 프로그램 중 <파랑을 소리내기>를 참여할 수 있었다. 한강 작가의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시집 한 권을 낭독하며 이야기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이 경험도 별도의 글로 남겨보고자 한다.
지금은 도서관 사서라는 새로운 업을 찾아 반달서림 화요 서점원의 역할은 중단하였지만, 일 년 남짓 반달서림을 함께 돌보았다는 경험 덕분에 한연희 시인과의 동지애는 지속될 것 같다. 도서관 사서 시인으로서 새로 쓰일 그녀의 시를 기다린다.
*참고 자료
1. 『폭설이었다 그다음은』 한연희, 2020, 아침달
2. 『희귀종 눈물귀신버섯』 한연희, 2023, 문학동네
3. 『헨리 제임스 : 나사의 회전 외 7편』 헨리 제임스/이종인, 2018, 현대문학
4.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샐리 티스데일/박미경, 2019, 로크미디어
5. 반달서림 블로그의 한연희 시인 시낭독회 안내문 (https://blog.naver.com/bandalseorim/223277249853)
6. 반달서림 카페의 한연희 시인 시낭독회 안내문 (https://cafe.naver.com/bandalseorim/9941)
7. 반달서림 블로그의 시 쓰기 놀이 원데이 클래스 안내문 <한연희 시인의 4詩4色> (https://blog.naver.com/bandalseorim/2237330131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