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9] 새 보금자리에서 다시 시작을

- 옮겨진 반달서림, 다음 이야기의 시작

by 줄기

* 2025년 1월 25일 (토요일) ~ 2025년 9월 21일 (일요일)

반달서림이 새 보금자리로 이사하는 날은 크리스마스날로 정해졌다고 했다. 평일에 이사를 하게 될 경우 상가의 다른 상점이 영업하는 데 불가피하게 끼칠 수 있는 불편함을 고려한 배려에서 온 결정이었다. 이전할 새 공간은 이미 공실이었지만, 뚝딱 짐을 옮기는 것으로 이사가 끝날 수는 없는 법, 바닥 공사와 같이 이사 전 미리 손보아야 할 부분이 있었다. 대표님은 여전히 베트남에 있는 가운데, 이사 전 필요한 업무를 지시하고 그때 그때 시간이 가능한 서점원들이 몸을 움직여 새로운 반달서림 공간 생성에 일조하였다.


그중 내가 받은 임무는 12월 초 토요일 견적을 내기 위해 인테리어 업자분이 예비 반달서림 공간을 방문했을 때 문을 열고 보여주는 것. 조금 일찍 도착해서 추위를 피해 가구 하나 없이 텅 비어 있는 매장에 들어가 가만히 서 있으려니, 어디선가 심장을 때리는 “쿵” 또는 “퍽”하는 불규칙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폐점 또는 입점을 준비 중인 어느 매장이 공사를 하는 건가 싶어, 공사하는 매장을 확인 겸 일단 복도로 나가보았는데… 매장 공사가 아니었다.

더 크게 들리는 소리와 바로 보이는 앞 매장의 간판은 “XXX 스크린골프”. 그러니까 이 쿵퍽 소리는 복도 너머에서 천차만별 골퍼들이 날리는 각양각색 샷이 스크린에 부딪치는 소리였던 것이다. 이거 큰일이다 싶었다. 그 힘찬 소리가 두 겹의 유리벽과 복도의 공간을 뚫고 예비 반달서림까지 와닿는다면…… 북토크나 글쓰기 모임, 반달음악회 등 책방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할 때 방해요소가 될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이윽고 인테리어 업자분이 오셔서 휘리릭 견적을 낸 후 이내 자리를 뜨셨고, 나는 대표님에게 견적 결과를 알리면서 바로 앞 스크린골프장의 소리에 대해서도 말해주었다. “아~ 앞에 스크린골프장이 있었나요? 특별히 기억이 나지 않네요….” 라며 그 소리가 좀 거슬릴 수도 있겠다는 짧고 얕은 우려를 표할 뿐이었다. 대범하고 낙천적인 대표님…. 그 얕은 우려가 모쪼록 기우에 불과하기를 바라는 나의 마음을 알까 싶고......


어느덧 시간은 흘러 입주일이 되었다. 책들의 이사는 12월 25일로 끝나지만 책장에 분류에 맞추어 정리하는 일과 이것저것 설치하는 일이 만만치 않아 정식 오픈일은 1월 2일로 하려 한다고 했다. 반달서림 이전 일정에 맞추어 대표님도 베트남에서 오셨으니, 대표님도 만날 겸 짐 정리를 도우려 중간에 한 번 정도 갔는데, 도움은커녕 뭘 할지 모르겠기에 그냥 책장에 책을 꽂아 두는 일을 했다. 이렇게 꽂아 두더라도, 아마 대표님 나름의 북큐레이션 기준에 따라 다른 칸으로 이동될 것을 알았지만 별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지난번 왔을 때 들었던 쿵퍽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서점에 들어섰을 때 밖에 1톤 트럭이 있고 짐칸에 폐자재가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 스크린골프장은 반달서림 입주 전 퇴거를 하였고, 내가 본 폐자재는 스크린골프장 철거 과정에서 나온 자재들이었던 것. 절묘한 타이밍이요, 하늘의 도우심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면서, 반달서림 간판의 반달 모양에 무지개색이 얹어진 듯 새로운 출발점에 좋은 징조라 여겨졌다. 새 보금자리에서 꽃길을 걸을 수 있는 반달서림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함께……

반달서림 새 보금자리 간판을 단 날 찍은 원본 사진과, 새로운 시작 무지개색 희망으로 꽃길을 걷기 바라는 마음으로 ChatGPT에게 부탁해 그린 그림

멀리 있는 반달서림 팬이 보내준 이전 축하 백설기를 나누어 먹고 본격적인 영업을 시작하였고, 새로운 반달서림에서 나는 1월 25일 토요일에 첫 근무를 하였다. 익숙한 사물이지만 새로운 공간에서 있으니 왠지 모르게 낯설어 서랍을 열어 물건들의 위치들을 파악하고 이전과 바뀐 자리에서의 새로운 역할을 익혔다. 그렇게 1월부터 9월까지 지금까지 월간 서점원으로서 9번의 근무. 공원 옆 상가이다 보니 이전 위치보다는 확실히 책방 앞을 지나는 사람들은 많은 편이다. 그러나, 책방 앞을 오가는 그 사람들이 책방 문을 열고 들어오는 빈도가 그다지 많지는 않다. 그럼에도 몇몇 기억이 남는 손님들이 있으니......


이전 간판과 새로운 간판이 함께

그 첫 번째 손님은 중학교에 입학한 손주에게 천자문을 선물해 주신 할아버지. 어느 날 할아버지께서 들어오셔서 “주머니에 들어갈 수 있는 작은 천자문 책이 있나요?”라고 말씀하셨다. 며칠 전 반달서림 서점원 단체 카톡방에 천자문 책을 찾으시는 할아버지께서 오셨다는 문자를 본 기억이 났다. 서점에는 없는 책이라 인근의 큰 서점을 소개해 주셨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그 서점에서도 적절한 천차문 책을 찾지 못하셔서 주말인 토요일에 다시 오신 것 같았다.

함께 찾아봐 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는 할아버지……. 나는 폭풍 검색으로 이내 적절한 크기로 보이는 천자문 책을 찾았다. 『고급 한자교과서 천자문』 제목의 414쪽으로, 두께는 있으나 112 x 150 mm 판형으로 A6와 비슷한, A4용지의 약 4분의 1 크기의 책이다. 책 사진을 보여드리고 비교를 할 수 있는 책을 가져와 책의 두께와 가로, 세로 길이를 가늠하실 수 있도록 알려드렸다. “이 정도 크기면 주머니에 들어갈 수 있을까?....” 미심쩍게 혼잣말을 하시며 주문을 하시는 할아버지 연락처를 받아 적고, 책이 도착하면 문자를 드리겠노라 말씀드렸다. 그러면서 만약 도착한 책이 할아버지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내가 사서 이 참에 천자문 필사를 해야겠다고 내심 생각했다.

손자에게 선물할 주머니에 들어갈 정도로 작은 천자문 책을 찾으시는 할아버니께서 주문하신 『고급 한자교과서 천자문』414쪽 A6 크기

토요일에 주문한 책이 그다음 주 초에 도착했다는 소식과 천자문 책 사진이 카톡방에 올라왔다. 옆의 화분 크기로 보아 작은 천자문임에 틀림이 없어 보였지만, 나로서는 고객에게 처음으로 추천한 책이라 직접 책을 눈으로 보고 싶어서 내심 할아버지께서 늦게 찾아가셨으면 하고 바랐다. 하지만, 손자가 하루빨리 천자문을 익히길 바라셨던 듯 금방 책방에 오셔서 만족해하시며 책을 구매해 가셨다는 소식이 단체 카톡방에 올라왔다. 손자가 천자문 한 글자를 익힐 때마다 오 백원 용돈을 주기로 했다고 할아버지께서 서점원에게 말씀하셨다고 하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손자에게 천자문을 익히도록 하려는 할아버지 전략이 참 훈훈하다. 그 손자는 천자문을 충실히 익히며 용돈을 받고 있을지 자못 궁금해진다.

두 번째 손님, 아니 손님들은 문을 닫을 때 즈음 들어온 젊은 여성 두 분. 이제 문을 닫아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여성 두 분이 들어왔다. 서가를 천천히 둘러보며 서로 소곤소곤 존댓말로 이야기하는데, 직장 동료나 동호회 회원 사이인가 싶어 괜스레 그 관계가 궁금해졌다. 이 내 한 분이 고다 아야 작가의 『나무』를 골라 계산대로 왔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 (Perfect Days)》에 등장해 눈길을 끌기도 한 책이라 계산하면서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다가 결국,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그런데 두 분은 직장 동료신가요?”라고 질문을 하고야 말았다. 그런데 돌아온 답변은 의외였다. 두 분은 여행지 치앙마이에서 만난 사이라는 것.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이야기가 통해 친구가 되었다고……

여행지에서 만난 사이라 하니 내게도 몇몇 그녀들이 떠올랐다. 21년 전 추석 연휴를 맞아 생애 처음 혼자 떠난 유럽 여행에서 만난 여성분들. 먼저 체코의 민박집을 예약하는 과정에서 알게 되어 프랑크푸르트에서 만나 체코 민박집까지 함께 이동한 ‘여.행.하.는. 여.자.’. 함께 이동했다고 했지만,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기차역까지의 교통편조차 알아 오지 않은 나와는 반대로 꼼꼼하게 동선을 계획한 그녀에게 전적으로 의존한 이동이었다. 이번이 세 번째 여행이라고 말한 그녀는 이후 세계 곳곳을 누비며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한 것을 블로그 글로 올렸고, 몇 년이 지나서는 라이프스타일의 월간 잡지에 등장하기도 하여 반가움과 여행에 대한 대리만족을 주었다.

다음으로 부다페스트에서 빈으로 가는 밤열차의 객실에 나와 함께 유일한 승객이었던 한국인 처자. 이 처자는 심지어 기차에서 졸고 있던 나를 내려야 할 역에서 깨워주어 그다음 타야 했던 야간열차를 무사히 탈 수 있게 한, 찰나로 스쳐 지나갔지만 참으로 고마운 처자였다.

그리고 바티칸 투어에서 만난 내 또래 지역 주민 여성들. 먼 이국 땅에서 동네사람을 만날 줄이야...... 유사한 업종에 종사하며 직장마저 근처라 바티칸 투어 시 함께 다녔는데, 투어 도중 잠깐 쉬면서 젤라또를 먹을 때 마치 다비드 상이 걸어가는 듯 우리 눈앞을 유유히 지나가던 현지 미청년을 동시에 보며 감탄했던 기억이 새롭다.

이러다 보니 세계 어디를 가든 한국 여성이 없는 곳이 없다는 믿음이 생겼고, 연대감에 마음 든든했다. 이금이 작가의 『알로하, 나의 엄마들』을 읽으면서, 그리고 남해 독일마을을 여행하면서 느꼈던, 외지에서 강해지는 한국 여성의 힘이 시대를 따라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것인가 생각을 하게 된다.

다시 손님 책 계산을 하면서 대화를 이어가는데, 그 두 분 중 한 분이 호주로 긴 여행을 떠나게 되어 떠나기 전 만남을 가진 것이라고 했다. 혼자만의 생각일 수도 있지만, 왠지 두 분과도 슬쩍 연대의식이 생기는 것 같아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니 옆 건물의 ‘고울연, 차’와도 결이 맞겠다 싶어 혹시 나중에 시간이 되시면 들러보시라 권했는데, 이 여성분들 서점을 나서서는 바로 ‘고울연, 차’로 향하였다는…. 예상대로 ‘고울연, 차’ 대표님과도 그 두 분이 잘 맞아 ‘고울연, 차’ 영업종료 시간까지 좋은 차와 소중한 시간을 함께 하였다. 좋은 사람들을 연결하고 좋은 시간을 갖도록 중개하는 지역민 역할을 한 것 같아 뿌듯했다.

그 밖에도 생각나는 손님(?)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서점으로 들어와 서가를 한 바퀴 돌고 편안하게 자리 잡고 앉은 하얀 진돗개. 신기해서 쳐다보고 있으려니 같이 들어오신 어머님께서 반달서림을 몇 번 와 본 적이 있고 반달서림을 좋아하는 개라고 말씀해 주셨다. 베트남에 간 반달서림 반달이도 저렇게 컸을까? 궁금증이 생긴 한 편, 두 마리 개가 반달서림에서 만나 좋아하는 책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순간 상상되어 웃음이 났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은 아닌가 보다.


이전한 지 10개월이 된 지금 새 공간에서 북토크, 책모임, 반달음악회, 그리고 시와 함께 하는 프로그램도 이어가고 있다. 그만큼 새로운 이야기도 쌓이고 있어서 그 이야기를 하나하나 글로 풀어 올려볼 생각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반달서림 새 보금자리 이곳저곳

*참고자료

1. 반달서림 이삿날 감상 안내문 (https://blog.naver.com/bandalseorim/223704619904)

2. 반달서림 새 보금자리 소개 안내문 (https://blog.naver.com/bandalseorim/223716589747)

3.『고급 한자교과서 천자문』 이홍식, 지식서관, 2006

4.『나무』 고다 아야/차주연, 책사람, 2024

5.『알로하, 나의 엄마들』 이금이, 창비, 2020

6. 남해독일마을 소개 (https://korean.visitkorea.or.kr/detail/ms_detail.do?cotid=d79e9827-abf3-44b3-bc01-afd1ddd04017)