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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낭독회] 소년은 시와 함께

- 반달과 5펜스가 사랑하는 서효인 시인과 함께 하는 낭독회

by 줄기

* 제9회 반달과 5펜스가 사랑한 서효인 시인과 함께 하는 낭독회 : 2023년 11월 11일 (토요일)


2023년 세 번째로 열리는 9차 “반달과 5펜스가 사랑한 시인들” 시낭독회 손님은 서효인 시인. 반달과 5펜스 필사모임에서는 서효인 시인의 시집 3권과 헌정시집 그리고 시모음집 각 1권 총 5권에서 발췌한 시 13편을 필사했다. 그중 2023년 11월 첫 주의 시집 『여수』에서 발췌된 필사 시 5편은 반달서림 대표님을 대신하여 내가 직접 필사 시로 추천한 시들이었다. 필사 시 선정이라는 중책을 맡았다는 책임감으로 『여수』시집을 먼저 읽고 또 읽고 하는 동안 시집의 구성과 수록된 시들에 친숙해졌기에 서효인 시인의 시낭독회를 기다리는 마음가짐은, 단순히 관객으로 참여했던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서효인 시인과 「로맨스」와 「이태원」 현수막, 그리고 서효인 시인 시집과 시필사 노트 전시

「로맨스」와 「이태원」 시가 인쇄된 현수막 아래, 웃는 눈매에 개구쟁이 소년 느낌을 담은 서효인 시인이 자리하였다. 그리고 이내 시필사도 좋지만, 마치 성우가 된 듯 나의 리듬감을 찾아 시 낭송하는 것을 추천한다며 「여수」로 시낭독회를 시작했다. 이어 시집 『여수』의 표제작 이기도 한 「여수」는 가정 경제와 가정 형성에 도움이 된 시라고 소개를 하면서, 당시 여수에 살고 있던 여자친구와 헤어지기 위해 만나러 갔던 일을 ‘시적 화자’가 쓴 시라는 말을 덧붙였다.

다른 시인들도 ‘시적 화자’라는 단어를 많이 언급하였지만 서효인 시인이 말했을 때 유독 인상 깊었는데, 그 단어를 말하는 순간 서효인 시인에게서 일종의 소년성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시인과 시적 화자가 동일한 사람이라고 하면 시 쓰기가 어려울 것 같아요.
물론 시인이 자기 이야기를 시로 쓰지만, 시적 화자라는 필터를 거쳐야 합니다.
안 그러면 시인이 부끄러우니까요……’
『여수』 시집의 「여수」 필사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남자들이 모여 있는 무리 근처를 여자 혼자 지나가야 할 때 대부분의 여자는 그 상황을 별로 신경 쓰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지나갈 수 있는 반면, 여자들이 모여 있는 무리 근처를 남자 혼자 지나가야 할 때 남자는 어색함에 어쩔 줄을 모른다고……. 서효인 시인의 소년성은 그런 부끄러움에서 나온 종류와 유사했다. 그 뒤로도 시에 대해 깊이 이야기할 때면 ‘시적 화자’를 강조하였는데, 그때마다 ‘시적 화자’ 단어를 엄마 치마폭 삼아, 뒤에서 빼꼼히 눈만 내놓고 수줍게 이야기하는 소년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다시 「여수」 시로 돌아가서, 여자친구와 정리하기 위해 여수로 갔지만 다행히 두 사람은 헤어지지 않았고 사랑은 지속되어 가정 형성으로 이어졌다.

너의 얼굴이 완성되고 있었다
이 도시를 사랑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네 얼굴을 닮아버린 해안은
세계를 통틀어 여기뿐이므로
…’

여수라는 도시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여수를 사랑하게 된 이유가 여자친구를 닮아서라면, 그녀와 헤어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겠지…… 이 시를 읽고 연고가 없고 한 번 가 본 적도 없는 여수가 궁금해 가족 여행 목적지로 정하고 방문했다. 사실 25년 전 신입사원 교육 차 여천 화학공장 단지를 견학한 적은 있지만, 그건 여수에 갔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여수는 나에게 이제, 서효인 시인의 시와 함께 맛있는 음식과 올망졸망한 섬이 박혀있는 바다, 그리고 거대한 석유화학 공장단지가 익숙한 느낌이 드는 도시로 각인되었다. 마치 그곳에 친구가 살고 있는 것 같은 기분. 한 편의 시가 계기가 된 짧은 여행을 통해 나 또한 여수라는 도시를 사랑하게 되었다.

시집 『여수』에는 「여수」를 비롯하여 각종 지명과 장소를 제목으로 한 시가 가득한데, 이후 「압해도」, 「불광동」, 「한강철교」의 섬, 동네, 다리 이름을 제목으로 한 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압해도」를 낭독한 후, 다시 한번 엄마 치마 뒤에서 ‘시적 화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목포 출신인 서효인 시인에겐 다섯 분의 이모가 계셨고, 다섯 분 이모 가족들이 모두 모여 압해도에서 여름휴가를 보낸 기억이 있다고 하였다. 「압해도」는 그중 큰 이모의 이야기를 시적 화자의 눈을 가지고 쓴 시로 다른 시에 비해 길이는 짧은 편지만 인상적이었다.

『여수』 시집의 「압해도」 필사

목포의 북항에서 철선을 타고 갈 수 있었던 섬. 시가 쓰인 시점에는 이미 목포와 이어지는 다리가 만들어졌다. 처음 보는 지명에 지도를 찾아보고는, 목포시 바로 앞에 위치한 세 개의 팔이 회전하는 모양으로 생긴 섬의 모습이 무척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시에서 묘사하는 압해도가 이해되었다.

‘이모부는 배 농장을 하던 땅과 놀던 땅 모두를 농협 조합장 선거에 갈아 넣었다.’라는 구절을 읽는 순간, 세 팔이 믹서기 안에서 돌아가는 칼날의 모습이 다시 한 번 연상되었다. 이모부의 재산을 모두 갈아 즙으로 만들어 버린 압해도는, 그러나 잘못이 없다. 이모와 이모부 삶의 터전으로서 충실하게 존재했을 뿐이고, 모든 것이 갈아져 즙으로 되었다 해도 형상이 바뀌었을 뿐 보존된 어떤 가치는 있을 터, 억눌린 울음은 바다 위에 놓아주어도 좋겠다.


『여수』 시집의 「불광동」 필사

목포가 고향인 서효인 시인은 스물아홉 살에 상경을 했다. 열아홉 살 당시 고향을 떠난 사람들을 부러워했다고 한다. 너무 부러워서 누가 불만 붙이면 폭발할 것 같았는데, 그때의 상황을 시로 쓴 것이 「불광동」이었다고…… 아마도 서효인 시인 시 중 가장 짧은 시가 아닐까 싶은데, 고향을 떠나고 싶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스멀스멀 올라오는 화를 짧고 강렬하게 시에 압축시킨 열아홉 청년이 보였다. 만약 부러움이 더욱 커져 화가 극에 달했다면 부탄가스통을 소재로 한 시가 탄생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열아홉 살 청년이 왜 고향을 떠나고 싶었는지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마음을 이해할 수는 있다. 청년이 태어나고 자란 지방 도시는 익숙하고 편안하지만, 젊은 혈기에 답답하게 느껴졌을 수도, 큰 뜻을 품고 보다 넓은 곳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을 수도 있다. 충분히……


다음 낭독한 시는 「한강철교」 였는데, 한강철교라는 한 장소에 기록된 여러 역사적 사건과 개인적 사건들이 어우러져 있는 시였다. 한강철교가 완공되었던 시간 1900년 7월 5일과 1950년 한국전쟁에서 폭파되었던 시간 1950년 6월 28일, 그리고 딸이 수술을 받기 위해 대학병원에 입원했던 시간이 구분되지 않은 채 독특한 형식으로 기술되어 있다. 시대를 관통하는 힘겨운 시간을 녹여 한 덩어리 시에 담아낸 「한강철교」는 서효인 시인 자신이 좋아하는 시 중 하나라고 하는데, 새로운 형식으로 쓰인 시에 진하게 담긴 진심이 느껴져 과연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강철교


1897년 착공되어 1900년에 완공되었다. 철교 북

단을 천천히 지난다. 추돌 사고를 낸 승용차 한 쌍

의 가쁜 비상등 위로 열차가 지나간다. 열차의 지붕

에 올라탄 사람들이 보따리를 동여매고 손 인사를

한다. 그것이 막차인 줄은 몰랐으나 전쟁 통에 철교

는 폭파되었다. 딸아이는 대학병원에 있다. 수술을

하루 앞두고 옷가지를 챙기러 서울의 바깥으로 피

난 중이다. 철교 아래에서 길은 완전히 막혀버렸다.

레커차 기사와 보험사 직원이 철교의 그림자에 수

련의처럼 모여 수선거렸다. 한강의 다리를 처음 본

사람들은 입이 쩍 벌어졌다. 둔탁하고 높은 소리를

내는 괴물이 한강을 단번에 건너 산등성이 사이로

사라졌다. 딸아이는 심장 수술을 앞두고 있다. 의사

와 마주 앉아 동의서를 작성했다. 일본인과 러시아

인이 첫 운행을 함께 보고 근대식으로 박수 치고 악

수했다. 인도교는 철교보다 먼저 폭파되었다. 인파

가 한강을 건너던 중이었다. 벗겨진 산등성이에서

포탄이 날아와 근대식 다리를 분질러버렸다. 나는

아이를 끌어안고 있었다. 머리 위에 열차 석 대가 지

나가는 동안 철교의 소란은 끝나지 않았다. 정해진

노선에 따라 사후 처리될 것이지만 더는 기다릴 수

없다. 딸이 철교를 건넌다. 나는 다리 밑에서 피고름

처럼 빌딩을 두린 산등성이를 쳐다본다. 저 사이에

서 포탄이 날아올 것 같다. 나는 차선을 탈출해 철교

위를 달리는 열차의 지붕에 오른다. 딸의 손목을 잡

는다. 크고 작은 괴물 여러 마리가 철교를 맹렬하게

건너고 있었다.


『여수』 서효인, 2017, 문학과지성사


『여수』 시집에는 이 시와 비슷한 형식의 시가 몇 편 더 수록되었다. 그중, 「장충체육관」은 1970년대 프로레슬링의 장면과 1981년 3월 체육관 선거 장면, 그리고 2000년대 뮤지션 공연 장면으로 이루어진 시인데, 나는 여기에 무작정 1990년대 배구 경기 장면을 추가하고 싶었다. 당시 여고생들 인기를 사이좋게 양분해 가졌던 스포츠는 농구와 배구였고, 특히 대학 농구와 대학 배구의 전성기라서 몇몇 선수들에게는 웬만한 연예인 못지않은 규모의 팬들이 있었다. 서울에서 배구 경기가 주로 열린 장소가 바로 장충체육관이라 방학이나 주말엔 가끔 친구와 장충체육관을 찾아 팀을 응원하기도 하고, 키가 큰 선수들의 높은 점프력과 강력한 스파이크를 보며 스트레스를 풀곤 했다.

그래서인지 요즘도 장충체육관 근처를 지날 때면 그때가 기억난다. 앞으로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당장 어느 대학교를 가야 할지 막막하고 막연했던 현실을 잊은 채, 배구선수들에게 열광했던 고등학생 나를 스쳐 지나가는 것 같다.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를 만난다면 무어라 말할까?


그 밖에 함께 이야기한 시는 「김치 담그는 노인」, 「북클럽에서의 만남」,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 「육교에서의 친구들」, 「로맨스」였다. 이별의 정서를 담아 할머니에 대해 시를 많이 썼다는 이야기, 시인 자신에 대해 정리하는 마음으로 쓴 시와, 깨어있고자 참여하였던 북클럽에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편협된 인식을 목격한 이야기, 친구들이 좋아 함께 다닌 성당 앞 육교의 추억, 그리고 시를 쓰고 난 후 우연히 만난 친구의 소식들을 시낭독회에서 듣고 있노라니, 나는 진정 시의 뒷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여러 사람이 사랑하는 방식, 살아가는 방식을 들음으로써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느낌이 좋았다.

『나는 나를 사랑해서 나를 혐오하고』 시집의 「김치 담그는 노인」
『나는 나를 사랑해서 나를 혐오하고』 시집의 「로맨스」

『여수』의 시들은 장소를 제목으로 한 시, 한 장소에서 시간을 두고 일어난 역사적 개인적 사건을 녹여 한 덩어리로 만든 시가 많다는 것과 함께, 연과 행의 구분이 없는 시가 많다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 마지막 특징에 대해 서효인 시인은 연과 행을 나누는 것은 고도로 민감한 행위이며, 연은 한 템포를 쉬는 구분이 되는데, 자신의 시는 한 호흡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연을 구분하지 않는다고 친절하게 답해주었다.

『여수』 시집의 「이태원」과 『소년 파르티잔 행동 지침』 시집의 「일어서, 건담」 필사 필사

함께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서효인 시인의 첫 시집 『소년 파르티잔 행동지침』에 수록된 「일어서, 건담」이라는 제목을 보고는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아들이 건담을 좋아하여 종종 조립하기도 하고, 관련 영상을 보기도 하는데, 시에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휴먼은 우주의 항로를 돈다. 조화롭게 진열된 별들을 우
주선에 담는다. 무수한 별들의 쓰임을 모두 알 수는 없는
일. 그들은 혼돈을 즐긴다. 휴먼의 입맛에 맞게 가공된 숱
한 은하들의 노선이 입맛대로 흐트러진다. 별들의 질서를
바로잡는 건담.
…’

문득 서효인 시인은 언제 시에 관심이 생겨 시인이 될 결심을 했는지 궁금해 조심스레 질문을 하였다. 그랬더니 시는 초등학교 고학년과 중학교 때 어머니의 다이어리에 적힌 시를 보게 되어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의외의 답변을 받았다. 예상하기로 고등학교 때 처음 시를 접하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초등학교 고학년 때 시를 읽기 시작했다니……

'서효인 시인은 일찍 문학적 감수성에 눈뜬 소년이었구나.'라는 생각 하나와, '지금 아들이 접한 것들 중 어느 것이 계기가 되어 미래를 향해 나아갈 동력으로 발전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하나를 품고 시낭독회를 마쳤다.

시낭독회 후 아들을 위한 시집『소년 파르티잔 행동 지침』과 나를 위한『여수』시집에 받은 서효인 시인 서명

*참고 자료

1.『여수』 서효인, 2017, 문학과지성사

2.『소년 파르티잔 행동지침』 서효인, 2010, 민음사

3.『나는 나를 사랑해서 나를 혐오하고』 서효인, 2022, 문학동네

4. 반달서림 블로그의 서효인 시인 시낭독회 안내문 (https://blog.naver.com/bandalseorim/223249088525)

5. 반달서림 카페의 서효 시인 시낭독회 안내문 (https://cafe.naver.com/bandalseorim/9770)

6. 반달서림 블로그의 서효인 시인 시낭독회 후기 (https://blog.naver.com/bandalseorim/223265868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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